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두의 문화비평 -
숭실대 박물관 '돌 십자가'와 '신라 성모 마리아상'의 정체
숭실대 박물관 '돌 십자가'와 '신라 성모 마리아상'이 가짜인 이유
최근 보도된 뉴스 중에 "통일신라때 만든 '예수 안고 있는 성모상' 모습"이라는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근간에 필자는 몇달 동안 신라의 선도성모 이슈로 온갖 자료와 장문의 글을 써오고 있던터라 대단한 자료가 있나 하고 반갑게 뉴스 기사를 클릭했다.
아니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60년대말에 일어났던 일을 다시 보도한 기사 내용 이외에 새로운 것은 별로 없었다. 이번에 기사를 낸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는 필자와는 조선닷컴 BBS 시절부터 안면은 아니라도 인터넷상의 '댓글면'을 제법 나누었던 바가 있는 유능한 기자이다.
그런데 비록 이슈에 대한 학계의 회의적 평가들을 취재하여 기사에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왜 이러한 과거에 문제가 되었던 기사가 다시 보도되게 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번 조선일보의 보도는 동아일보 보도 후 40년만에 다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 필자는 이에 대하여 분명한 의견을 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 숭실대 '신라 유물들'에 대한 의혹들은 제기하고 있어도 그 유물들의 문제점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내놓은 의견들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 문화 유물에 대한 그릇된 호도를 막아야 하며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의 이른바 '신라 기독교 유물들'이 가짜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 글은 숭실대 박물관에 현재 다시 전시되면서 다시 뉴스 기사로 논란을 일으키는 '신라 때의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 등'이 왜 가짜인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글이 될 것이다.
1. 60년대 말 동아일보의 기사와 '돌 십자가' 출처의 거짓
1967년 8월 12일자 동아일보에서 보도한이래 가짜 의혹 논란에 빠져 숭실대 박물관측은 그로부터 수십년간 문을 닫은 일까지 일어났던 일이 "가짜 십자가상"과 "가짜 신라 성모상" 사건이다. 이미 70년대에 우리 사회에서 일단 비판을 받고 사라진 일이 다시 재발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아래는 그 당시 김양선 목사가 주장하한 이른바 '신라 때 경교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에 대한 67년도 동아일보의 기사이다.
![]() |
*동아일보, 1967년 8월 12일자, 5면
동아일보의 당시 기사 본문에서 김양선씨가 '돌 십자가를 암석 위에서 나타난 걸 주웠다'고 보도했다.
“景敎傳來의 核心인 物的資料는 그가 慶州에서 수집했다는 銅十字架와 마리아 像과 함께 佛國寺에서 얻은 石十字架. 1956년 암석위에 나타난 걸 주워 감정한 石十字架는 浮*塔과 石質이 같고 腐蝕度가 같다는데서 30년간 고고학에 종사한 그의 확신으로 羅代의 것으로 주장한다.”(위의 동아일보)
그런데 이번 조선일보 보도에서 숭실대 박물관측의 주장을 보면 돌십자가 발견 장소는 전혀 다른 곳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말이 바뀌고 있는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이것말고도 또 다른 장소도 언급기도 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발견장소까지 중언부언이 되어야 할까? 유물 자체가 가짜 신라 유물로 허위 주장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의 당시 기사 내용에는 위의 기사 사진에서 보듯이 김양선 목사(당시 교수)의 주장을 인용 보도하면서 부제로 '종교, 학계, 근거없다고 반박'이라는 부제를 달기까지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숭실대 박물관측은 전시하고 있던 문제의 '유물들'에 대하여 불교는 물론 기독교계에서도 많은 비판과 반대에 부딪쳐 당시의 전시를 철회하고 박물관 문을 닫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회적인 논란과 질타를 받았던 '신라 십자가'와 '신라 마리아 성모상'을 발견했다는 김양선(金良善) 목사는 대한불교조계종과 사학계, 심지어 일부 기독교계의 극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그로 인하여서인지 김양선은 그로부터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후 간혹 불교와 기독교의 종교간의 대화 이슈가 나오면 문제의 그 '유물들'이 언급되기도 했다. 가짜 의혹을 받으면서도 '신라시대 기독교 유물'이라는 별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주장이어서인지 곧잘 한국 종교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일부 기독교인들에게도 회자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결같은 의견은 '증거 불확실', '발견 경로 의혹'이라는 토를 달고 있었다.
