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황사영 백서

2014. 6. 25. 오전 10:42:45

글자

● 특별기고

여진천 신부님의 譯註書 ‘누가 저희를 위로해 주시겠습니까? ’를 基礎로 풀이한 學習記

임성빈(요한 크리소스토모)
본당 : 수원교구 용인 보라동 성당
한국순교복자수녀회 한국순교자영성센터 면형강학회 회원
미리내성지 안내 자원봉사자


가. 배론 성지의 황사영 백서 토굴에서

년초인 1월3일, 진눈개비가 흩날리던 날 오후에 저는 충북 제천의 배론 성지를 찾아 갔었습니다. 그 날 산기슭 작은 언덕에 있는 최양업 신부님 묘소를 참배 하고 하산 하면서 경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황사영 순교자가 백서를 작성하셨다고 전해지는 토굴 안에 들어가 이미 어둠이 내려 컴컴해진 좁은 굴에서 얼마간을 홀로 머물러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옛날 배론 신학당에 대한 생각이라든지, 프르티에(Pourthie')교장 선생님, 프티니콜라(Petitnicolas)신부님, 장주기 요셉, 최양업 신부 시신을 문경에서 운구하여 장례미사를 집전해 주셨던 베르뇌 주교님, 그리고 그분들이 죽어간 갈매못 성지에 대하여도 많은 생각에 잠겼었습니다.

특히, 어둡고 침침한 두 평 土窟 안에 여덟 달을 기거 하면서 13,384 뜻글자를 한 點 한 字 혼신 다해 帛紗(백사)에 심어 나간 弱冠 황사영 알렉시오의 고뇌와 熱情을, 자신이 認識했던 동서양 세계의 흐름과 열강 勢力編成의 논리 속 그 範疇 안에서 자신이 내다 볼 수 있었던 限界의 끝자락 까지를 다가서 보고, 마침내, 다 함께 自由 信仰人이 되어 사는 하느님 나라 새 世上이 오기만을 애타게 素望하며 외길로 라도 그 날을 爲해 갈구하고 行動 할 수 밖에 없었던 외로운 天涯知性의 그 절절한 목마름을, 誰爲慰我 (수위위아) ‘누가 저희를 위로해 주시겠습니까? ’ 라고 울부짖으며 주님의 現存을 찾아 끝없이 외치면서도 주님께 向한 지극한 신뢰와 순명에는 꿈에도 흔들림이 없었던 그래서 하느님과 이웃을 진정 사랑한 淨潔한 그 영혼 천 만길 명주실로 처연한 삶을 이어 繡 놓아 맺혀진 진홍 빛 순교의 結晶에, 결정 위에 서리어 도는 푸른 氣像에 나는 몸을 사리고, 순교자에 대한 敬畏心으로 나를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자신 부끄럽고 이상해지는 것은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어디선가 그분이 저를 불쌍히 여기고 계실 텐데, 왜 자꾸만 내가 그분을 불쌍하다! 불쌍하다! 생각하게 되는 것인지요?

나. 송추의 황사영 묘지에서

혼자 배론 성지를 다녀온 그 다음 날 오후 세 시경, 저는 송추에 있다는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소를 간단한 마음으로 찾아 나섰습니다. 차를 운전하면서 의정부 시내를 경유 송추역 부근에 왔을 때, 이미 시간이 오후 네 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작가 한수산님의 성지순례기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다’ 와 원주교구 배론성지에서 펴낸 성지순례 안내서 ‘한국 초기 천주교회의 여정’에서 안내해주는 대로 송추역을 지나 사거리에서 우측 백석방향으로 2.6Km 진행하다가 길 우측으로 민속가든 집 옆 공터 밭 너머로 보이는 황사영 묘역을 찾았건만 날은 저물어 가고, 장흥 유원지와 송추역 사이 6Km구간을 두 번이나 왕복하면서도 허탕을 치다보니 배도 고프고 주위도 캄캄하여져 난감하였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민속가든 간판이나 황사영 묘지 표지 안내판을 발견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차! 내가 너무 쉽게 생각을 했었구나.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자. 그렇다면 이곳까지 온 김에 아예 백석으로 넘어가서 서울로 들어가자고 생각하고 송추에서 백석으로 넘는 고갯마루를 향했습니다. 그리곤 얼마만큼 백석을 향해 운행해 가던 중, 길 가 안내 표지판을 따라 문득 백석 성당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담한 규모의 가건물로 신축된 성당이었는데, 이 먼~ 곳 백석본당에서 면형강학회원 세 분 형제자매님이 서울 청파동을 오가면서 순교자 영성을 따르며 강학에 참여하고 있다 생각하니 그 분들이 존경스럽고 백석본당도 한결 낯설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이미 저녁미사가 시작되어 신자들의 독서가 봉독되고 있었지요.

