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오마이뉴스, 8월27일>
장경숙(antibody4) 기자
우리 엄마.
요 며칠동안 이유 없이 걱정스러운 마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도 내내 제 마음은 엄마에게 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매일 같이 전화를 드리면 엄마는 “괜찮다”는 말을 했지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이곳저곳 아픈 데가 많은 엄마를 집에 남겨두고 이 곳 진해에서 일을 하는 것도 그렇게 수월한 일은 아닙니다.
자식 힘들게 한다고 몸이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쉽게 하지 않는 우리 엄마가 어제는 저에게 “자꾸 기운이 없어진다”며 한 마디 했습니다.
마무리 짓기로 한 서류들을 부랴부랴 가방에 챙겨 넣고 퇴근 시간과 함께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바쁜 걸음을 재촉해도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사실 없습니다. 영양제 주사를 엄마 팔에 꽂아 놓고 밤늦게까지 떨어지는 수액 방울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남들처럼 잘 걸을 수 없습니다. 막내인 저를 낳고 산후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에 신경마비가 온 이후로 엄마의 다리는 가족의 무심함과 함께 곯아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먹고사는 일에 급급해야 했던 지독한 가난 때문에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저희 형제가 다 자라서는 팔뚝 만큼이나 가늘어진 엄마의 다리에 저희 가족 모두가 너무 익숙해져 병원에 모셔가지 못했습니다.
3년 전쯤에 무릎이 많이 아프다고 하시는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정형외과를 찾아갔습니다. 연골이 닳아 없어진 다리를 인공관절로 교체하는 수술을 한 후유증으로, 엄마는 더 이상 당신의 다리로 걸어서 이웃집에 놀러 가실 수도 없고, 그렇게도 아끼고 좋아하는 자식들 집에도 가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동이 어려워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내야 했던 우리 엄마는 당신의 몸에 대한 상실감과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좌절감 때문에 혼자서 참 많이 우시곤 했습니다. 저는 그런 엄마의 등뒤에서 숨을 죽이며 또 혼자 울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 우등상을 받게 되거나 전국 대회에 나가게 되면 가난 때문에 다른 아이들처럼 근사한 건 사주지 못해도 전날 저녁에 밭에서 뽑은 열무를 밤늦게까지 다듬어서 새벽 기차역 주변의 상인들에게 팔고는 그 것으로 제 옷이며 신발을 사주곤 하셨습니다.
어린 제가 엄마에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땔감을 하고 돌아오시는 엄마의 리어카 뒤에서 이를 악물고 힘껏 밀어드리는 것, 남의 논밭에 나가서 일을 하시고 어둑어둑해져서 돌아오시는 엄마를 기다리며 밥을 하고 청소를 해두는 것, 그게 고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제 마음도, 제 키도 그때보다 훨씬 커졌는데 저는 자꾸만 우리 엄마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예쁜 옷을 사드리고 싶어 말을 건네면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옷은 무슨…, 옷 필요 없다”하며 막무가내로 거절을 하시고 예쁜 신발을 골라서 사 드리고 싶어도 '족 하수증'( 발목이 처지는 현상)이 심해 발에 맞는 신발이 없습니다. 조금만 신발무게가 느껴져도 다리에 힘이 없으니 제대로 걸음을 내딛지 못하십니다.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에도 이따금씩은 모셔가고 싶은데 쉽게 차를 탈수도, 걸을 수도 없으니 그것도 제 생각뿐입니다. 나중에 엄마하고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막내딸을 바라보며 “ 내 죽고 나면 우찌 살 건데?”하고, 다그치는 엄마의 마음 안에는 남들처럼 결혼하고 아이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일구며 살지 못하는 딸에 대한 측은한 마음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막내의 울음소리는 저승까지도 들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를 향한 엄마의 마음을 보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진해로 가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정리했습니다. 아직도 잠이 덜 깬 듯 몽롱하지만 우리 엄마생각이 자꾸 납니다. 우리 엄마가 건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