그러한 사회적인 논란에 휩싸인 그 물건들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문화재 감정에서 보다 명확한 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는 여기에 분명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유물들이 가짜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그 유물들의 정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60년대 말 70년대에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 박물관이 문을 닫을 정도였다가 수십년이 지난 2004년 숭실대의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재개관하면서 이번에 다시 사회적인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이번에 보도된 문제의 기사 내용에도 언급된대로 '돌십자가'와 '성모상'에 대하여 일부 불교계 인사들로부터 '절에서 기독교 유물이 나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항의를 다시 받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도 문제의 유물이 오히려 불교문화를 인정하는 배경이 된다하여 비난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에 그 문제의 유물에 대하여 뉴스 기사화가 된 것은 현 정권이 기독교 정권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경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궐선거와 그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은 분명 유물 출처에 대한 어설픈 두벌 세벌 증언은 물론 그 고고학적 근거가 부족한 사건 외에도 다른 여타의 문제들을 안고 있다.
유물에 대한 분명한 출처 경로가 의혹을 받았다면, 추가적인 증거가 나오든지 문헌적이거나 더 많은 유물이 출토되든지 했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더 나쁜 거짓 증거가 등장하면서까지 다시 이번에 기사화가 되고 있다는 것은 한심하기까지 하다.
왜냐면 그 유물들을 찾아냈다는 장소의 이중 삼중적인 발표는 물론 김양선씨 자신이 출처에 대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면이 있다는 것이 나의 이 글에서 밝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보도에서 숭실대 박물관 관장이면서 동대학 사학과의 고고학 전공자인 최병현 관장이 한 말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관장은 기사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 선생(김양선을 말함) 생전에 본인으로부터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밑에서 돌십자가를 발견했다'는 말을 들었다"
앞서 동아일보 기사의 '암석 위'와는 정반대의 '석등 밑'이라는 전혀 다른 표현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아일보 기사가 시기적으로 더 앞선 출처 증언이라면 이번에 말을 바꾼 '불국사 대웅전'이 동원된 것은 의도적으로 십자가와 불교의 한복판을 연결한 흔적이 있어 보인다.
돌십자가의 출처가 '암석 위에서 주웠다'고 했다가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밑'이라는 중언부언은 과연 김양선씨가 애초에 그것을 '발견'했다는 장소가 문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증언이 '의도하는 효과를 위하여' 바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동시에 유물 습득의 동기 또한 문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50년대 중반에 기독교 목사로서 김양선씨가 당시에 어떻게 다른 종교 한 복판의 석등 밑을 파보게 되었다는 말인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해도 그것을 가져갔다는 것은 장물이 아닌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불국사에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장물 전시관인가?
그 '돌십자가'를 입수하게 된 동기에는 참으로 어딘가 의구심을 가지기에 알맞은 것이다. 이러한 장소 문제가 가짜라는 것을 필자가 드러내게 될 것이다.
보통 절이 아닌 불국사의 석등을 그것도 대웅전 앞의 석등 밑을 어떻게 파보게 되었다는 것인가? 이것은 불교의 정통 중앙에서 문제의 '돌 십자가'가 있었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출처 경위와 장소에 대한 허위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한 중언부언인 것이다.
이러한 동기 배경의 문제를 넘어서서 여기에서 필자는 '돌십자가'의 출처에 대한 근거가 '여러 말'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신빙성이란 일관된 증언이 있어야 한다.
2. 김양선, 출처 증거물을 스스로 없애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아래에서 돌십자가를 발견했다"고 말한 김양선은 석탈해의 사기 수법을 쓰다가 들킨 것일까?