겨울 날씨, 추위와 허기에 묘소도 찾지를 못하고 무척 상심해 있던 제 마음을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밤길 고속주행 중에서도 백석천주교회 안내 표지판을 읽게 하시어서 주님의 성체로 제게 저녁양식을 베풀어 주시니, 제 언 몸과 마음까지 녹여 주시는구나 생각이 들자 한결 따듯해졌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형제자매님들이 본당을 찾아온 외지인을 반갑게 맞아 주었고, 황사영 묘지의 정확한 위치도 알아 낼 수 있었습니다.

묘역은 의정부2동 본당 관할인데, 백석본당의 총회장님과 레지오 형제자매님들이 작년 답사 초행길에서, 길잡이가 되어야 할 작은 묘지안내판이 도로에서 볼 수 없게 돌려져 있어서 그곳을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한참을 찾아 헤매었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저는 백석본당 교우들이 알려준 황사영 순교자 묘지 부근에서 부곡골 쉼터를 운영한다는 김중근 스테파노 형제님의 연락처가 적힌 메모지를 간직하고 경기 용인의 제 집으로 늦은 귀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송추 묘역답사에 헛걸음 하고 돌아 온지 보름 쯤 지난 1월21일 금요일에, 저희 부부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수녀님과 함께 송추에 있는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년 말부터 제게 갑자기 몰아닥친 제 개인적인 일로 저희 부부 함께 심한 몸살이를 앓고 있었는데, 이 아픈 진통 속에서 저는 미리내 성지, 남한산성 동문성지, 하남의 구산성지, 진천 배티 성지와 제천의 배론성지, 남상교 순교자, 남종삼 성인의 묘재유택, 용소막 성당등지를 찾으면서 제 교만함에 용서를 빌고, 고난의 길, 앞서가신 거룩한 순명의 길을 묵상해 가면서 평화를 주십사! 주님과의 끈을 잡고 순례 여정을 가고 있었습니다.

제 지독한 몸살아리를 알게 되신 수녀님께서는 당신의 바쁜 일정을 쪼개어 정 다산의 묘지와 여유당, 황사영 묘지 답사를 제게 권유 하셨고 그것은 우리 부부를 위로해 주시고, 저희 아픔을 신앙선조들과 함께 동반하게 하시며, 순교자님들의 공로를 통해서 주님과 성모님께 저희 사정을 간절히 기구해 주시려는 수녀님의 따듯한 가르침이며 배려이셨던 것입니다.

<황사영 묘역에 세워진 비문에 대하여 >

비문 전면에는
昌原黃公 알렉산델 嗣永의 墓 1988년 10월29일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가 지어 세움. 방손 晳捧敬書 (방손 석봉경서) 註 : 공의 먼 후손이 삼가 바르게 받들어 글을 써 올립니다.

비문 후면에는
殉敎者 黃嗣永 追慕碑 “영조 51 년인 을미년(1775 ) 강화 땅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덕소 본관은 창원으로 부친 황석범의 유복자로 어머니는 평강이씨 윤혜 이시다. 외가친척인 이승훈의 권면으로 17 세에 영세입교 ( 1791 년 ) 하였고, 1795 년 주문모 신부를 도와 ...... 하다가, 신유년 ( 1801 ) 11 월 5 일 27 세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가 묻힌 곳마저 찾지 못하여 안타까이 여겨 오던 중, 후손들과 연구자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1980 년 3 월에 그의 11 대 선조인 한성판윤공 황침 ( 黃琛 ) 의 묘소 아래 이곳에서 그의 묘소를 발견하여 확인함에 이르렀다. 이에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그의 거룩한 생애와 장한 순교정신을 기리고자 후손의 도움을 얻어 이곳에 추모비를 세워 그의 사적을 밝히는 바이다.“ 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추모비가 세워진 1988년도에는 아직 황사영 인물에 대한 사료 검증과 연구에 많은 부분이 미진해 있었기에, 비문 중 몇 가지 잘못된 기록이 있어서 이를 정정해 보았습니다.

배은하 신부님의 배론성지 사적 연구서 <역사의 땅, 배움의 땅 배론>, 여진천 신부님의 <황사영백서 역주서>와 <황사영백서 논문선집>, 정두희 교수님의 <신앙의 역사를 찾아서>,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신유박해 순교자 전기집>, 원주교구 배론성지 간행본 <한국초기 천주교회의 여정>, 작가 한수산님의 성지순례기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다>, 그리고 역사학자 유홍렬님의 <한국천주교회사>,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참고로 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황사영은 1775년(乙未) 부친 황석범(1747-1775) 모친 이윤혜 사이에서 유복자로 서울 서부 아현방(西部 阿峴坊)에서 태어났는데, 사영이 출생하던 해에 부친이 사망하였고, 어린 사영이 여덟 살이 되기까지 공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지냈던 증조부 황준(黃晙 1694-1782)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황사영이 참수되고 그의 집이 파가저택이 되어 노비가 국가에 몰수 될 때에, 관노로 유배된 남녀종이 여섯 명이나 되었으니 판서직을 역임했던 증조부 생존 시, 소년 황사영의 아현방 황판서 대감댁 가세를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여진천 신부님의 <황사영백서 역주서>와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신유박해 순교자 전기집>에는 황사영의 출생에 대해 상세한 기록이 있어 이를 소개합니다.

