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한국교회사 1 (교회 창설 전 상황)

2008. 5. 4. 오후 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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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한국 교회사 1 (교회 창설 전의 상황)

이 땅에 천주교회가 들어선 지 어느덧 20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외적으로 성장을 많이 했고, 많은 신자들이 복음 선포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적인 성숙을 통해 보다 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도록 서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에 맞추어 우리들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것을 알아야 하겠기에 한국 교회사를 배우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사를 이해할 때 오늘날 우리 자신들이 처해 있는 입장을 더욱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의 동양 전래는 13세기 이미 원나라에서부터 이루어졌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1534년 예수회 회원인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에 의해 일본에 전파가 됩니다. 그리고 1583년 마태오 리치에 의해 중국에 전파가 되어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구주와 산구(야마구치) 지방에 많은 주민들이 천주교를 믿었고, 남방 문화를 형성할 정도로 성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605년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금교 정책으로 인해 혹독한 박해를 받고서 천주교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서양의 신부들이 중국의 풍속이나 관습을 존중하며 연구하면서 전교를 하였기 때문에 많은 주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많은 신자들이 생기게 됩니다. 이때에 저술된 “천주실의”라든지 “칠극” 또는 “교우론” 같은 책들은 후에 한국의 실학파들과 또한 한국 초기 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던 책들입니다. 이렇게 중국과 일본은 예수회에 의해서 전파가 되었는데, 그 당시 조선은 폐쇄성이 굉장히 심했기 때문에 여러 번 예수회에 복음 전파를 시도했지만 어려움이 많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입한 일본군 중에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고, 이 천주교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 군종 신부로 세스페데스라는 예수회 신부가 1593년에 조선 땅을 밟았지만 조선 사람들과는 접촉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 땅에 천주교가 알려지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중에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중에는 천주교 신자가 된 사람이 상당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유명한 사람이 소서행장의 양녀로 들어간 오다 줄리아가 그 예입니다. 이후에도 일본에 거주한 예수회 신부들은 6차례에 걸쳐 조선 전교를 시도했지만 쇄국 정책으로 실패를 했고, 중국에서도 선교사들이 조선에 전교를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맙니다. 이러던 중에 조선에서는 병자호란이 일어나는데 이때 소현세자가 북경에 불모로 끌려갑니다. 소현세자는 거기서 선교사 아담 샬 신부를 만나게 되고 천주교에 접하게 되지만, 영세는 받지 않고 1654년 천주교 서적과 성물만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우리 나라는 중국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고, 또 조선 왕조의 조정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신들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중국에서 새로 간행된 책들을 사들고 왔습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한문을 자유자재로 읽고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건너온 책들을 접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서 천주교 책들도 접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조선에서도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지은 천주교 책으로 인해서 천주교를 비로소 알게 되었고, 이러한 천주교 책이 이 땅에 전해진 것은 지금부터 대략 400여 년 전의 일들입니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 전해진 천주교 책들 가운데 가장 많이 읽혀졌던 책은 천주실의였는데, 이 천주실의는 마태오 리치라는 예수회 신부가 쓴 것입니다. 이 책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천주교 신앙과 유교 그리고 불교, 도교와의 관계를 밝혀 중국인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알리는 데에 큰 구실을 한 책입니다. 또한 천주실의 외에도 그 밖의 여러 교회 서적들이 우리 나라에 전해졌는데, 17세기 초 천주교 책들이 우리 나라에 전해지자 학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이를 읽어 나가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천주교 책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이를 좋게 평가하는 학자들도 점차 나타나게 되는데,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천주교를 새로운 인생철학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후에는 천주교를 참다운 종교로 믿고 실천하는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천주교 책들을 읽고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 나라에 천주교회가 우리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세워질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땅에 선교사의 도움이 없이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던 두번째의 배경은 그 당시 사회 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존중하고 있었는데, 성리학은 더 이상 조선왕조의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 나갈 힘을 잃음으로 해서 성리학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게 되고, 성리학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을 찾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 왕조 사회는 양반과 양인, 그리고 노비와 같은 신분에 따라서 여러 가지 차별을 강요했는데, 18세기에 이르러 이와 같은 신분제도가 점차 무너져 가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평등함을 주장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에 많은 이들이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의 사회는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해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고, 양반 관료들은 민중들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던 서민들은 마음의 안식처를 찾기 위해 새로운 신흥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때 천주교 신앙이 전파됨으로 해서 참다운 신앙을 찾고 있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또한 18세기의 사회는 실학사상이 발전하고 있었는데, 몇몇의 실학자들이 중국의 유교 철학을 깊이 연구하고 있었고, 유교 사상이 가지고 있는 천과 상제에 대한 요소들로 인해서 유일신 사상을 지닌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게 됩니다. 이러한 여러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선교사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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