<삼국유사>에 보면 석탈해는 호공의 집터가 좋은 것을 보고 그것을 빼앗기 위하여 그 집 근처에다 몰래 숯을 묻어두고는 얼마 뒤에 그 집 주인에게 그곳이 자신들의 조상이 살던 곳이라고 우겨 그 증거로 그 숯을 파보여서 집을 빼았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석탈해의 사기 행위도 들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시대 기독교 유물' 발견자로서 김양선은 스스로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자신이 처음 발표했던 유물 출처 증거물을 스스로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증거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언급하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유물을 다룰 때에 대단히 흥분된 상태에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기독교인인 성기문(말씀발전소 대표)은 오래 전에 <김양선 목사, 불국사에서 기독교 보물 발견하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머지는 글이 길어 이곳에 올라가지 않아 아래 사이트에서 전문을 볼 수 있다)
"사실 김양선 목사가 없었다면 나와 같은 기독교인들이 잠시 동안이라도 경교가 신라시대에 전래된 가능성 때문에 흥분과 설렘의 나날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기독교가 한반도에 1000여 년 전에 이미 전래가 되었다니! 비록 이러한 흥분이 단지 젊은 날의 호기심으로 그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러나 성기문은 이 유물들의 출처와 발견 경로에 대하여 의문을 던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유물들의 역사적 가치를 지지해 줄 만한 근거, 즉 이 유물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로 발견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성기문의 글에서 인용되고 있는 '돌십자가' 발견 장소는 이번 조선일보 보도의 '불국사 대웅전 석등 밑'과는 또다른 장소로 증언되어 있다는 점이다.
"김 목사와 함께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 '돌 십자가가 불국사의 우물터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자! 필자가 왜 문제의 이 유물들의 사안이 가짜라는 것을 주장하는지 눈치를 챘을 것이다. 60년대 말 동아일보의 증언은 "암석 위에 나타난 것을 주워"라고 했었다. 현재의 숭실대 '한국기독교 박물관' 관장이라는 사람은 "돌 십자가가 불국사 대웅전 석등 밑"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발굴에 함께 참여했던 사람'은 "돌 십자가가 불국사의 우물터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찰 경내에서 물건을 몰래 도굴 유출했다면 '발굴'이라는 표현은 또 왜 들어갔을까? 유물에 대한 학술적 신빙성을 높여주기 위하여 '도굴'을 '발굴'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일까? 김양선은 사망한 사람이라도 '함께 발굴에 참여한 사람'은 왜 그 신원을 밝히지 못할까? 그 무엇보다도 발견 장소가 '암석 위에서 주워'에서 '석등 아래에서 돌십자가를 발견했다"는 표현은 가히 조작냄새를 스스로 때를 달리하면서 달리 풍기고 있는 증거이다.
이렇게 세 다른 출처 경로의 중구난방에도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도록에는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유물"이라고 표현되어 있다니 이 사회의 '기독교 유물들'에마저 그 권위들을 추락시키는 결과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역사적이고 자랑스럽다면 왜 이렇게 여러 다른 증언이 있게 되었다는 것인가? 이것은 이야기 전달 과정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 김양선의 행태에서 드러났다.
성기문은 김양선과 함께 문제의 돌십자가 발견에 함께 있었다는 사람에게 '김양선이 유물발견 기록 문서를 없앴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목사가 어떻게 그러한 유물들을 발견하였는지를 기록한 문서는 김양선 목사 자신이 없애버렸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사실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증거인 유물에 대한 발굴 경위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며 이상한 일이다. 이와 관련된 진실을 알았으면 한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395
이제 사건은 스스로 붕괴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감추고 다른 말을 해야 하는 사실들이 드러난 이상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을 사람들은 더 이상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돌 십자가'는 물론 '마리아 성모상' 및 그 여타의 전시물의 그 어떤 것들도 신빙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김양선은 그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그가 경주에서 발견한 유물이 "불교에 흡수된 기독교 유물로 생각된다"고 표현한 것부터가 어딘가 뒤가 꾸린 적극성이 약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동기가 불순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정말 진정한 증거가 되는 돌 십자가이고 성모 마리아상이라면 왜 그는 그와같이 중요한 기독교 유물을 '불교에 흡수된 것'으로 표현했어야 했을까? 흡수된 것인지 경교 신도가 쓰던 것인지 어떤 기준에서 판단했단 말인가? 제 발 저린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 표현은 기독교가 불교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것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도 문제의 유물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었다.
이러한 내용을 전하는 말씀발전사 대표 성기문씨는 "지금도 숭실대학교의 한국기독교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유물들이 통일신라 시대의 것이라는 증거는 너무 박약하다. 당시의 불교도들이나 고고학자들의 견해처럼 일반적인 고대 형태로써의 십자가와 유사하지만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유물들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동시에 기독교인인 그는 김양선의 발견 자체에 대하여 결과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완곡하게 선언하고 있다.
