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1881년 신사척사윤음

2014. 7. 15. 오후 1:03:09

글자

고종은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을 시찰하도록 하기 위해 1880년 · 1881년 2차에 걸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였고, 청으로는 병기제조와 군사훈련 학습을 할 청년들을 파견키로 결정한 후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였다. 1880년 제1차 신사유람단원으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가져온 청국의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은 청국의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외교적 의도를 담은 책으로 청국과는 친하고 일본 · 미국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많은 유생들이 천주교와 <사의조선책략>을 배척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경상도 유생 이만손(李晩孫) 등은 만인소를 올려 `신사척사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척사상소를 중지시키기 위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발표하였고, 1882년 8월에는 2차에 걸친 양요로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시 싸우지 않고 화의를 맺음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전국에 세워졌던 척화비를 모두 철거케 하며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진행을 멈추지 않았다.

윤음언해(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등척사윤음)
고종 / 1881(고종18) / 활자본 / 1권 1책 /경북대
1881년(고종 18)의 이른바 신사척사론(辛巳斥邪論)에 대한 회유책으로 내린 윤음이다. 한문 원문 3장, 언해 4장으로 다른 윤음에 비해서도 적은 분량이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 개화파들에 의한 개화의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졌는데 이런 추세에 대항하여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유림들이 결집하게 되었다. 특히 개화파의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들여와 전국 유생에게 배포하고 정부가 개화의사를 표명한 것에 대하여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비롯한 유생들의 척사 상소가 잇따르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에 대하여 상소의 주모자들을 잡아들이는 억압책을 쓰는 한편, 1881년 5월에는 이 윤음을 반포하여 전통적인 척사의 태도를 표명하는 회유책도 같이 사용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이 성리학을 받들고 숭상하여 왔는데 불행히 천주학이 서양으로부터 흘러들어와 조선을 어지럽히므로 정조 때 이후로 그 근본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때마다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므로 오랜 근심이 되어 왔다. 이제 또 저들이 경동하여 백성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니 그 무리들을 모두 없애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병을 고치는 데 원기를 보하는 것이 가장 낫듯이 저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유학(儒學)을 더 갈고 닦아 공맹(孔孟)의 도를 더 잘 받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는 이전 시기의 척사윤음과는 달리 천주교를 몰아내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사가 반영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이 윤음의 반포 배경이 척사파를 회유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던 것에 기인한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