여진천 신부님은 역주서에서 <종전까지 황사영의 고향이 경기도 강화읍 월곶리 대묘동으로 잘못 알려져 왔었으나 최근 그의 출생지가 서울 서부 아현 이라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하성래, ‘황사영의 주요 활동과 순교에 대한 연구’, ‘교회사 연구’ 1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간행, 1998, P80: 이기경의 ’벽위편‘, P 520: "禁府罪人嗣永 年二十七세 ... 父母以胎生於西部阿峴 隨父母長養“ (금부죄인사영 년이십칠세 ... 부모이태생어서부아현 수부모장양 )이라는 기록을 찾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사영은 이명이 황시복(黃時福)으로 자가 덕소(德紹), 호는 비원(斐園)이며 본관은 창원(昌原)으로 판윤공파(判尹公派) 17대 손인데, 세조 때 장무공(莊武公) 황형(黃衡)이 공조판서를 역임 하였고 이때부터 가문이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남인계열의 명문 집안이었습니다.

증조부 생존당시, 조부 황재정은 24세에 아들이 없이 요절하여 4촌 형제의 장남 석범을 양자로 들이니, 양자로 들어온 부친 황석범은 25세인 1771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丁字)와 한림(翰林)을 역임 하였으나 사영을 유복자로 남기고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또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李允惠)는 이승훈의 일가인 평창이씨 진사 이동운과, 시문과 해서 초서의 대가인 공재 윤두서의 증손녀 해남윤씨 부인의 따님이었습니다. 사영은 열여섯 살이 되던 1790년(정조14) 9월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이에 정조는 어린 사영을 불러 치하한 후 손수 손목을 잡으면서 “ 네 나이 20세가 되거든 짐을 찾아오너라. 짐이 어찌 하여서던지 너를 꼭 등용하고 싶다 .“ 고 하여 황사영의 출세를 정조임금이 보장 하였다 합니다.

그 해 그는 다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정명련과 결혼을 하였는데, 정명련의 생모는 광암 이벽의 친 누님이며, 다산이 어려서 생모를 잃자 어린 다산의 성장을 돌보아준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벽은 황사영의 처외삼촌이 되며, 정약전, 약종, 약종 형제는 황사영의 처삼촌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결혼한 해인 1790년 천주교에 입교 하였고, 세례명은 알렉시오(Alexius) 입니다.

여진천 신부님의 <백서 역주서>에 의하면 <邪學罪人 嗣永等 推案, 1801年 10月10日, 황사영 공초 : 亦矣身爲洋學者爲十一年 始學之翌年朝家禁令至嚴?( 역의신위양학자위십일년 시학지익년조가금령지엄 ) 자신이 입교한 이듬해에 나라의 금령이 지엄 했었다.>
나라의 금령은 1791년 그 유명했던 진산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볼 때에 황사영의 입교를 1790년으로 볼 수 있다고 신부님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황사영의 세례명이 종전까지 알렉산델(Alexandel)로 알려져 왔었는데 그리된 데에는 다불뤼 주교(비망기)와 달레 신부(천주교회사)가 세례명을 잘못 표기했기 때문이며,

가. ‘邪學징의’의 기록내용
나. 1811년 조선 교우들이 북경주교에게 보낸 서한인 ‘신미년 서한’의 기록내용
다. 1845년 작성된 김대건 신부님의 보고서인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의 기록내용 / 가톨릭대학, 1988년 간행 ‘신학과 사상’ 164?p에서 ?이영춘: 초기 한국천주교회사 사료에 관한 고찰? 등의 근거에 의하여 세례명이 알렉시오(Alexius)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에, 황사영은 1775년(乙未) 부친 황석범(1747-1775) 모친 이윤혜 사이에서 유복자로 서울 서부 아현방(西部 阿峴坊)에서 태어났는데, 16세이던 1790년(정조14) 9월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그 해 다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정명련과 결혼하여 처가 쪽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 하였다고 정리됩니다.