"신라 시대에 경교가 전래되어 왜곡되었다는 말인가, 신라 불교가 경교의 형식을 흡수하였다는 말인가, 어떠한 이유로 불국사나 경주에 그러한 유물들이 선물이나 기념물 등의 형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는가는 아직도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유사한 유물들이 여러 개 국내에서 발견된다든지, 신라에 이러한 유물들의 존재를 입증 혹은 방증해줄 만한 문헌들이 발견된다든지, 삼국 시대(혹은 남북조시대)에 특별히 신라에 경교가 전래되거나 영향을 주었다는 더 명확한 증거들이 발견되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돌십자가' 정말 '돌' 십자가가 되었다. 발견자의 증언부언과 증거인멸, 발견 동참자의 증언 그리고 기독교 내부의 평가 이 모두가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유물들임이 명백히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우물 안'에서 '석등 아래'와 '암석 위'만큼 수중, 지하 지상을 돌아다니는 쑥대머리가 된 유물 출처 경로에 대한 불신을 스스로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돌십자가는 더 이상 경주나 신라 유물로 들먹여서는 안될 것이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과거에 문을 닫았던 전과를 재범하고 있다. 불국사의 명에를 위해서도 기독교에 대한 신뢰감을 위해서도 영원히 문을 닫아야 한다.
3. 한국에서 발견된 것처럼 왜곡시킨 이른바 '금강산 경교비'
이어서 '신라 성모상'이 가짜인 이유를 밝히기 전에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또 다른 '한국 기독교 유물'이라는 '금강산 경교비'도 가짜로 왜곡해온 사실들을 밝혀내고자 한다.
불국사에서 '돌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을 찾아냈다는 것을 여러 다른 방증을 드러내려 거짓 힘을 쓰다보니 이른바 '금강산 경교비'가 마치 금강산에서 발견된 양 허위 주장한 흔적과 그 기만성을 볼 수 있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발견된 경교기념비"로 거짓 선전되고 있는
중국 경교비 모조비 탁본
위의 경교비는 이른바 '금강산 경교비'로 그릇 선전되어 왔다. 사실은 비림 박물관으로 옮긴 당나라 경교비를 대신하여 중국 장안의 경교비가 있던 곳에 세워진 모조비를 탁본한 것이다. 아래는 중국 경교비 모조비가 난데없이 '금강산 경교비 발견설'로 왜곡된 글의 내용의 한 예이다. 이 얼마나 사실과 다른 내용이 확대되어 가고 있는가를 보라.
"1917년에 금강산에서 경교 기념비가 발견되었다 했는데,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는 그 기념비의 사진도 전시되고 있었다. 그 비석이 금강산의 장안사라는 절에서 발견되었다는 것도 당시의 한반도 사람들은 대승불교와 경교를 같은 종교로 생각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에 경교의 발자취가 남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한반도는 신라시대부터 미미하게나마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조선조의 남사고가 자신의 비결서(격암유록)에 로마서, 골로새서 같은 바울서신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인 것이다."
http://jesu-ufo.com/myth/0myth-116.htm
금강산에서 1917년 경교비가 발견되었다? 말도 안되는 왜곡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위의 글을 쓴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종교적인 허위 선전으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시키는 '나비현상'을 확대시켜 가고 있는 원흉이 되고 있는가.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 사진이 전시되고 있는 "금강산에서 경교비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도하고자 하는가? 이 경교비가 금강산에서 발견되었다면 사진이라도 전시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중국에서 가져온 사진이라면 여기에 전시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당나라 경교의 중요한 사진들이 더 많이 있으니까.
그러나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이 '금강산 경교비' 사진을 전시한 것은 그것이 '금강산에서 1917년 발견되었다'는 것을 선전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증거로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결과 그 내용에 속은 일반 사람들에게 위와 같은 연도와 장소까지 표현한 '1917년 금강산에서 발견한 경교비"로서 인식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분단시기 오랜동안 갈 수 없었던 시기에 금강산 그것도 장안사에 경교비가 있다고 거짓 주장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분단시대에 남북이 서로 왕래하지 못하던 시대를 노린 사기수법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90년대 말부터 남북교류가 진행되면서 금강산에 오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사실이 들통이 나버렸다. 그런 결과 숭실대 박물관측은 말을 또 바꾸기 시작했다. "중국 당나라 때 경교가 성행했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금강산 장안사에 세운 기념비를 탁본한 것"이라고 말을 바꾼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금강산에 어떤 기념비라도 사실 세웠었다는 말도 사실일까? 장안사에 갔다 온 사람들에게 그 경교비 기념비를 본 사람이 없다. 기독교인들이 그것이라도 사진찍어 난리를 칠 일인데 잠잠하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자체마저도 '탁본'이란 것 외에 아무 현장 사진도 없다. 눈감고 아웅하고 있는 것이다.
