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제사 문제와 신해박해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 신부
1. 교회의 유교식 조상제사 금령
한국천주교 창설을 주도했던 남인의 지식인 신도들은 선진유학을 공부하여 온 터라서 한문 서학서를 통해 천주교 교리와 유교 교리가 배치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천주교 교리가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주는 것으로 파악하여 중국 선교사들의 보유론적인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교회 창설기부터 신도들은 천주교가 유교식 조상제례를 금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윤유일을 1790년 7월 북경교회에 두 번째 파견하면서 구베아 주교에게 천주교 신도로서 신주를 보존하고 조상제사를 계속할 수 있는가 질의서를 보냈다.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를 만난 자리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산 사람 섬기듯 하기 위함인데 만일 천주교를 믿으면서 제사를 같이 지낼 수 없다면 천주교를 믿기가 어렵게 될 것이니 혹 윤통할 방법이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주교는 답하기를 천주교는 반드시 성실을 위주로 한다. 사람이 죽은 후에 음식을 차려 올리는 것은 성실의 도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하고 부정적으로 대답하였다.
한국 신도들은 천주교를 믿으면서 당시 유교사회에 종교화된 조상제사를 병용할 수 없다는 것을 교회가 용납하지 않는다고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천주교와 유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고 유교를 완전히 떠나지 않고는 천주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보유론적인 입장을 떠나 천주교의 가르침만을 따라야 했다.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자「달레」의 말대로 유교식 전례의 금지는 “모든 계급의 백성들의 눈동자를 찌른 셈”이 되었다. 그래서 신도들 중 확고한 신앙심이 준비되지 못한 채 천주교를 주자학의 가치 체계를 보완해 주는 학문으로 믿었거나, 현직 관료이거나, 출세를 지향하는 인물이거나,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를 등지고 떠났다. 반면에 양반 신분의 특권을 포기하거나 반주자학적이고 반체제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들, 과거 유교가 아닌 다른 종교와 사상의 편력을 가진 사람들, 천주교를 통해 이상사회를 구현코자 희원하는 사람들, 제사 의무와 무관한 낮은 신분의 사람들만 교회에 남았다.
2. 윤지충․권상연의 신앙결단과 순교
1) 윤지충․권상연의 공술기
제사를 금지하는 북경 주교의 결정을 전해들은 전라도의 진산의 윤지충은 1791년 5월 어머니 권씨의 상을 당하게 되자 어머니의 시신을 초빈하였다가 8월에 가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장례의식대로 관곽(棺槨)․의복․곡읍(哭泣) ․천효(穿孝)를 지키고 문상도 받고 무덤에 회격(灰隔)과 횡대(橫帶)를 예대로 갖추었다. 그러나 신주를 모시 않고, 음식을 차려 놓고 지내는 제사만은 지내지 않았다. 이러한 윤지충의 행위에 권상연은 동조하여 그 역시 신주를 소각하여 폐지하고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폐제분주한 사실이 조야에 알려지자 맨 들고 일어난 사람은 홍낙안이었다. 그는 노론(老論)의 측근 인물로 평소 친천주교파에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고, 천주교도들을 가리켜 황건적이나 백련교도와 같이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반란세력으로 규정하고 맹렬히 공격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사건을 신속히 처리하도록 재촉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즉시 체포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조정에 알려 섬멸토록 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는 두 사람의 행위를 패륜적인 역적행위라고 규탄하면서 참형토록 장서(長書)를 올렸다. 홍낙안의 성토가 시작되자 당색(黨色)의 구분없이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고, 관료유신(官僚儒臣)들의 30건이 넘는 상소가 올려지고 통문이 나돌았다. 또한 권상연의 일가인 권상희(權尙熺)는 채제공을 찾아가 권상연의 소행을 고발했다.
1791년 10월 29일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연일 심문을 받고 11월 7일 전라감사의 최후 심문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심문을 받으면서 공술기가 작성되었다. 이 윤지충의 공술기는 훗날 신도들에게 영적독서로 읽혀졌고, 1839년 그의 고종질인 정하상(丁夏祥)이 쓴 ≪상제상서(上帝相書)≫의 뼈대가 되었다.
2) 윤지충․권상연의 순교
1791년 11월 8일 최종적으로 왕의 재가를 받은 사형 판결문이 전라감영에 하달되자 전라감사는 지체하지 않고 집행을 서둘렀다. 두 사람은 옥에서 끌려 나와 형장으로 갔다. 형장은 결안(結安)에 따라 남문 밖(오늘의 전동성당 부근)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통행인들의 눈에 띌 수 있어야 최대의 전시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형장으로 갈 때 외교인과 천주교인들이 뒤따랐다. 권상연은 모진 태형으로 몸이 허물어져 초죽음 상태가 되어 걸으면서 “예수 마리아”만 부르며 갔다. 윤지충은 권상연보다 몸이 튼튼하여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죽음을 향하여 걸어갔다. 그 뿐인가,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의젓한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장엄하게 했다. 그래서 신도들만 아니라 외교인들까지 모두 감탄했다.
사형장에 도착하자 영장(營將)은 관례대로 윤지충에게 명패에 적힌 왕의 판결문을 읽도록 했다. 윤지충은 사형선고문을 받아 큰소리로 당당하게 읽었다. 그리고 나서 머리를 자르는 목침 위에 머리를 고이고는 예수마리아를 여러 번 부르며 침착한 태도로 망나니에게 준비가 다 되었으니 치라는 신호를 했다. 망나니는 단칼에 목을 쳤다.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권상연도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목이 잘렸다.