세례명은 알렉시오(Alexius)이며, 영세년도는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교우 최인길의 집에서 주 신부님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정리됩니다.
<영세 년도에 관한 기록 참조 : 한국교회사연구소 ‘신유박해 순교자 전기집-순교는?믿음의 씨앗이 되고’ P103 >

당시 남인계 선비 중에 눌암 이재기(李在璣)가 있어서 눌암기략(訥菴記略)으로 전하기를 ‘ 황사영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가 되었는데 글과 글씨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와 명성과 명예가 매우 무성하였다 ’고 하였으니, 황사영은 당시 서울 장안에 화제의 인물로 회자 되었던 모양 입니다. 사영이 천주학에 입문하여 과거공부를 포기하였다는 소식에 이를 애석히 여긴 눌암은 사영의 숙부 황석필을 만나 사영이 천주교 공부를 못하도록 말리라고 권유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수녀님과 송추의 황사영 순교자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오면서 황사영. 이분을 위해 무엇인가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우선 여진천 신부님의 역작 황사영 백서 역주서를 기본 텍스트로 하여 13,384 뜻글자를 풀면서 그분의 일생과 영성, 초기 교난사를 학습해 나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한학에 전혀 문외한인 제게는 상당히 무리한 계획이 되겠지마는, 순교 선조님들의 도움이 계시고 또 성령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니 일단은 30개월 기간 내에 일차학습을 이뤄 본다는 학습목표를 설정 했습니다. 마침 사순시기여서 이 작은 결심을 하느님께 봉헌 드리고 나니 제 마음도 한결 평온하였습니다.

황사영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서소문에서 순교하기까지 그의 신앙생활과 그의 영성, 가족哀史, 그 시대 박해의 환란 중에 아픔을 같이 하던 교우들의 신앙이야기, 황사영이 백서를 쓰게 된 동기와 백서의 내용, 백서사건에 대한 역사적 의미 등은 여 신부님의 역주서 <누가 저희를 위로해 주시겠습니까?> 의 백서 122행을 따라 한 행 한 행을 열어 학습해 가면서 각 행마다 뜻풀이와 ?想記錄를 함께 남기며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장차, 제 학습의 진도가 얼마만큼 있고, 또 몇몇 분들의 호응이 있게 된다면, 황사영 알렉시오를 사랑하는 모임도 만들고, 본 학습기가 그분들이 <황사영을 기리며 읽을 수 있는 학습 묵상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소박한 꿈도 가져 봅니다.

다. 추자도의 아들 경환이 제주도 모슬포에 계시는 정난주 마리아 어머님께 올리는 전상서

오는 4,5월 중에 추자도를 답사하여, 정명련 어머니가 제주도 대정현으로 가는 노비 유배길 뱃머리에서 두 살배기 핏덩이를 내려놓고 떠났던 애환의 바닷가 바위기슭을 찾아보고, 또 그 아들이 어미 그리며 살다 죽어 묻힌 황경환의 묘지도 돌아본 후, 묘지에 누워있는 자식 경환이 제주도에서 승천하신 어머니께 올리는 글을 시간을 거슬러 대필하여 띄워 보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後記> 미완

라. 황사영 백서 사건에 대한 구세대들의 역사인식

제가 황사영이란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된 때는 고교시절 국사 시간에서였습니다. 그 시절 저는 한국사에 무척 매력을 느끼고 대학 진학목표도 부모님 몰래 사학과를 지망하려고 내심 준비하던 참이었지요.

당시 국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은 제게는 우상이셨고, 또 젊은 저를 사로잡기에 충분한 고상하고 신념에 찬 사관과 정열을 가지신 분이었는데, 예를 들면 평안호태광개토대왕, 충무공 이순신, 단재 신채호 등을 말할 때면 아예 교과서는 교탁에 덮어두고서 정연하고도 우렁찬 강의가 쉼 없이 뿜어져 나왔고, ‘삼국통일을 신라가 이룬데 대한 의의를 논하라’ 라는 식의 주관식 문제들을 기말고사에 출제하여 학생들로부터 엄청 비난을 받기도 하셨지만, 저의 답안은 자주 괴짜 국사 선생님의 칭찬을 받곤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우리들 수준을 뛰어 넘는 좀 앞서 가셨던 선생님이셨으나 아무튼 우리는 고교 삼년동안 내내 대학 강의로도 손색이 없을 수준급의 명 강의를 받았던 셈입니다. 그런 선생님이 조선조 후기 황사영의 백서를 치욕의 매국시도사건으로 난도질 쳐댔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동란이후 내셔널리즘-민족,국가 우선주의 자주의식이 강렬하였던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백서사건은 무엇을 모르는 한 젊은 선비가 저질러 우리역사에 작은 오점을 남겨놓은 부끄러운 해프닝 정도로 풀이되었었습니다.

