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성탄 축일은 예수님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날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분이고 그분이 출생하자 동방에서 세 박사가 베틀레헴까지 와서 참배하였다고 말합니다. 루가복음서는 동방에서 왔다는 세 박사의 이야기는 모르고, 우리가 밤 미사에서 들은 대로 아우구스토 황제의 호구 조사령이 있었고. 요셉이 만삭의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인 베틀레헴으로 갔다가 외양간에서 예수를 출산하여 구유에 눕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들은 요한복음서는 이런 출생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모두 생략하고, 예수님의 기원이 하느님 안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듣고 배워서 실천해야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라는 생명으로 나타났고, 그분은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빛과 같은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고도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모세로부터 시작된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게 된 은총과 진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는 은총과 진리를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은총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베푸심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가 준 율법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는 하느님이 쉽게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 베풀고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지적하듯이 어둠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옳다고 믿으며 어둠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어둠이 결국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 기득권자들이 쉽게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요한 20,22 참조). 그러나 교회는 13세기에 발생한 개별 고해성사를 고집하면서 그것을 통하지 않으면 죄의 용서가 없는 듯이 처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가르쳤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합니다.’
인류역사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한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권력을 하느님이 주셨다고 생각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종교 집단의 기득권자들은 그들의 권한이 하느님의 것이라고 고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횡포에 시달리고 짓밟혔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타이르셨습니다. 당신도 섬기는 사람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그분에 대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성탄은 하느님이 기득권자들의 횡포 안에 계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작고 연약한 하나의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어느 성가가 노래하듯이 예수님은 ‘승리하고 다스리고 명령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들도 행복하라고 선언하면서 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분 생명이 보여주신 삶을 배웁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고치고 살리면서 축복하였습니다. 그 생명은 절망에 우는 이들을 살렸습니다. 그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을 충실히 살다가 이 세상 권력자들의 거부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둠을 더 좋아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오늘 복음은 말했습니다. 이웃을 돌보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이웃이 잘못하면 잘못한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용서는 우리의 빛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풀고 용서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은 우리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져야 할 것이 너무 많고, 해야 일이 너무 많아,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빛을 추방해 버렸습니다. 우리 자신의 일에 골몰한 나머지 말씀이 우리의 삶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말씀을 성당 건물 안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베풀고 용서하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빛을 외면하고 어둠을 더 좋아하는 백성입니다.
오늘 성탄은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강생하여 새롭게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은혜로움의 진리로 충만하시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심오한 이론 안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일상생활 안에, 용서하고 살리는 은혜로운 우리의 실천 안에 있습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강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구유에 누운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안에서 자라야 하는 생명으로 구유에 계십니다. 진리는 우리의 실천 안에 자라야 하는 생명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 진리를 실천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고치며 살리는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나고 자라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 생각하는 어둠 안에 살고 있지만, 그 어둠을 밝히는 빛이 오늘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어제의 어두운 관행을 벗어나 진리의 빛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영접하여 우리 안에 진리를 발생시켜야 합니다.
성탄이 우리에게 기쁨의 축일인 것은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은 없고’ 예수님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 욥서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집착하고 욕심내는 것은 모두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14,1-2) 것들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베틀레헴 외양간의 구유에 누운 어린 예수 안에 당신 스스로를 나타내셨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가 충만할 것을 호소하면서 예수님은 구유에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