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청와대 습격사건 생포자 김신조 전격 증언 |
| “北 도주자 1명은 2000년 송이 들고 서울 온 박재경 인민군 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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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김씨와의 인터뷰를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그는 “더 이상 언론에 등장하고 싶지 않다”며 자체를 완강히 거절했다. 기자가 남양주성락교회까지 찾아갔지만 그의 부인으로부터 거절 의사를 전해들어야 했다. “제발 좀 가만히 놔두셨으면 해요. 상처가 너무 커요. 앞으로 언론과는 일절 만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니 제발 가 주세요.” 한편 1·21사건 당시 북으로 도주한 무장공비가 몇 명인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군 당국의 공식발표는 ‘생포 1명, 30명 전원사망’. 일부 언론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까지 김씨를 제외한 남파무장공비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1명 생포, 29명 사살, 나머지 한 명의 생사는 지금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정리했다. 김씨는 1명이 도주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1·21무장공비침투로’를 관광지로 개발한 문산, 연천 등의 지역민들도 1명이 도주한 것으로 믿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3명이 도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의 한 언론사에서 정리한 보도참고기록이다. “청와대 습격사건. 1968년 1월 북한의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부근에 침입해 한국경찰관과 총격전으로 이어진 무장게릴라사건. 특수부대원 27명이 사살되고 3명이 도주, 1명(김신조)이 체포됐다.” 생포자 김씨를 제외하고 전원 사망, 1명 도주, 3명 도주 등 혼선을 빚고 있다. 이처럼 사망자 수가 다른 이유는 사망사실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물증인 ‘시체’가 일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1사건 당시 김씨를 직접 조사했던 백동림 전 보안사(기무사) 수사과장(당시 방첩부대 수사계장·대위)은 “당시 대대적인 공비소탕작전을 벌였다. 대부분 사살하거나, 동사한 경우 시체라도 확인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지막까지 3구의 시체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 상 도주에 성공한 사람은 1명뿐이었을 것으로 군 내부에서는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백 전 과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시체 3구는 미확인 -‘실미도’라는 영화를 봤나. “아직 보지 못했다. 그때는 대북공작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와 유사한 사건이 많았다.” -첫 장면에 김신조씨가 강제로 체포되는 장면이 나온다. 김씨는 스스로 투항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생포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가. “포위되니까, ‘나 북한 장교다. 쏘지 말라’면서 투항한 것이다. 해석하기 나름인데,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서 도주할 곳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강제 체포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북한식으로 하면 자결이나 자폭해야 하는데 김신조는 그러지 않았다. 투항해서인지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그래서 수사관들에게 대우를 받았다.” -1·21사건 당시 김신조씨를 제외한 30명 전원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는데. “공비소탕작전을 1주일 이상 벌인 결과 처음에는 전멸된 것으로 알았다. 전방 부대에 뚫린 징후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미 군·경합동수색대가 편성돼 도주로를 완전 차단하고 샅샅이 수색했다. 교전과정에서 세게 저항해 아군측 피해도 있었지만,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기 때문에 결코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생포된 김신조를 제외한 30명 전원을 소탕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북으로 도주한 무장공비의 수에 대해 논란이 있다. 군 당국의 최종 판단은 몇 명이었나. “기관에서도 무척 궁금했었다. 내부적으로 처음에는 3명 정도 살아나갔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3구의 시체가 끝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빠져나간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시체는 없고….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북으로 도주에 성공한 한 군인의 이름과 그를 영웅시하는 내용을 북한방송을 통해 확인하게 됐다. 그래서 한 사람만 살아갔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우리의 최종판단은 한 명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가. “너무 오랜 일이어서 기억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기록도 없나. “당시 (북한방송 및 정보) 분석반들은 너무 바빴다.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주변국 정세가 급변하던 시기여서 하나의 사건에만 매달려서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관련 기록도 남기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분석반에 접수된 북한 정보 가운데 북한이 김신조 사건 관련자들을 숙청했다는 정보를 들은 바 있는가. “기억에 없다.” 남·북은 지금 정보전쟁중 1·21사건이 발생한 지 올해로 36년. 오랜 세월이 흘렀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분단현실은 그대로지만 서로의 경계는 무척 완화됐다. 총칼을 겨누며 북은 남으로, 남은 북으로 공작원을 보내던 일은 이제 옛일이 됐다.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고, 남북경제시찰단이 상호 방문하면서 경제협력 방안을 활발하게 모색하고 있는 게 현재의 남과 북이다. 하지만 아직도 남북한 사이에 불신은 남아있고, 보이지 않는 고도의 신경전과 정보전쟁은 치열하다.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들과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속에서 오히려 더욱 복잡해졌다. 청와대 습격을 위해 남파됐다가 미수에 그친 채 북으로 도주한 무장공비가 30여년 만에 다시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을 방문했다가 되돌아갔다는 김씨의 주장에 왠지 모를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런 남북간의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국정원이나 기무사 등 국내 대북 정보기관은 1·21사건의 유일한 도주자가 누구인지, 당시 실무책임자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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