장안사 절에는 중국 경교 모조비를 한국에서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는 주장 또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담녀 그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금강산 교류가 그렇게 많았으면서도 장안사의 '경교 기념비'는 있었던 자리 사진도 장안사 사진도 찍어왔다는 사람들은 볼 수 없다.
어떤 외국인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현장의 흔적이 완전 없어지는 거은 아닐 것이다. 그 어떤 식으로든 '금강산에서 발견된 경교비'와 '중국의 경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1916년에 세운 기념비'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우리나라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중국 경교비 사진을 찍어 마치 경교 신도들이 신라 때 금강산에 세운 경교비인양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돌십자가'에 대한 거짓 증언들을 보았다. 이제 경교비에서도 이와같은 허위와 혼동을 의도적으로 유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이제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의 '경교비 탁본 사진'은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금강산에서 탁본한 방증이 없으며 마치 금강산에 경교비가 본래 있었던 것처럼 허위선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박물관측은 '도굴'을 '발굴'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금강산 경교비 탁본에 대하여 이제 와서 교묘한 말을 하고 있다. "경교의 동양 전래설을 주장했던 고든(E.A.Gordon) 여사가 우리 나라 경교 전래를 밝히기 위한 연구기념으로 1916년 금강산 장안사 입구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모조한 경교비를 건립하였는데, 김양선 선생이 이를 탁본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의 근거나 그 어떤 원형의 사진 남은 흔적의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든의 경교 기념비'의 근거도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사실이 대단히 학술적인 근거가 있는 것처럼 미사려구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 경교비의 모조비 탁본과 중국 모조비의 금강산 기념비 탁본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중국 경교 모조비를 기념하는 금강산 기념비 탁본'이라는 것은 중국 찬양 기념비가 되고 있을 뿐이다.
781년 당나라 씨안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는 845년 사라졌다가 1625년 명나라때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발견된 당나라 때의 경교비를 대신하여 씨안의 발견된 장소에 중국측은 모조비석을 세웠다. 그런데 "중국의 그 모조비석을 금강산 장안사 입구에 기념으로 세운 것이 지난 1916년이며 그것을 세운 사람이 E.A. Gorden 여사"라는 것이다.
고든 여사가 '기념비'를 세웠다면 한국과 관련한 단 한 줄의 의미 부여의 귀절도 넣지 않고 중국 경교 유행비의 모조비를 본딴 '모형비'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 '모형비'는 금강산 장안사에서 확인이 안된단 말인가? 이 모두 거짓이다. 왜 '탁본'만 있고 그 사진은 없다는 것인가.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의 그 '탁본'은 그동안 '사진'이라고 거짓 선전되어 오기도 했다. 사진이 있다면 장안사의 어느 위치에 어떤 배경인지 왜 밝히지 못하고 있는가?
고든이라는 외국 여인이 그 기념비를 세웠다면 왜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경주 등에 세우지 않고 하필 심심산곡 금강산 장안사 입구에다 세웠다는 것인가? 당나라 '장안(씨안)'과 같은 이름의 '장안사'라서? 경교비 기념이 장안사를 위한 것인가 한국을 위한 것인가? 사기 행위를 위한 한심한 말놀이에 불과한 것을 볼 수 있다.
