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대림 제 3 주간 토요일(12월 23일)
2006. 12. 23.
토평동.
말라 3, 1-4.23-24.
루카 1, 57-66.
무엇인가를 경험했다면 그는 그것의 증인이 됩니다. 다른 이에게 그것은 전하는 메신저가 되고, 그것을 못 받아들이는 이들을 바라보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왜 내가 경험을 했는데, 그것을 못 받아들일까? 타볼산에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라는 엄청난 사건을 경험했던 베드로는 주님 살아 생전에 그 믿음을 제대로 보이지 못했지만, 훗날 자신의 기억에 대해서 뚜렷이 떠올리며 자신의 체험을 전합니다.
내가 체험한 것은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비춰질 체험은 나를 통해 역사하실 주님의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의 엘리사벳이나 즈카르야는 이 체험의 증거자로서 이웃과 친척들이 인간적 일상의 삶에 묻혀있는 것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끌어냅니다. 이름에 얽힌 사건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적인 것을 자연스레 드러내지만, 하느님을 체험한 이 노부부는 주님을 체험한 대로 아기의 이름을 짓게 되고, 그들의 체험을 전해 받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경외합니다. 그리고 과연 “이 아기가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 66) 궁금해하면서 하느님의 손길에(역사하심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체험하는 신앙인으로 눈과 귀를 열어두고, 삶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체험된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주어진 은총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다른 이에게 역사하시려는 하느님의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 체험은 시련 가운데에서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신문을 보니 좋은 가전 제품을 만들기 위해 회사마다 가전 고문실이 있다고 하더군요. 잔혹한 고문을 견뎌낸 가전이 명품이 된다고 합니다. 어디 가전 제품만 그렇겠습니까? 모든 것이 단련되는 가운데 명품이 됩니다. 사람도 역시 시련 가운데에서 명품이 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도 오랜 기간 단련을 받았고, 요한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도 이 노부부는 시련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려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이었죠.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논리대로 밀어붙이려 해도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해야 합니다.”(루카 1, 60)라고 말하는 엘리사벳처럼, 우리도 단호히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에 아니라고 말합시다. 하느님의 뜻이 나의 삶에 있어 최우선인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내가 체험한 것에 대해 당당하고 단호하면서도, 그 체험이 다른 이를 향한 증거가 되도록 합시다. 그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