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역 천주교 관련 역사 탐방코스 답사 -일부표석 옮김

2012. 3. 21. 오후 10:43:14

글자
서울지역 천주교 관련 역사 탐방코스 답사 - 일부 표석 옮김
일시 : 2012  03  19

참가 : 분과장 김영숙(리디아)
         1팀장 장인숙(마리안나)
         2팀장 박금희(요셉피나)
         3팀장 이영애(테레사)
         4팀장 황영임(리디아)
          팀원 김종음(세레나)
                 최영이(도미틸라)
                 전미란 (레지나) 
                 강명수(리드비나)
                 강 아네스
                 장명렬(젬마 갈가니) 
                 정정순(글라라) 
                 최두호(경환 프란치스코)



1. 영희전 터 표석




가) 위치 : 중부경찰서 교통조사계 정문 앞

나) 영희전은 원래 세조 때 의숙공주의 집으로
1610년(광해군 2)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의 사당이 되어 남별전(南別殿)이라 하였다.

1619년에는 태조와 세조의 영정을 이곳에 봉안하였으며,
1637년(인조 15) 중수하여 세조와 원종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688년(숙종 14)에는 숙종의 영정을, 정조 때에는 영조의 영정을 함께 봉안하였다.
1899년 10월 22일에는 불타버린 경모궁(현재 서울 의대 자리)의 옛 터에
남부 훈도방(현재 중부경찰서 자리)에 있던 영희전을 옮겨 건립할 것을 결정하고,
영건도감과 영정모사도감을 합설하였다.

다)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1886년 체결된 한불조약이
이듬해 비준을 거쳐 효력을 발생하자 명동대성당 건립 공사를 본격화했다.
그러자 외무독판(外務督辦) 조병직(趙秉稷)이  이를 제지해 제1차「부지 소유권 분쟁」이 발생했다.

1888년 조병직은 성당 부지가 국유지임을 주장하며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의 수호신을 어지럽히는 일이므로 불법이라고 방해했다.
분쟁은 2년을 끌다거 플랑시 프랑스 공사 중재로 성담 대지 문건이 교회측으로 되돌아옴으로써 끝났다.

2. 장악원 터 표석



가) 위치 : 을지로1가 외환은행본점 앞

나) 장악원은 조선 시대,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각종 제사와 의례에서의 음악과 음악 교육, 악공(樂工)의 관리 등을 담당했다.
전악서(典樂署)를 고친 이름이다.

다) 김범우 토마스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중의 하나


3. 한국 천주교회 창립터 기념 표석



가) 위치 : 서울 청계천로 105 건물 앞 도로변

나) 1784년 겨울 첫 세례식이 베풀어짐으로써 한국천주교회 시작 장소가 된 서울 수표교 이벽(요한 세례자)의 집 인근에 기념표석이 8월 28일 세워졌다. 그해 베이징에서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베드로)이 친구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요한 사도) 등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첫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다.

서울시는 이를 기념해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의 신청을 받아 당시 이벽의 집이 서울 수표교,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152번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기록에 근거해 그 근처에 기념표석을 건립했다. 표석은 현재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105 건물 앞 현 삼일교와 수표교 사이 청계천변 인도에 세워져 있다.

이벽의 집은 수표교 남쪽, 현 기념표석 청계천 건너편으로 추정되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곳에 설치했다.

표석은 가로 98㎝, 세로 75㎝, 높이 20㎝ 기단석에 가로 75㎝, 세로 75㎝, 높이 76㎝의 화강석 빗돌을 올리고 오석을 붙여 한국천주교 창립 터라는 사실을 밝혀놓았다. 표석에는 "1784년(정조 8년) 겨울, 수표교 부근 이벽(1754~1785)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식이 거행돼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기념표석 근처에 있는 수표교는 청계천 복원 사업 당시 새로 놓은 다리여서 옛 수표교와는 역사적 관련이 없다. 1441년(세종 23년)에 설치돼 1749년(영조 25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원래의 수표교는 청계천 수위를 재던 다리다.



4. 좌포도청 터 표석 - 표석 옮김




가) 위치 :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 15번 출구 환풍구 옆 도로변에서
              - 종로3가역 9번 출구 옛 단성사 앞으로 옮김

             
2012년 3월 답사 촬영할 때에는  종로3가역 15번 출구 쪽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2013년 1월 28일 현재 종로3가역 9번 출구 옛 단성사 앞으로 옮겨져 있음

나) 새로 옮겨진 곳의 주변 모습은
     종로3가역 9번 출구 옆에 '좌포도청터 표석'과   '동학교 제2세 교조 최시형 순교터 표석' 이 함께 있고
     또한 '파출소 치안센터' 가 자리잡고 있어 '좌포도청터'와  역사적, 상징적' 관련이 연상된다.

