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에세이-진다는 것에 대하여[펌]

2007. 4. 25. 오후 5:34:22

글자
데모가 한창이라 캠퍼스가 온통 최루가스로 자옥하던 때에도
한 귀퉁이에선 마이티에 열을 내는 한심한 족속들이 있었다.
이들을 인간같지도 않은.....하며 욕을 하면서도
마이티가 재미있다는 건 다들 인정했다.
마치 반미데모를 하다 코카콜라를 마시는 것같은 모순이겠지만
나도 한 때 프랜드한테 닭질했다는 쿠사리를 들으면서도 판에 끼면 도가니 아픈 줄 모르고......
그 마이티라는 카드게임은
先(주공)을 정할 때 자신이 선택한 패(무늬)로 얼마를 딸 수 있는지를 예상해서
그 이상을 따야 이기는 게임이다.

언제부터인지 테니스에서도 게임에 들어갈 때
마이티에서처럼 예상되는 승패나 스코어를 마음 속으로 짐작하는 버릇을 갖게 됐다.
저 팀은 좀 쎈데! 그래도 둘 다 백잡이라 별로 호흡이 안맞는 팀이야 6-4로 이겨야지....
아! 빵 먹지 말아야지 어떻게든 몇 점은 따야되는데 3점 4점?....
그래 승산이 있어! 오늘은 XX가 별로 컨디션이 안좋아보이네. 아까보니 에러도 많이 하고....
이기려고 내 위로 로브 무지하게 띄우겠구나 아예 뒤에 있어야지.....
둘 다 끈질긴 사람들이라 앞서고 있어도 잠시잠깐 마음을 놓았다가는 바로 발목잡혀 뒤집어 지니까
처음부터 게임 완전히 끝나 악수할 때까지 긴장하고 있어야지....
파트너가 승부욕이 강한데 지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이니 죽을 힘을 다해 공을 살려 놓고 봐야지....
비리비리한 팀인데 절대 말리지 말아야 돼! 아예 빵을 먹여 버릴까?6-0
.
.
.
어떤 땐 이런 과정이
막연하게나마 게임플랜으로 연결되기도하고,
강자 앞에서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불지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될 때도 있고
지더라도 체면은 세울 수 있는 스코어를 위해 결전을 불사하는 배수진이 되기도 한다.

웃으며 서로 공을 주고받고 있어도 코트에 들어가있는 4명의 표정을 살피면 스코어까지는 몰라도
어느 쪽이 이기고 있는지 또 지고 있는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게임끝나고 라카에 들어설 때도 이긴 이들은 표정과 몸짓에서 사뭇 의기양양해보인다.
아! 이 작은 승리도 사람을 이처럼 취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는가보다.
그래,
어차피 승부의 세계인데 이기려는 근성이 없다면 그 사람은 파트너로도 상대로도 둘 다 실격이야.
그날그날 이기고 진 승률을 차곡차곡 마음에 쌓아두는 사람도 있다.
라카 안에서 오늘 전승했고 요즘 자신의 승률이 8할대가 넘는다고 자랑하는 사람 옆에는
시무룩한 표정에 어깨 축 내리고 오늘 전패했다고 풀이 죽어있는 사람이 앉아있으니.

레슨끝나고 공을 주워담고 있는데 코치님이 공이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요즘 승률은 어떠냐고 물으신다.
승률?
글쎄요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고 별반 달라진 거 못느끼겠는데요하고 대꾸하면서도
그러고보니 이길 때가 많아진 것 같다는 생각도 내심 들었지만
겨울 추울 때보다는 날씨 풀리면 좀 나아졌던 계절적 요인도 있고해서 잘모르겠다가 다시 정답.

'지면 습관돼! 꼭 이겨야지?!'하며 하이파이브를 해오는 어떤 파트너랑은
웃으며 맞장구를 치면서도 아직 이기는게 습관화되어있지 않은 나로선
손바닥 부딪힘이 그대로 마음으로 전달되어 잠시동안 심적 부담으로 얼얼해진다.
정말 지면 안되는 게임(파트너가 코치님이거나 A조이고 상대는 둘 다....)에 들어가
에러를 연신 내고 있을 땐
타임머신이라도 옆에 있으면 얼른 타고 잠시 전의 과거로 돌아가
이 게임에 안 들어오는건데 싶고 아예 5년 전 과거로 돌아가 수영이나 계속할 껄하는.....
내가 왜 이리도 소심할까?
지켜보는 사람들은 돌아서면 잊을테고 나도 자고 나면 잊을 법한 게임의 승부에 이토록 목을 매다니!
하지만
중요한 포인트에서 에러내고 눈을 질끈 감고 느끼는 참담함
지고 있는 매 순간순간 마음을 콕콕 찌르는 비참함
더 늦기 전에 따라붙어야지하는 어설픈 조급함,
파트너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머릴 조아리기만하는 면목없음
저절로 튀어나오는 한숨과 부정적 감탄사의 연발,
인생역전, 만회할 찬스를 노리며 한판 뒤집기의 모험을 걸까말까하는 선택을 놓고 갈등하다가
문득 그건 하수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는데 생각이 미치면서 더욱 착찹해지고.....

평소에는 이기고 지고에 대해 쉬이 잊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지만
가끔 어떤 패배에 대해서는 정말 그 날 잠자리가 뒤숭숭하도록 오래도록 되새김질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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