'금강산 기념비 탁본'에서도 '돌 십자가' 출처 기록을 스스로 없앴던 김양선이 다시 등장한다."금강산 경교비를 김양선 선생이 탁본하였다"는 것이다. 분명 앞서 '석등 밑'인지 '우물 안'인지 '암석 위'인지 그 정체불명의 '돌십자가' 발견 장소 기록을 없앴던 그 김양선이다. 과연 김양선은 금강산 장안사에서 탁본을 한 것일까?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김양선은 그 탁본을 마치 금강산에 경교신도들이 경교비를 세운 것처럼 선전했던 결과가 '금강산 경교비'로 표현되는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경교비 사진'인 것이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6-70년대 물의를 일으켜 2004년 재개장 될 때까지 공백 기간 동안 신라의 역사적 유적인 경주 불국사에 대하여 수많은 왜곡된 선전이 이루어졌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유물들'에 대한 문제 속에는 이렇게 당나라 경교비 모조비가 '금강산에 있는 경교비 사진'으로 호도되어 왔던 허위까지 들어 있는 것이다.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중국 당나라 시기에 들어온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문헌이나 고고학적 유물들이 지금도 중국에 남아 있다. 물론 씨안의 경교비도 781년에 세운 것이 1625년 명나라때 발견되어 지금 씨안의 비림 박물관에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비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모습
Nestorian Tablet from Xi’an (Chang’an)
Tang dynasty (618—907 CE), dated 781
Forest of the Steles Museum, Xi’an, China
Ricci 12 KP China 2007 178

*중국 씨안 비림(碑林)에 있는 1625년 명나라때 발견되었을 때의
당나라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오리지날 모습
This stele, erected in 781 in Xi’an, includes a list of 70 Nestorians who, with Arabs and Persians, were active traders in China during Umayyad and Abbasid times. The Nestorian Tablet had been originally Located at the Chongren Monastery, a mile west of the old Xi’an city walls. The tablet disappeared, probably during religious persecutions in 845. It was unearthed eight hundred years later, in 1625
http://www.ciw.edu/publications_online/china_exploring_interior/china_revisions-Pages/Image36.html

1907년 덴마크인이 반출하려했던 사건으로 세워진
경교비 모조비의 모습.
http://www.assyrianchurch.com/forum/viewtopic.php?f=5&t=768
금강산 경교 모조비 탁본이란 것은 우리나라와 경교의 역사를 밝히는 그 어떤 근거를 가지는 자료가 아닌 것이다. 그런대도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는 마치 대단한 '금강산 경교비'인양 인식되기에 알맞게 정체불명의 '돌십자가'와 함께 '금강산 경교비 사진'으로 호도하는 전시를 계속하고 있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경교 부분 전시 모습.
문제의 돌십자가 옆으로 '경교유행중국비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 모조비를 탁본한 이 탁본은 '금강산에 경교비가 있다'는 것처럼 호도되어 왔다.
http://blog.cbkmc.com/blog/index.php?article_id=333&blog_code=sunghwa
당나라 경교비 즉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진품은 씨안의 비림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그 모조품은 씨안의 발견된 장소에는 세워져 있다. '중국의 경교비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모조비를 금강산에 세웠다는 모형비석 탁본'이라는 것은 그래서 많은 왜곡된 인식을 확산시키는 근원지가 되고 있다. 중국 경교비가 아닌 그 중국 모조비를 기념하는 비문을 탁본해 놓고 '금강산 경교비'가 세워진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허위 사실들을 왜곡 선전해 온 결과는 "금강산 장안사에서 발견된 경교기념비"에 이어 "신라 사람 김대성이 석굴암을 축조할 때 하늘의 계시가 있었던 것일까?" 하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그야말로 허구의 사실들이 확대되는 글들이 나오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http://jesu-ufo.com/myth/0myth-116.htm)
4.숭실대의 다른 십자가 유물들의 문제점
아래의 사진 또한 숭실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른바 '십자가상'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지나친 아전인수식의 기독교 박물관측의 해석일 뿐이다. 이보다 더 많은 '십자가상'이 경교가 중국에 들어온 시기보다 1천년 이상 앞선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발견되어 왔기 때문이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이 전시 주장하고 있는 '한국 경교 십자가'
이 십자가상들을 놓고 "경교(景敎)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제(銅製) 십자무늬 장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위의 동제 유물은 유물이 맞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아래 사진에서 보는대로 청동기시대의 팔주령 방울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2천년 이상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아래 사진들을 보라. 이 유물들도 '십자가'이다. 이들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도 경교의 십자가라고 하겠는가?
위 사진 왼편의 팔주령은 이미 고대 우리나라 무속의 전통 방울의 하나라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숭실대에 전시하고 있는 '동제 십자가 장식'이라는 것은 오히려 그 가장자리의 구멍들에 방울을 달았을 팔주령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차라리 십자가를 주장하려면 위 사진 오른편의 전북 익산 출토 원형유문청동기圓形有文靑銅器)의 십자일광문(十字日光文)이 더 십자가를 닮아 있다. 이것을 만일에 전문 발굴팀이 발굴하지 않고 김양선과 같은 어느 신뢰성 없는 기독교인이 찾아냈다면 이것도 경교 유물?이라고 했을 것이 아닌가.