3) 아뿔싸! 한발 늦은 파발꾼
정조는 채제공의 주청을 허락하여 사형을 선고한 것을 후회하고 사형집행을 유예시키고자 전라감영으로 급히 파발꾼을 보냈다. 왕의 예견에는 이러한 결정이 준례(準例)가 되어 앞으로 계속해서 천주교도들이 희생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보였다. 그래서 사형을 중지하고 귀양보내도록 지시한 것이다. 그러나 파발꾼이 도착한 때는 이미 두 사람이 순교의 영광을 얻은 후였다.
처형된 후 두 사람의 머리는 결안에 따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장대 끝에 높이 메달아 놓았다.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믿으면 이렇듯이 참형을 받게 된다는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천주교인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처형 장소를 군인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지키게 했다. 그런 후 아흐레째 되던 날 임금은 두 순교자의 가족들에게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했다.
4) 기적의 피
친척과 친지들은 장례를 치르려고 형장에 왔다가 모두 놀라운 일을 목격했다. 처형된 지 아흐레가 되었는데도 시체가 상하기는커녕 그 날 참수를 당한 듯 선혈이 붉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를 고여 놓고 자른 목침하며 결안을 써 놓았던 명패가 방금 전에 흐른 듯 선혈에 촉촉하게 젖어 있었던 것이다. 12월이면 춥기도 하지만 그 해는 어찌나 추었던지 방안에 있는 물그릇마저 얼었기 때문에 놀라움이 더욱 컸다.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열정은 얼어붙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놀라운 상황을 목격한 외교인들은 경탄하며 재판관들의 불공정함에 항의하고 두 순교자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 기적에 감동하여 입교까지 했다. 그리고 교우들도 놀라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주를 찬미했다. 사람들은 두 순교자의 죽음을 의로운 죽음 곧 절사(節死)로 이해하여 특별한 존경을 드렸다.
형장에 모인 교우들 중 어떤 이는 의원이 포기한 다 죽게된 환자인데 순교자들의 피가 묻은 명패를 담갔던 물을 마시고 병이 그 자리에서 나았다. 또 거의 죽게 된 사람이 순교자들의 피에 적신 수건을 만지고 즉시 나았다. 하느님은 당신의 능력을 두 순교자를 통하여 만인에게 드러내 보이셨던 것이다. 순교야말로 하느님을 증거하는 최고의 표양이었다. 순교자에게 나타내 보이신 기적은 교우들의 믿음을 굳세게 해 주었고, 또한 많은 외교인들을 신앙으로 인도했다. 순교자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었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무덤 위에서 미사가 거행되던 전통대로 언젠가는 윤지충․권상연의 무덤 위에 성당이 세워지길 바랬다. 1795년 4월 어느 날, 주문모 신부가 전라도 교회를 방문할 때였다. 신부를 안내하던 유관검과 이존창은 마침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 아래를 지나게 되었다. 유관검은 주 신부에게 무덤을 가리키며 “이 무덤은 우리 나라 신도들 중에서 고명한 사람의 무덤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 신부는 “훗날 동방에 천주교가 크게 행해지면 이 두 사람의 무덤은 마땅히 교회당 안에 들게 되리라”고 했다.
1793년 말, 조선교회는 신해박해의 전말과 윤지충․권상연의 순교사적과 기적이 일어난 사실을 북경 주교 구베아에게 보고하면서 순교자의 피가 묻은 몇 장의 수건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구베아 주교는 1797년 8월 15일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사적과 기적의 내용을 사천(四川) 교구장 마르탱 주교에게 보냈는데, 그가 조선교회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역사를 알고자 하여 라틴어로 써서 보낸 것이다. 이 서한을 받은 마르탱 주교는 즉시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라틴어 원문과 함께 런던으로 보냈다. 1798년 7월 10일 이 서한이 런던에 도착하자 즉시 각국 말로 번역되어 서구 교회에 전파되어 큰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구베아 주교는 두 순교자의 순교행적을 포교성성에 보내 이른바 ‘5 순교자전’에 기록했다.
신해박해 후 윤지충의 순교행적은 조선 교우들의 순교정신을 앙양시켜 주었고, 그의 유물은 성물처럼 소중하게 간직되었으며 성인과 같은 존경을 받았다.
3. 맺는 말
유교식 조상제사를 거부하므로 발생한 신해박해를 이 시대의 상식으로 반성하면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라는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의 독선주의가 근본 원인이었다. 그리고 어느 학인은 종교의례가 세속화되었을 때 의례는 맹목적인 권위주의․형식주의에 빠지게 되며, 동시에 인간의 삶을 속박하고 무의미한 기계화를 가져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깊이 새겨두어야 할 교훈이다. 사실 신해박해는 그 근원을 따져보면 중화문화의 유교와 서양문화의 천주교간의 우월감이 빚어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조상제사문제와 신해박해의 올바른 이해는 조선후기 사상계에서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조선 주자학에 반하여 일어나고 있던 여러 가지 사상운동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한국의 전통문화 중에서 중국적 유교문화의 비중이 높다하여 한국의 조상제사는 유교제사 하나만이 전통의례라고 주장하였던 문화적 상황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청나라의 강희제는 조상제사를 하나의 유교적 관습 또는 종교적 성격이 없는 국민적 관습으로 말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조상제사의례는 종교화 내지는 신앙화되었기 때문에 유교의 관행이나 국민관습의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그래서 천주교 신도들은 당시 조상숭배의식인 제사를 종교적인 문제로 인식하였고, 그들은 천주교로 개종한 까닭에 천주교 의식을 선택할 수 있었다. 만약 조선후기가 살고 있던 역사적 문화적 현상을 외면하고 조상제사와 신해박해를 이해하려 든다면 윤지충과 권상연의 윤지충․권상연의 피는 맹물이 되고, 순교는 맥없는 일로 남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