지금 되돌아 생각해 보니 일제식민사관으로 공부한 광복초기의 한국사분야 석학들이, 일본국이 아닌 중국과 서양佛國(프랑스 외방선교회 본부), 로마 교황에게 외세 구원을 요청한 황사영 백서사건을, 일본학자들이 접근한 질시의 斜視史觀 일변도로 받아들여 다루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청소년기의 제게도 황사영 인물 평가는 그런 배경으로 굳어지고 잠재된 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황사영백서는 제게서 잊혀져갔습니다. 저와 같은 年輩에 20년을 전후 하여 그러니까 현재 나이 40세 정도의 년령층 윗선 까지는 그렇게 한국사를 공부하였고, 그 시절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황사영 백서관은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1970년 제가 직장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1974년도 견진성사를 받은 후 다음해 쯤, 제 영세신부님인 청주교구 김광혁 베드로 신부님이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님께 다녀오시면서 작은 수첩크기의 소책자 한권을 제게 선물로 주셨는데, 그 책이 베이지색 장정의 '정음사 단행본' <황사영 백서外>集 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부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의무감으로 읽어는 봤지만 뒷맛은 땡감을 먹은 듯 그저 그런 느낌이었고,?‘신부님은 뭐 대단하다고 하시면서 이런 책을 내게 필독서로 주셨나? ’ 하는 시큰둥한 마음 뿐 이었지요. 그리고 그 소책자는 1990년대 초 까지는 용케도 제 책장에 꽂혀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제 서재에서 사라져 이제는 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순교복자회 면형강학회원이 되어 조선 순교사 근저를 접하기 전까지의 황사영 백서와 저와의 인연이요, 제게 부정적으로만 각인 되었던 황사영觀 이었습니다. 이런 사관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한, 황사영은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 새로운 역사인식의 눈으로 보는 조선왕조의 對 실학정책
정조에서 고종 代에 이르기까지의 부패 무능한 왕정과 패망을 초래한 근시안적인 당파, 세도, 쇄국정치 下 에서의 주자학

조선천주교회사를 공부하다가 한국사를 들여다보니 우리 민족이 오랜 궁핍에서 벗어나 이제는 민족자존의 기반을 잡아가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제 살아온 다소간의 연륜이라는 것이 있어서인지, 역사를 보는 마음의 눈이 자못 새롭고, 전보다는 조금은 편안해짐을 느끼게 합니다.

주자학, 실학에 관련된 글과 천주교회사를 독서하는 중에 1500년대 왜란과 1600년대 정묘.병자호란을 거치면서 1700년대를 맞이한 조선왕조가 영.정,순조 대를 거치면서 왜 실학을 국가경영시스템에 적극 수용하지 못했을까? 晩學徒가 되어서 새로운 역사인식의 눈으로 조심히 살펴보게 됩니다.

물론 실학, 서양학문을 공부하다가 천주학을 접하게 되었고, 천주학을 강학하기에 이르러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나 실학이라고 모두 천주학이 아닌 것을 압니다.

치욕의 왜란, 호란의 뼈아픈 亂中敎訓을 망각해 버리고 小貪大失의 愚에 빠진 조선왕조의 근시안적 先進實學運用에 대한 수용거부정책은, 변질된 성리학의 폐악에 익숙해있던 조선왕조의 몰락을 자초한 요인이 되었으며, 근세사 세계선진대열에서 한민족이 영 영 낙오되고 마는 역사적 과오를 초래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조 엘리트들의 실학, 서학 연구는 평등과 박애라는 보편적 가치에 바탕을 둔 과학화 근대화 세계화로 가기위한 혁신운동 이었으며, 필연적으로 문호개방허용문제를 수반한 운동이었기에, 조선조 군왕 또는 시대의 실권세력 중 누군가가, 그 수용의 기회를 과감하고 혁신적으로 정확히 포착했어야만 했습니다.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사문화 될 수밖에 없었던 조선후기의 시대는 구한말의 명성황후시해, 동학농민운동, 아관파천 등 암흑기를 예고하였던, 우리민족 역사가 빛을 잃고 죽어가고 있던 참담한 시대였었습니다. 앞서가던 동북아, 서방 열강제국들의 힘 앞에 무릎을 꿇고, 나라를 찬탈 당해 식민지로 전락해버릴 수밖에 없었던 미련한 시대였던 것입니다.

제국들은 과학문명을 경쟁적으로 공유해 가면서 무섭게들 발전해 가고 있는데, 병들고 고루한 주자학에 매달리어 왕조를 지키던 세도가문의 세력들은 실학수용을 외면한 채, 무식하고 어린 강화도령을 붙잡아 위기의 이 나라 상감마마로 옹립해 놓고 손뼉을 치고 있었으니..

