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한국 교회사 5 (교회 발전(1870-1989))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는 시기에 있어서 교회는 주로 근대화 운동에 기여하고 있었는데, 먼저 근대화 운동의 일환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래서 1887년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교회는 교육사업과 언론 계몽활동에 종사하게 되고, 비밀리에 운영되었던 신학교가 1887년 용산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1888년에는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해서 고아와 병자 그리고 노인들에게 구제 사업을 행하게 됩니다.
1880년에는 선교사들이 계속 입국하여 전국에 흩어진 신자들을 다시 모으고, 1883년에는 성당을 건립할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882년 서울에 본당이 창설된 데 이어서 제물포와 부산 대구 전주 원산 약현 등에 1890년대를 전후하여 본당이 세워지고,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보다 신경을 쓰게 됩니다. 1895년 신앙의 자유가 국왕에 의해 인정된 이후에 교회는 더욱 발전을 하게 되는데, 1885년 이후부터 한일합방을 강요당한 1910년까지 한국 교회는 매년 평균 6.98%의 신자가 증가되는 큰 성장을 보여 왔습니다. 허나 1910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됨에 따라 한국 교회 역시 일본 식민지 당국의 직접적인 규제 아래 놓이게 되어 선교의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즉 1915년에는 포교규칙을 제정하여 교회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규제를 해왔고, 모든 교회 활동을 총독부의 허가 하에 행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1945년에 이르기까지 줄곧 총독부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었지만 교회는 한일합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을 해 오게 됩니다. 한일합방 당시 한국 교회는 73,517명의 신도가 있었고, 1911년에는 조선교구의 명칭을 서울교구로 바꾸고 여기에서 대구교구를 분할하여 설정합니다. 그리고 1910년에는 한국인 사제의 숫자가 15명으로 증가되었고, 1944년에 이르러서는 한국인 성직자의 수가 132명으로 증가되는 발전을 보게 됩니다. 1920년에는 원산교구가 새로이 설정되었고, 연길 교구가 여기에서 분할되어 나갔으며, 1927년에는 미국 메리놀 선교사들이 맡아보는 평양 교구가 설정되어 평안도 일대 지역을 관할하게 됩니다. 1937년에는 광주교구가 설정되고, 강원도 지역의 춘천교구도 설정되게 됩니다. 이 광주교구가 설정되었던 1937년에는 한국인 교구장이 관장하는 전주교구가 탄생되었고, 이것은 한국인에 의한 교회의 관리라는 새로운 단계로 전환하는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었습니다. 또 교구의 증설과 함께 한국교회는 각종 신심행사와 문화활동, 사회사업 등이 많이 이루어졌고, 1888년과 1890년에 한국교회를 예수 성심과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는 대미사가 거행되었던 것처럼 한국 교회는 예수성심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히 무엇보다 두드러졌는데, 이 순교자에 대한 공경은 1925년에 거행된 순교 복자 79위의 시성식 이후 더욱 커져 나갔고, 1931년에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행사도 마치게 됩니다. 한국 교회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 문화활동을 활발히 진행시켰는데 중앙 출판부를 설치해서 문서 전교와 한국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가톨릭 청년과 별, 천주교회보, 가톨릭 연구 등 정기 간행물을 간행했으며, 가톨릭 운동부를 두어 적극적인 전교활동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던 1880년 이후 교육 사업에 착수했는데, 1884년 서울에 한 학교와 1885년 원주 부흥골에 예수 성심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그후 1904년에는 75개 정도의 학교가 될 정도로 많은 학교를 세워 교육의 발전을 이룩하게 됩니다. 1911년에는 숭신학교로 불리는 사범학교를 세웠지만 탄압으로 1913년에 폐쇄되었고, 1911년에는 숭공학교라는 실업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지배가 본격화된 1910년 이후에는 동성상업학교, 계성여학교 등 몇 개의 교육기관만을 상징적으로 갖게 됩니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고, 1946년 교회는 경향신문을 속간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되었던 가톨릭 청년과 경향잡지를 다시 간행합니다. 교회는 해방직후부터 여러 신심운동을 다시 일으키고, 해방 직후부터 정부 수립에 이르는 3년간 남한의 교회는 소련군의 제약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또한 1950년 6월 25일에 발생한 6.25 동란은 한국 교회에 큰 타격을 주게 되는데, 이 전쟁 기간 중 교회는 많은 성직자, 수도자 및 지도적 신자들의 납치와 학살에 몸살을 겪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휴전 직후 한국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입교를 하게 되고, 사회가 점차 안정되어 가면서 한국교회는 청년 운동과 그 밖의 신심 운동 등을 다시 전개해 왔습니다. 또한 레지오 마리애 운동이 도입되었고, 국내에서 창설된 한국인 수도 단체들이 본격적인 봉사 활동을 꾸준히 전개함으로 많은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발전 속에 한국 교회는 전교지에서 독립된 정식교구로 승격되었고, 그 당시 우리 나라에는 서울대교구, 대구대교구, 광주대교구와 8개의 교구가 탄생되게 됩니다. 이러한 발전은 1968년 서울대교구의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품됨으로써 다시 확인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의 주요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그 참여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국 교회는 새롭게 교구의 증설이 계속되었는데, 1963년에는 서울대교구의 일부를 분할해서 수원교구가 설립되었고, 1960년 후반기에 이으러 원주교구, 마산교구, 안동교구가, 그리고 1977년에는 광주대교구에서 제주교구가 분할되었습니다. 1980년대 이르러 한국 교회는 자신의 쇄신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으며, 1981년도에 있었던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는 교회의 현황을 전검하고 스스로의 쇄신을 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행사였습니다. 또한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고, 이 행사에서 103위 복자가 성인으로 되는 큰 영광을 우리 교회는 가지게 되었고, 이로부터 6년 뒤인 1989년에는 세계적인 행사인 성체대회를 치름으로써 한국 교회가 성숙된 교회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