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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 4 주일. 2007. 1. 28. 토평동.
예레 1, 4-5.17-19. 1코린 12, 31-13, 13. 루카 4, 21-30.
지난주에 본 것처럼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은총의 해를 선포하시며, 당신께서 메시아임을 은연중에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말씀에 감탄합니다. 보통 랍비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씀을 풀이하고 가르치는데, 예수께서는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마무리하는 가르침의 방식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회당에서 예수님을 보며 놀라워한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이었습니다.(루카 4, 22) 그들이 말씀을 들을 때는 그분의 출신 배경이나 그분의 학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은총의 말씀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 22)라는 출신배경으로 가려버린 것입니다.
당시 나자렛은 인구 200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성읍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자라실 때 나자렛 근처의 큰 도시가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그 도시를 세우기 위해 많은 목수들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그곳에서 목수 일을 했고, 아들 예수도 도왔을 것입니다. 이처럼 작은 도시에서 그런 일을 하며 자라난 예수를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발전하는 존재이지 멈춰서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누구나 나은 꿈을 꾸고 나아지려 하며, 나아집니다. 예수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오신 것은 그 비천함이 영광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지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질 수 있는 삶이고, 궁극적으로 나아짐의 완성이란 구원임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개천에서도 용이 난다는 것을 보여주신 예수님.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좀처럼 깨닫지 못하는 듯합니다. 용은 용인데, 사람들은 여전히 개천이라는 데에 주목하면서 예수님 안에 있는 은총의 말씀을 가린 것입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 22)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며 숨이 탁 막혔을 것입니다. 은총은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데, 그들에겐 출신이라는, 자신들의 생각이 커다란 벽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죠. 은총은 은총으로 받아들일 때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똑같이 씨를 뿌리시지만, 그 땅이 어느 것이냐에 따라 열매 맺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 주님께서는 다른 씨를 뿌리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병이나 고쳐라”(루카 4, 23)
‘네 일이나 똑바로 하라.’ 우리를 가르치려 하지 말고, 네 일 즉 목수일이나 잘하라는 것입니다. 은총의 말씀이 이렇게 개천으로 버려집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내가 쌓아두고 있는 벽, 편견, 선입견, 아집, 혈연 지연, 학연 등등. 그밖의 내가 쌓아두고 있는 벽들. 그것이 은총을 가로막고 있으며, 순수함을 혼탁하게 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영광을 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벽 때문에 은총을 혼탁하게 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전에 있었던 가르침마저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이제 이곳에 오기 전 사실로 받아들였던 가파르나움에서 있었던 기적들마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앞으로 앞으로 더 발전하며 나아가야 하는 삶이 자꾸만 뒤로 퇴보합니다. 과거의 이것도 저것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내 눈에는 당신이 요셉의 아들로만 보인다, 그러니 요셉의 아들일 뿐이라는 생각을 고쳐주기 위해 어디 기적을 베풀어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닫혀진 마음을 기적으로 푼다면, 기적은 또다른 기적을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닫혀진 마음을 보시며,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를 드십니다. 그들처럼 예언자란 박해를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이란, 구원이란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은총으로 다가가는 것이고, 그것은 선민이 아니라도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지만, 사렙타의 과부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기적이 베풀어진 것은 그들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잇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즉 구원이란 것이 유다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은 사실이지만, 구원은 선민인 유다인들에게만 있다는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죽이려는 그들의 움직임은 가속화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내몰아 죽이려하죠.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당하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루카 4, 30) 가십니다. 당신 가시는 길의 당당함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당신은 그렇게 당당하십니다. 진리는 당당합니다. 그들 한가운데로 질러 가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이 세우고 있는 벽을 뚫으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길이며, 당신께서 그들의 벽을 뚫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분이 내시는 길로 우리의 막힌 부분을 뚫어야 합니다. 나만의 울타리, 나만의 벽을 주 예수의 발걸음으로 허물어야 합니다.
지난주(1월 21일자) 가톨릭 신문에 비신자가 본 가톨릭이라는 기사를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가톨릭은 세속과 구분을 뚜렷이 한다.” 보편이라고 하면서도 세속과 벽을 쌓은 채 자신만의 철옹성을 쌓은 듯하다는 것이죠. 산택 삼아 드나들 수 있는 사찰과는 달리 교우가 아니면(어느 때는 교우조차 위압감을 느낀다) 감히(?) 발을 들일 수도 없는 분위기, 그것이 민중의 종교이기를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시각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반성할 부분입니다. 예수는 벽을 허물라고, 선민과 비선민 사이의 벽을 허물고, 가진 자와 없는 자의 벽을 허물고, 신앙공동체와 세상의 벽을 허무셨는데, 우리는 너무 가리는 것이 많습니다.
어제 예수의 형상이라는 비디오물을 보았습니다. 한 양치기 소년이 서기 320년경 예수님의 첫 형상을 그려낸 것부터 지금까지 진화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추적한 미술사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죠.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의 형상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의 모습은 이렇다’라는 자신들의 혹은 공동체의 신앙이 만들어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예수님은 어떤 형상을 가지고 계신 분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고,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가?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해하는 것은 형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겠죠. 그래서 우리는 글을 쓸 때 어느 주인공이라면 그의 키가 어느 정도인지, 생김새가 어떤지 묘사하고 궁금해하지만, 복음사가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행적이 중요했던 것이죠. 그 안에 은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분의 은총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말씀 안에서 은혜를 느끼며, 나의 벽을 과감히 허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 교감단 연수에 들어간 교감이 제게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신부님, 시키는 대로 하니까 편해요.” 예, 시키는 대로,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그 말씀을 따르면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아멘 |
다해 연중 제 4 주일./신부님, 시키는 대로 하니까 편해요 - 조성호 신부님
2007. 1. 29. 오전 11:3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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