다) 일반 범죄의 수사 이외에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면 천주교인의 체포, 수사도 담당하였다.
     양 포도청에서 범죄의 전례(前例)를 기록해 놓은 ≪좌포청등록≫(左捕廳謄錄)과

    ≪우포청등록≫(右捕廳謄錄)에는 일반 범죄에 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어 사료로서 이용된다.
       포도청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좌 · 우 포도청이 하나로 통합되어 경무청(警務廳)으로 되었다.



5. 우포도청 터 표석 (옮김) - 위치 : 종로1가 동아일보 본사 앞에서

                                                               혜정교(교보문고 방향) 남쪽  

                                                               광화문 우체국 정문 앞 화단으로 옮김




6. 경기감영 터 안내판



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164
나) 경기감영은 태조 2년(1393년)에 설치되었으며 속칭 포정사(布政司)로 부르기도 하였다
다) 하느님의 종 조용삼 베드로가 옥중에서 세례 받고 신자들을 감동시킨 순교 터

7. 서소문 밖 네거리 성지




가) 위치 : 서울시 중구 의주로 2가 16-7(서소문 공원 내)
나) 국내 최대의 성지 44위 성인 탄생 - 하느님의 종 27위

8) 칠패시장 터 표석






가) 위치 : 서울 중구 봉래동1가 48-3

나) 칠패는 지금의 봉래동 일대로 지명이 아니라 군사들의 순찰구역 이름이었다.
즉 조선정부는 도적, 방화, 변란을 막기 위하여 조선 후기 현종 11년(1670)부터
5군영의 군인들로 하여금 3일에 한 번씩 교대로 한성부 도성 내외를 순찰하게 하였는데
각 군영은 8패(牌), 즉 8조로 나누어 해당 구역을 순찰하였다.

또한 시전(市廛)과 마찬가지로 미곡, 포목, 어물 등을 각종 물품이 매매되었는데
그중에서 어물전이 규모가 가장 크고 활발하였다


다) 성안에서 칠패시장(현재 남대문시장)에 이르는 길에 우마차 위에 십자가 형틀을 세우고
순교자들을 결박하여 군중들에게 시위하였고
서소문 밖 네거리 이교(흙다리) 남쪽 백사장에서 순교자들을 처형하였다.

9. 새남터 표석  

   위치 : 새남터 성당에서 대각선으로 건너편 고가도로 시작부근



                      



10. 엥베르 주교. 모방신부, 샤스땅 신부 현양비



가) 위치 : 서울 마포구 백범로 35(신수동) 서강대학교 정문 가브리엘관 앞

나) 노고산은 천주교 박해 때 여러 처형장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사적지입니다. 기해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박 바오로에 의해 노고산에 4년 동안 매장되었던 세분 성직자를 기리기 위해 2009년 6월 15일 정문에서 가까운 가브리엘관 앞 소나무밭에 .세 성인의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1.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 표석




가) 위치 : 여의도공원 - 세종대왕 동상 - 왼쪽 약 50미터 위 언덕

나) 2009년 9월 19일 표석 설치
정면에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 이 땅에 빛을! -한국의 103위 순교자를 성인 반열에 올리노니,
세계교회가 공경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사목 방문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께서
1984년 5월 6일에 이곳에서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성인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세웁니다’라고 적혀 있다.

12. 양화진 나루터 표석, 안내판
   
    위치 : 절두산 성지 성모동굴 좌측 계단 아래



                      



13. 광희문




가) 위치 : 서울시 중구 광희동 2가 106 (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 3번 출구 길 건너편 )

나) 광희문(光熙門)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 중에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이다.
서울 성곽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졌으며 1711년에 개축하였다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었다.
본래 수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해 내던 곳으로
송장 혹은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리었다.

다) 안양 수리산 성지의 주인공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아버지)은
안양에서 온 가족이 한양으로 끌려 와 옥중에서 매맞아 순교한 뒤에 이곳 광희문 밖에
그 시신이 내다 버려졌고, 성인의 형님이 시신을 수습하여 수리산에 안장하였습니다.


