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그대는 받아 들여졌다[류해욱신부님] 2007.03.15

2007. 3. 15. 오전 11:54:04

글자

그대는 받아들여졌다.


  

  오늘 말씀들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에 와 닿았던 단어들은 영혼과 정신, 그리고 마음이었습니다, 독서인 다니엘서에서는 화덕에 던져진 아자르야가 불 속에서 하느님께 백성들이 죄를 지어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말아달라고 용서를 청합니다. 이제 저희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겠다고 호소합니다. 복음에서는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며 왕과 종들과의 셈을 밝히는 비유를 통해 서로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이 경고에 앞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비유의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위로에 찬 말씀입니다. 용서란 받아들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서 전체를 흐르는 주제가 바로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란 사랑의 구체적인 한 표현입니다. 사랑의 부분집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란 구체적인 사랑의 한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드신 비유에서 등장하는 일만 탈란트나 되는 빚을 탕감 받은 종은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동료를, 바로 이웃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모습에 여러분들 각자는 어떤 느낌을 갖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럴 수가 있는가? 그런 뻔뻔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분노를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실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탕감 받았는지를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의 빚은 결코 탕감해 주려 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자기 자신에게 합리화시키면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나는 그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 사람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결코 그 사람의 행동을 잊을 수 없다”라고 마음의 칼날을 세우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못한다고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이라고 하셨는데, 말은 용서한다고 하면서 마음은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지요. 실상, 곰곰이 생각하면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참을 수 없이 자존심이 상했고 그 사람에게 심한 분노를 느낍니다. 나는 이제 그 사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처럼 느낍니다. 맞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힘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용서한다는 것이 불가능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서 우리도 우리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요히 앉아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노라면 문득 나 자신이 일만 탈란트의 빚을 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한 푼 남김없이 탕감 받은 존재, 온전히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것을 체험합니다.

  고백소에서 다른 사람의 죄를 듣고 사죄경을 외워야하는 신부인 저 자신도 매일 매일 숱한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한 인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내면의 온갖 추한 모습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벼락을 내리시지 않고 여전히 사랑하시고 받아들여 주십니다. 또한, 제가 저 친구는 도저히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하는 그 친구에게도 벼락을 내리시기는커녕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때로는 그것이 야속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죄 많은 인간인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신다는 것을 느끼고 깨닫는 것, 이것이 용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데서 시작됩니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임 없이 남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참으로 소중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에 관한 회심을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경시나 교만으로부터 자기 인정과 감사로의 근본적인 회심입니다. 사실 자기 교만은 늘 자기 경시의 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대개 열등감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잘난 척 하는 사람 눈꼴 사나워서 영 못 봐 주지요? 이제부터 좀 봐 주세요. 잘 난 척하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열등감의 표현이니 불쌍한 마음, 연민의 마음으로 좀 봐 주세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회심을 체험할 때, 나는 중요하고, 사랑스럽고, 쓸모 있는 존재이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나와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와 같은 회심이 또한 내가 특별한 재능과 기질을 지닌 한 고유한 인간, 인격체라는 것, 무엇보다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이와 같은 자기를 받아들임을 믿음과 연결하여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믿음이란 받아들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용기이다.”

  이 자기 긍정, 자기를 받아들임의 믿음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감동되거나 이끌렸을 때 생깁니다. Tillich는 이 회심을 “그대는 받아들여졌다”라는 제목의 강론에서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제가 강론의 핵심이 되는 일부를 번역해 보았습니다.


  “그대들은 은총에 의해 매혹된다는 의미를 아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결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은총의 이끌림에 의해 변화되도록 우리자신을 맡겨드리지 않는다면, 결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은총의 움직임은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자만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절실히 필요로 느끼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우리자신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놀랍게도, 은총은 우리가 커다란 고통과 불안에 싸여 있을 때, 우리에게 슬며시 다가옵니다. 오랫동안 추구했던 완벽한 삶이 실현되지 않아 좌절을 체험할 때, 수 년 동안 계속되었던 오랜 강박관념이 갑자기 강하게 엄습해 올 때, 실망이 모든 기쁨과 용기를 거두어 갔다고 느낄 때, 그 때, 은총은 소리 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한 줄기의 빛이 어둠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옵니다. 그것은 마치 한 목소리의 속삭임과 같습니다. ‘그대는 받아들여졌다,’ 그대보다 위대한 누군가에 의해, 그대가 알지 못하는 이름의 누군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고요한 목소리의 속삭임입니다. 지금 그 이름을 묻지 마십시오. 아마도, 훗날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에 어떤 것도 추구하려고도, 완성하려고도, 의도하려고도 마십시오. 단순히 그대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때, 우리는 은총을 체험합니다.”


  아름다운 강론이지요.

  우리가 우리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은총이 우리를 타인과 분리시키는 벽을 무너뜨리게 합니다. 그 은총이 용서를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받아들일 때, 또한 타인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체험합니다. 그 까닭은 타인의 행동과 삶이 내게 적대적일지라도, 때로는 내게 해를 끼칠지라도 은총의 속삭임을 통하여, 우리는 그 사람도 우리가 속한 같은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과 바로 그분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존재이고, 처음부터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와 더불어 폴 틸리히의 말을 마음에 새깁시다.


  “단순히 그대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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