|
과연 우리가 믿는 것은? -정호신부- 우리는 사순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정해놓고 그 과정을 살피며 함께 하는 시기입니다. 물론 이 죽음은 부활을 희망하고 있음도 우리는 압니다. 그렇지만 당장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복음 속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그분의 행동이나 말씀 속에서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 이유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죽을만한 일을 하신 적도 없을뿐더러 우연하게라도 사고를 만날 여지조차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것도 하느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신성모독이라는 날조된 명목 하나로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수밖에 없으셨는지 알려줍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해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이 과연 하느님을 믿었는지 예수님은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신지 믿지 않는 백성들에게 당신 스스로의 증언보다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심을 증언한 숱한 예언자 중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세례자 요한을 당신의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세례자 요한의 예언보다 훨씬 중요한 예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알리고 준비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또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오신 이유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를 예언했다면 구세주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주시러 오셨으니 훨씬 중요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누구의 증언으로도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도, 성서 속의 증언도, 그들이 하느님을 믿게 해 준 고마운 조상 모세의 가르침 속에서도 드러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온 역사에 기록된 하느님 구원을 그들은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눈앞에 펼쳐지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보면서도, 곧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고,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그들은 구세주를 기다린다고들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불신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십니다.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시며 그토록 바라신 것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진심을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이었기에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안타까우신 듯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꼬집으십니다. “그러나 아마 딴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내세우고 온다면 너희는 그를 맞아들일 것이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도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바라지 않으니 어떻게 나를 믿을 수가 있겠느냐? ” 만일 예수님이 당신 스스로의 놀라운 모습을 자랑하며 다니셨다면 그래서 거기에 걸맞은 품위 있는 행동과 화려한 언변, 사교술을 통해 사람들 앞에 섰다면 그들은 예수님께 분명 열광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정말 인정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실제 왕으로 오셨거나 이름높은 스승으로 등장했다면 정말 가능했을지도 모를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사랑만을 전하셨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분은 그분의 이름을 숨기시고 당신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이 전해주시는 사랑을 사람들이 느끼도록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건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이끄셨습니다. 사랑이 아버지의 뜻이었고, 또 예수님의 삶의 이유였고 그것이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장 눈 앞에 나타난 사랑을 거부했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믿는 것이 하느님이 아니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팔아 자신들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악한 모습을 지닌 이스라엘을 고발할 것은 사랑하러 오신 하느님, 예수님이 아닌 그들에게 하느님을 전해준 모세일거라고 예수님이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삶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설명이 안되는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장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 역사 전체를 부정하는 행동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구세주를 기다린다고 하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기막힌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 고백하고 따르는 신앙생활의 모습도 혹시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타난 스스로 잘난 사람들이 아닌가요? 성공에 약한 사람들. 성공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들은 예수님이 당장 나타나셔도 그분의 평범한 모습에 그분을 인정하지 못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무수히 지나치는 소중한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또다시 못 박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2007.03.22 /[강론] 과연 우리가 믿는 것은 [정호신부님]
2007. 3. 23. 오전 9:17:40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