14. 형조 터 안내판




가) 위치 : 세종로,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7번출구에서 약 50미터 전방

나) 형조는 조선시대 중앙행정기관인 육조(六曹)의 하나로.
법률(法律) · 소송(訴訟) · 형벌(刑罰) · 노예 등에 관한 일을 담당했고, 일명 추조(秋曹)라 불렸다.
조선개국과 함께 설치되어 초기에는 그 권한이 미약했으나
1405년(太宗 5년) 관제개혁을 통해 정2품(正二品)의 관청으로 승격되면서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관원으로 우두머리인 정2품의 판서(判書)와 그 아래에 참판(參判) ·참의(參義) ·
정랑(正郞) · 좌랑(佐郞) · 율학(律學) · 교수(敎授) · 겸교수(兼敎授) · 별제(別提) · 명률(明律)
심률(審律) · 율학훈도(律學訓導) · 검률(檢律) 등이 있었다.

또 형조의 예하조직으로 중죄(重罪)에 대한 복심(覆審)을 담당한 상복사(詳覆司),
법령의 조사를 담당한 고율사(考律司), 감옥과 범죄수사를 담당한 장금사(掌禁司),
노예와 포로에 대한 일을 담당한 장예사(掌隸司) 등 4사(四司)가 있었고,
이외에 율학청(律學廳), 죄수의 행형(行刑)을 담당한 전옥서(典獄署),
일반범죄를 수사하던 좌 · 우 양 포도청(捕盜廳) 등을 관할하였다.
형조에서의 범죄수사는 포도청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수사를 하고,
재판은 포도청에서도 넘어온 범죄와 자체에서 수사한 범죄를 함께 다루었다.

다) 박해 때 체포된 대부분의 천주교인들은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고,
일부 지도급 천주교인과 선교사들은 이곳을 거쳐 의금부(義禁府)에서 신문과 재판을 받았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형조는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개칭되었다.


15) 의금부 터 표석 




가) 위치 : 서울 종로구 공평동 (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출구 舊제일은행-現스탠다드 차타드 은행  화단내)

나) 의금부는 조선시대 임금의 특지(特旨)를 받아 중죄인을 다스리던 관청. 줄여서 금부(禁府)라고 하며, 왕부(王府) 또는 금오(金吾)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라는 명칭으로 설치된 후 순위부(巡衛府),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 등의 명칭을 거쳐 1414년(太宗 14년) ‘의금부’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고 연산군(燕山君) 때 잠시 밀위청(密威廳)으로 개칭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환원되었다. 의금부의 관원으로는 우두머리인 종1품(從一品)의 판사(判事) 외에 정2품(正二品)의 지사(知事), 종2품(從二品)의 동지사(同知事), 종4품(從四品)의 경력(經歷), 종6품(從六品)의 도사(都事), 나장(羅將) 등이 있었다. 직무로는 왕족의 범죄, 국사범, 반역모반죄 등의 중죄와 사헌부(司憲府)에서 논핵(論劾)한 특수범죄 및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범한 죄 등으로 다스렸다.

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지도급 천주교인을 국사범, 반역모반 죄인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의금부에서 추국(推鞫)을 받은 천주교인으로는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의 이승훈(李承薰) · 이가환(李家煥) · 이기양(李基讓) · 강이천(姜彛天) · 황사영(黃嗣永) 등과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의 유진길(劉進吉) · 정하상(丁夏祥) · 조신철(趙信喆) 및 앵베르 주교(Imbert, 范世亨) · 모방(Maubant, 羅) 신부 · 샤스탕(Chastan, 鄭) 신부 그리고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의 남종삼(南鍾三) · 홍봉주(洪鳳周) 등이 있는데, 의금부에서 추국한 것을 기록해 놓은 추국안(推鞫案)에는 이들에 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의금부는 의금사(義禁司)로 개칭되었다



16) 전옥서 터 표석



가) 위치 : 1호선 종각역 6번출구 도로쪽 화단

나) 전옥서는 형조의 지휘를 받아 죄수를 관장하는 곳으로 오늘의 교도소와 같으며,
그 상부기관인 형조는 매월 월령낭관을 교대로 파견하여
날마다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를 검찰하였다.

댓글 4

  • 2012년 3월 22일 오후 8:07

    수고믾으셨습니다.감사합니다.

  • 2012년 3월 23일 오전 12:55

    이름강녜스로바꿔주세요,수고만땅입니다

  • 2012년 3월 23일 오후 2:13

    잘보고 나갑니다. 감사합니다

  • 2012년 3월 26일 오전 11:00

    자세하게 올려주셨네요.수고 많이 하셨어요.

봉사자 자료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