조선조 後期史, 천주교회사, 나아가 황사영의 백서를 공부 하려면, 이런 근세 역사의 흐름 안에서 각기의 민족들이 어떻게 시대를 준비하고 흥망성쇄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포괄하여 관조해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봅니다. 바로 그때에 실학파의 선두에 서서 목숨을 걸고 풍찬노숙 하던 이들이, 초기 천주교회의 남인계 신서파 지도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바. 황사영의 백서에는 무엇이 써있는가 ?

여진천 신부님은 역주서‘누가 저희를 위로해 주시겠습니까?’에서 백서의 내용에 대하여 상세하게 요약해 놓으셨기에, 저는 이를 읽기 쉽게 다시 풀어서 옮겨 보았습니다.

122행 각 행별에 수록된 내용 정리입니다.

* 인사말(3,5) * 신유박해 이전 사항들(6)
* 최필공의 배교와 신앙고백(6-8)
* 이중배의 신앙생활과 감옥생활(8-11)
* 권철신 가문의 신앙생활과 양근교난(11-13)
* 정조임금의 주문모 신부 처리와 서학정책(13,14)
* 냉담자 김여삼의 배교와 주문모 신부 밀고(14-17)
* 신서파 공서파 노론 시,벽파 간의 세력대립(17,18)
* 정조의 승하, 순조 즉위와 노론 시파의 축출(18-20)
* 순조 즉위 직후의 상황(20,21)
* 최필공, 최필제,오석충의 체포와 김여삼 무리의 신자 색출(21-24)
* 신유교난의 본격적인 시작과 사건들 /?총회장 최창현 등의 체포와 정약종 책롱사건,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 권철신 정약종 여주,양근 교우들의 압송(24-30)
* 강완숙 가족과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 이중배 등의 죽음(31,32)
* 주요 교회 지도자들의 신앙생활과 사형집행기록 (32-43) (최창현,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 이승훈 베드로의 북경영세, 이벽과의 독서, 배교-회심-참수기록(43-46)
* 이벽-이가환의 교리논쟁, 이가환의 충주 행적과 죽음(46-51)
* 권철신의 죽음, 최필제의 참수(51-54)
* 김건순 요사팟의 입교과정과 죽음(54-60)
* 김백순 이희영 루가의 입교과정 신앙생활과 죽음(60-64)
* 홍필주 빌립보, 강완숙의 입교과정과 주문모신부 보필, 치명기록(64-69)
* 강화도 은언군의 유배와 사약 사, 양재궁 송씨 신씨 부인 입교 및 강완숙과의 신앙생활과 사약 사(69-70)
* 조용삼 베드로의 대세 죽음, 이존창 루도비코의 공주 참형, 전라도 교회의 모습과 배교, 정산,예산에서의 치명, 김제 한정흠과 전주 최여겸의 순교(70-73)
* 서울 옥중에서 죽은 교우 300여명-외교인의 전언, 정부의 서학정책(73-76)
* 주문모 신부의 피신-자수-순교와 상심한 지방교우들에 대한 위로(77-86)
* 주 신부 순교이후의 성사문제 애로와 지도자를 잃은 조선천주교회 소멸 위험과?교회재건에 대한 필요성 이야기 (86-90)
* 주문모 신부의 사목활동, 자수와 심문과정, 순교와 참수당한후의 초자연적 현상(86-90)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위한 다섯 가지 방안의 제시
* 서양 국가들의 조선교회 재정원조(91-97)
* 북경주교와 조선신자 간에 지속적인 비밀접선과 연락방법에 관한 건의 (98-100)
* 청국황제의 조선국왕에 대한 압력계책의 일환으로 교황으로 하여금 청국 황제가 움직이도록 외교적 압력을 청원하는 방안(100,101)
*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내복 감호책 제안 / 조선국을 청국변방의 지역 속국으로 만들어 달라.?? 청국-조선왕실 간의 정략혼인 방안의 건의(103-108)
* 대박청래책의 제안 서양 군함과 군대를 일으켜 조선국 압박용 진주 건의(109-112)
* 박해로 흩어진 교우들의 신자의무에 대한 관면 요청, 황사영 자신 문제에 대한?관면요청과 끝맺음 인사.

1. 백서 서두에서 밝힌 황사영의 심정에 대하여
정두희 교수의 ‘신앙의 역사를 찾아서’에서(P.76)
2. 조선교회를 살리기 위한 대책의 건의
3. 백서의 마지막 부분
* 계획에 대한 취지와 명분 / 정두희의 ‘신앙의 역사를 찾아서’에서(P.85)

사. 황사영의 백서를 어떻게 읽고 새길 것인가 ?

