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시- 영원을 향해
오랜만입니다. 제가 그동안 피정지도와 신앙강좌 등으로 미국에 다녀오느라고 강론을 못 올렸습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잘 다녀왔다고 인사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두 개의 독서와 복음의 공통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신앙인으로서 삶의 길에서 겪게 되는 도전, 부르심에 대한 응답, 결단, 현실에 대한 안주가 아닌 끊임없이 열려있는 마음, 열고자 하는 자세, 한마디로 순명이 그것일 것입니다. 제 1독서로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길을 떠난 후 의문을 던지는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 수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제 2독서에서 신앙의 여정에서 겪게 되는 고난에서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라는 바오로의 필리피인들에게 보내는 서간을 들었으며, 복음에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에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거역할 수 없이 순명해야 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는 삶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으며 그 부르심에 응답해 나가는 우리 인간의 길, 신앙 여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걷게 되는 믿음의 여정에서 출발점을 보여 줍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은 그의 삶 깊숙한 곳으로 하느님이 찾아 오셨고 그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그의 삶은 전혀 다른 삶이 됩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시기와 방법은 다르겠지만, 돌아보면 우리 신앙인의 삶도 아브라함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길은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모험의 여정이고 그 여정은 오직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때로는 모든 것은 버리고 떠나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그분이십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 깊은 곳에 당신을 향한 그리움, 당신을 추구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갈증을 심어놓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 갈증이 없는 사람은 다만 그 갈증이 잠을 자고 있는 것이지요. 영원한 세계를 갈망하는 인간의 갈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길가메시라는 문헌이 있습니다. 기원전 3000년경, 문명의 발생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국가 우룩을 다스리던 왕 길가메시의 서사시 일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먼 여행을 한 것은 ‘머나 먼 곳’이라고 불리는 당신을 만나려고 세상을 헤매었고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며 바다를 건넜고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오, 아버지, 당신께 삶과 죽음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영원한 삶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서사시는 영원한 것을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또한, 너무나도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여 마지 않삽나이다”라는 고백도 바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길을 떠나는 존재이며 그 종착역은 하느님, 그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이 말씀은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 볼 때 거의 죽음을 의미하는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함께 모여서 공동으로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면서 살아가던 고대 씨족사회에서 그 씨족을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온전히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그 명령에 순명하면서 고향을 등지고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무엇을 찾아 고향을 떠난 것입니까? 보다 나은 정착지를 찾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떠난 것입니다. 그곳은 실제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이 가득 찬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신뢰 하나를 움켜쥐고 낯선 땅을 향해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우리 ‘신앙인들의 성조’가 된 것입니다.
이 아브람의 이야기는 우리 신앙 공동체에 순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순명은 바로 아브람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앙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근본적인 태도이며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예’라는 대답이었고 그것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에서 듣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이 철저한 ‘예’에 대한 하느님의 보증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아니, 바로 우리 자신들에 이르기까지 이 ‘예’, 바로 순명은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희망하는 태도입니다. 순명은 바로 신뢰와 희망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이 태도에서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삶의 자세인 순명은 근본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삶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공동체는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순명으로부터 오는 자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들리시겠지만 순명은 인간이 어디까지 자신을 버릴 수 있는가, 또는 자기의 뜻을 희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에서 자유롭게 되고 보다 높은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에 자신을 맡길 때 더 큰 자유를 맛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는 교회 안에서 일하고 계신 성령에 대한 완전히 열린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 안에서의 분별, 영에게 열린 마음의 태도로 살아가면서 그분의 이끄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령의 이끄심을 알 수 있는가? 한마디로 기도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바로 하느님, 당신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처럼 길을 떠나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그 여정, 때로는 고난의 여정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지는 제자들에게 미리, 목적지,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잠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도 아래 그분이 목적하신 곳을 향해 가는 여정으로 삶을 이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서를 통해 그 여정을 신앙의 언어로 노래했고, 고뇌하고 희망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성서를 읽으며 그것을 묵상하고 그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 기쁨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겪어야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때로 그 여정이 힘들게 느껴질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거룩한 변모 사건을 상기하며 위로를 받읍시다.
우리가 삶에서 체험하는 은총이 바로 이 거룩한 변모 사건인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께서 해와 같이 빛나는 그 모습을 뵙지 못한다하더라도 어떤 은총을 체험합니다. 예컨대, 아픈 나의 손을 잡아준 친구의 얼굴에서 위로를 느꼈다면, 그 평화의 시간이 주님께서 우리의 삶의 순간을 스치는 거룩한 변모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