이 원형유문청동기 무늬는 한국식 세형동검 2기 ~ 3기 (대략 기원전 3세기)에 유행했던 십자문으로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십자문양이다. 십자가 문양만 보면 경교의 경끼를 일으키다간 차라리 한자의 열을 나타내는 '十' 자가 경교의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그 다음으로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화살촉 모양의 비금속세 십자무늬"로 호도하고 있다는 숭실대 전시 물건을 보자.

*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통일신라 십자무늬 장식 유물'로 주장 전시하고 있는 물건.
*오지여래(五智如來 the Five Wisom Buddha)의 만달라를 보여주는 오각 별의 모양이다.
위의 사진의 문양은 십자가 문양이 아니라 오히려 만다라 문양이다. 무속적 태양숭배의 오방사상이 나중에 전이된 불교의 댜니 만다라(Dyani Buddha Mandala) 모양에서나 오방향을 나타내는 금강저 비스바즈라(Visvavajra)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이미지일 뿐이다.

*티벳의 댜니 만다라(Dyani Buddha Mandala)
다섯 개의 원형 불상을 축으로 하고 있다.

*오각 만다라
십자가는 특정 종교의 로고가 아니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무덤 모양에도 등장한다. 필자가 오하이오주 현장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그렇다고 아무도 기독교인 인디안이 그곳에 묻혔다고 해석하지는 않는다.
십자가는 무조건 기독교의 것이라는 인식은 우리나라 고대 청동기시대의 무속적 방울에서도 발견된다. 경교가 당나라에 들어오기 거의 1천년 전에 한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왔다고 어거지를 쓸까 사진을 올리기조차 민망하다.
충남 예산군에서 출토된 십자문이 들어 있는 청동기시대 팔주령을 보면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또 하나의 '청동기 시대 기독교 십자가'라고 우기며 전시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팔주령 안에 보이는 십자일광문
충남 예산군 출토
경교의 십자가는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스러운 문양을 가졌던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불교적인 요소가 더 중심에 서린 내용이 많다. 경교는 오늘날 신흥종교의 일부처럼 불교와 기독교의 합종파의 한 양상이었다. 아래 사진은 전형적인 당나라 시대에 들어온 중국의 경교 십자가이다.


*오방향을 나타내는 금강저 비스바즈라(Visvavajra)
전체적으로 십자가이다.

*전남 대곡리 출토 팔주령 방울. 전북 익산출초 원형유문청동기(圓形有文靑銅器)
5. '신라 마리아 성모상'이 불상인 이유
이제 본격적으로 '신라 마리아 성모상'의 허구를 분석할 차례이다.
이번 조선일보 기사에서 특히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은 "불교에서는 성모자상이 없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측이 주장한 내용이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 관장은 '부처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의 불상은 없다'며 '당시 중국의 경교 선교사들은 목탁을 두드리며 예배를 보는 등 불교와 융합되는 현상을 보였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모상을 불상처럼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에서 더욱 경악했다. 기독교가 불교와의 문화적 교류를 주장하는 유물을 다루는 숭실대의 기독교 박물관에서 어떻게 이렇게 불교 문화를 모르고 있을까 하는 점에서다.
과연 '불교에는 성모자상이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 이른바 '불국사의 돌십자가, 성모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어떤 리서치도 그 어떤 불교 유물에도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가 되는 말이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통일신라 마리아상'이라고 주장하는
문제의 '성모자상'
위의 사진은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주장하고 있는 문제의 그 '신라 마리아상'이라고 주장하는 그 물건이다. 분명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자상'이다. 한 눈에 보기에 이것이 기독교의 성모상은 아니다. 그것을 지금 필자는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http://cafe.daum.net/zoomsi/XBd3/21
1.60년대 말 동아일보의 기사와 '돌 십자가' 출처의 거짓
2.김양선, '돌 십자가 출처' 증거물을 스스로 없애다
3.한국에서 발견된 것처럼 왜곡시킨 이른바 '금강산 경교비'
4.숭실대의 다른 십자가 유물들의 문제점
5.'신라 마리아 성모상'이 불상인 이유
6.전통적인 모자불상: 송자관음(送子觀音)과 자모관음(慈母観音)
結.불교에도 모자불상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