* 교회사-서양사에서 교권수호, 종교자유를 위해 취해진 외세의 요청과 개입 사례 연구 ( 군사, 외교 지원 사례와 국왕, 교황, 성인, 교회 지도자들의 행적조사 )

아. 황사영 백서사건의 재해석 (未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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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9. 1 <순교자 성월> 첫날 미사 중에 발표한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와 증거자 정명련 마리아를 추모함

?황사영은 본관이 창원(昌原)으로 1775년(乙未) 부친 황석범과 모친 이윤혜 사이에서 유복자로 서울 서부 아현방에서 태어났습니다. 황사영이 출생하던 해에 부친이 사망하였고, 어린 사영이 여덟 살이 되기까지 공조판서를 지냈던 증조부 황준(黃晙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편모슬하에서 자라난 소년 황사영은 열여섯 살이 되던 1790년 9월 조정의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이에 정조임금은 어린 사영을 친히 불러 치하하고 상을 내리면서 홍안의 천재 소년이 너무나 대견스러워 손수 손목을 잡으시고 “네 나이 20세가 되거든 나를 찾아오너라. 짐이 어찌 하여서던지 너를 꼭 등용하고 싶다.“ 고 하여 황사영의 출세를 정조임금이 보장 하였다고 합니다. 그 해 그는 다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정명련(일명 난주)과 결혼을 하였는데, 정명련의 생모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중의 한분인 광암 이벽의 친 누님이며, 따라서 이벽은 황사영의 처외삼촌이 되며, 정약종, 약용 형제는 황사영의 처삼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명문 정씨일가의 사위가 된 황사영은 초기교회 영성의 대가인 정약종 아우구스틴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고, 황사영의 지혜와 총명함에 정약종은 그를 장차 조선천주교회의 큰 일꾼으로 만들 마음으로 1790년 천주교에 입교시키게 됩니다.

명문가의 청년선비 황사영, 그는 임군의 특별한 주목을 받게 되고 그를 기다리는 부귀공명, 보장된 벼슬길이 있었으나 이를 끊어 버리고 스스로 진리의 길이자 죽음의 길을 택하여 걷게 된 것입니다.

1795년 조선 땅에 첫 사제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교우 최인길의 집에서 주 신부님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전해지며 세례명은 알렉시오 입니다. 교회신자가 된 황사영은 전교활동에 적극 참여 하였고, 1799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피신시켜서 신자들로 하여금 성사를 받도록 준비하기도 하였습니다.

초기교회 전교단체인 명도회 회장을 정약종이 맡으매, 황사영 또한 스스로 명도회원이 되어서 그 하부조직인 六會의 장소로 자신의 집을 내어 놓았고 시간이 있는 대로 심신서적과 교리를 필사하고 전파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신유박해가 일어났던 1801년 1월 까지 그는 양반계층에서 중인계층, 목수, 짚신장수, 삿갓 만드는 자에 이르기 까지, 신분계층과 빈부를 초월한 폭넓은 교류와 교리전파의 모범을 이루어냈습니다. 가히 그의 아현동 집은 당시에 서울 서부지구의 작은 교회 - 공소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제 1801년 신유년 대 박해 - 교회의 큰 난으로 이어집니다. 총회장 최창현을 비롯 서울 경기지역의 교회 지도급 인사들이 체포 구금되어 문초가 시작되다가, 교난은 충청 호남으로 급속히 확산되며, 이존창 유항검가도 쑥대밭이 되었고 주문모 신부님을 돌보던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 까지 잡히게 되었습니다. 주변의 신자들을 모두 잃은 신부님은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음으로써 조선 교우들의 교난을 그쳐보겠다는 결심으로 의주에서 마음을 돌려 한양으로 다시 돌아와 자신의 몸을 조선교회를 위한 제물로 내놓고 자수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이 땅에 세우고 있던 주 신부님과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한강 새남터에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포도청 감옥에서 이렇게 주님의 부르심에 순명 하여갔습니다.

1801년 2월 중순, 교난을 피해 황사영은 얼굴 수염을 쪽집게로 다 뽑아내고 상복으로 변복한 채 여주 원주를 거쳐 제천땅 교우 김귀동의 배론리 집으로 피신합니다. 제천 배론의 옹기굴을 가장해 만든 토굴 안에서 주신부님과 교회 지도자들의 처참한 순교소식을 전해들은 황사영은 눈물의 편지를 써서 북경의 구베아 주교님께 띄우기로 결심합니다.

초기교회를 세우나갔던 선조들의 교회 창립기와 그간의 전교 이야기들과, 박해를 당해 처참히 죽어가고 유배되어간 순명 순교의 행적과 배교자의 이야기, 무너져버린 조선교회의 실상과 북경교회와의 연락방법 등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아 전국으로 흩어져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산속을 헤매던 조선 땅 교우들을 부디 잊지 말아달라고 절절한 호소를 합니다. 그는 또 이런 교회를 다시 일으키고 이 땅에 신앙의 자유를 하루속히 이루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여 청원하였습니다.

황사영의 이 청원을 해석하고 평가하는데 아직도 학계에선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사관, 내셔널리즘(민족주의), 국수주의적 사관으로만 일관되던 황사영백서의 평가가 실학, 서학에 바탕을 두고 개혁 개방을 주창한 그의 시대관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는 말씀도 드립니다.

어떻든 교회내의 순수 신앙적 견지에서 바라보면, 황사영 그가 1801년 2월 중순부터 그해 9월22일 까지 무려 7개월 동안 긴긴날을 어두운 토굴속 기름등잔 밑에서 한자 한자 심혈을 다해 써내려간 122행 13,384자의 기록은, 북경의 주교님에게 보낸 조선 교우들의 신앙고백서였으며, 로마 교황께 드린 참회록이었으며,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의 눈물어린 소망을 담아 올린 애절한 기도문이었습니다.

그해 10월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 편에 보내려 작성되었던 황사영의 백서는 교우 황심의?취문중에 그의 소재가 노출되어 '사영'이 배론에서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되면서 <백서>도 조정에 압수되고 맙니다.

11월 5일 대역부도죄인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되고 역적의 아현동 황 판서댁은 ‘파가저택’- 허물어 깊은 웅덩이를 만들어 폐가시키고, 그의 가족들은 모두 노비로 전락되어 귀양을 보냈는데 사영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 관가의 노비로, 부인 정명련 마리아와 두 살 난 아들 황경한은 제주도 대정현의 관노로, 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으로, 그 집안의 여섯명 종들까지 뿔뿔이 유배길을 떠나갑니다. 명문 황사영의 가문이 조선 땅에서 이렇게 철저히 멸절되어 사라져 간 것입니다.

정명련, 일명 정난주는 18세 때인 1790년 16세인 황사영과 혼인하고 10년만인 1800년 아들 경한을 나았습니다. 두 살 난 어린 것 가슴에 안고 바다건너 제주도를 향하여 귀양길에 오른 29세의 정명련은 남해 뱃길 어느 섬에 이르러 ‘아들이 평생 역적의 자식, 죄인으로 살아가야 함을 걱정’하여 젖내 나는 어린 것을 바닷가 갯바위에 내려놓고, 몸에 지닌 금품을 빼내어 뱃사공에 주고, 사공들에게는 죽어서 수장했다 하라 합니다.

그곳이 완도에서 제주 가는 길목의 추자도 섬이요, 갯바위에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온 어부 오씨에 의해 키워졌으니 아기의 속옷에 쓰여진 황경한 글자에 의해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하였다 합니다.

어린 경한은 성장한 뒤에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아 그곳에 살다가 오늘은 그곳 하추자도에 묻혀서 어머님 계신 제주도 모슬포 대정성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제주목 관노로 유배된 정명련 마리아는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섬 지방 주민들을 교화시켜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할머니’라 불리우며 이웃들의 칭송과 존경 그 한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1838년 6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자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그의 유해를 대정리에 안장하였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제주교구는 그녀를 ‘신앙의 증인’으로 추모하면서 그의 대정리 묘역을 새로이 단장, 성역화 한 후 현양과 추모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순교자 황사영과 그의 처 증거자 정명련 마리아의 신앙이야기처럼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신앙선조들은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을 순명과 치명의 그릇으로 훌륭히 담아내시었고, 그 후손들인 우리들이 그 은총을 입어서 오늘도 열심히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순교자 황사영은 경기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찾는 이 드문 초라한 묘역에 홀로 누워계십니다. 그곳 송추 황사영의 묘역에 서있는 묘비석 비문( 1988년 10월29일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가 지어 세움) 에서 조차 <창원황공 알렉산델 사영의 묘 / 昌原黃公 알렉산델 嗣永의 墓 >라 표기하고 있어 황사영의 세례명 알렉시오의 오기(誤記)로 남아있는 실정입니다.

의정부2동 본당 관할인데 금년 1월과 2월에 제가 그곳을 찾아 참배를 드릴 때까지도 아직은 순교자 황사영의 묘역을 들어서는 입구의 길조차도 없이 모텔과 음식점들에 가려져있는 매우 답답하고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이제 그가 주님께 눈물로 써 올린 백서 중 한 구절을 오늘 이 시간 순교자성월의 첫날 밤 여러분과 함께 묵상해 보면서 황사영 알렉시오와 그의 부인 증거자 정명련 마리아의 아름다운 신앙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 애통민박지중 에 수위련아 하고 수위위아 ’ ( 哀痛悶迫之中 誰爲憐我 誰爲慰我 ) 슬프고 답답한 가운데 누가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며, 누가 저희를 위로해 주시겠습니까?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증거자 정명련 마리아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성모님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2005. 9. 1 <순교자 성월>에 수원교구'보라동 성당' /발표자 : 임성빈 요한 크리소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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