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한국교회사2 (교회 창설 및 박해<1770-1790>)

2008. 5. 4. 오후 4: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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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한국교회사 2 (교회 창설 및 박해 (1770-1790))

한문으로 번역된 천주교 교리서가 조선에 많이 들어오고, 천주교 교리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신앙으로 실천한 것은 아니지만, 1777년에 이르러서 당시의 학자들 사이에 자주 열렸던 학문 연구 모임이 경기도 천진암 주어사에서 열리게 됩니다. 이 모임을 강학회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권일신, 권철신, 정다산 3형제 등 20여 명에 가까운 남인 학자들이 모여 학문 연구에 몰두합니다. 이 강학회에서 서로의 우정과 친교를 두텁게 하고,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계승해서 주자의 학문 이론과 고대 수학사에 이르는 유학 전반의 사상을 연구 토론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새롭게 전래된 서양의 천문과 수학에 관한 저서까지도 연구를 했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한역된 서양의 과학 기술 서적 뿐 아니라 천주교 교리서까지도 접하게 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천주교를 연구하기 위해 모였던 것은 아니지만, 1783년 이벽이 학문 연구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합류함에 따라 이 천진암 강학회는 천주교 교리 연구회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들은 참된 인생과 우주가 만들어진 원리를 연구하기 위해서 유교 서적들을 검토하고, 천주교 서적들도 참조하게 되는데, 이들이 검토했던 천주교 서적 중에는 천주실의와 칠극이라는 책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임에 참여했던 사람 모두는 아니지만 일부는 천주교 서적에서 인생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고,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여,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이벽인데, 이벽은 개별적인 교리 연구에만 만족할 수가 없었고, 천주교 교리의 부족한 점을 해결하고자 북경에 사람을 수차례 파견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던 중에 자기 동료인 이승훈이 중국의 북경에 사신 행차로 따라가게 됨을 알게 되었고,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면 선교사를 만나서 천주교 교리를 좀 배우고,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 부탁을 받은 이승훈은 북경에 간 후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1784년 예수회 신부인 그라몽에게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은 다음, 수십 권의 서적과 성화, 성물을 가지고 귀국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이승훈은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게 됩니다. 이벽은 이 서적들을 넘겨받고, 조용한 외딴집에 가지고 들어가서 교리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 천진암 강학회에 참가했던 남인 학파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이승훈과 함께 친척과 친지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게 됩니다. 또한 정약용 형제들을 찾아가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고, 김범우를 비롯한 중인 출신들과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덕망이 높던 권일신 등을 입교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벽과 권일신 등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승훈에게 1784년 9월에 세례를 받는데, 이벽은 세례자 요한으로, 권일신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로 세례명을 정합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은 이후 지금의 명동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전례를 행하면서 신앙을 실천하는 신앙 공동체를 만들게 됩니다. 당시 양반이나 상민, 평민 등의 계급 의식이 뚜렷했지만 이 신앙 공동체는 서로가 교우라고 부르고 인간의 평등과 일부다처제를 타파하고, 기도문은 한글로 만들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선교사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이 우리 스스로의 힘에 의해 교회가 창설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창설된 직후 복음 선포에 앞장섰던 인물들을 말한다면 이승훈, 이벽, 권일신 등이었는데, 그 외에도 권일신의 제자인 이존창은 충청도 내포에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유항검은 전주에서 신앙을 전파함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탄생한 우리 나라의 천주교회는 창설 직후부터 탄압을 당하게 되는데, 1785년 을사년에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하던 중 추조금리에 적발되어 모두 잡혀가게 됩니다. 그러나 체포된 사람들이 대부분 양반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방면되었지만, 중인 출신인 김범우는 고문을 당하고 충청도 단양으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귀양을 살던 도중 김범우는 고문 받은 상처가 악화되어서 그곳에서 죽음으로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을사년 박해로 인해서 정부에서는 천주교 전교를 금하게 되었고, 한국 최초의 교회 박해로 기록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신자들은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조직을 더욱 다져 나가기 위해 1786년 가성직제도를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성직제도는 신품성사를 받지 아니한 신자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업무까지도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고해성사나 견진성사 그리고 미사의 집전은 신품을 받은 성직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당시 신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승훈을 교회의 으뜸가는 지도자, 즉 주교로 택하고, 그 외 10여 명의 신자들을 신부로 추대하여 미사와 고해성사 그리고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이들의 이러한 행위는 교회법상 올바른 일은 결코 아니었지만, 이 가성직제도를 만든 것이 교회의 조직을 갖추고, 또한 이로써 신도들의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고, 선교를 강화해 보고자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열심한 신앙심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 가성직제도는 1789년까지 계속 유지되었는데, 계속 하다보니까 조금 이상함을 느끼고, 문제점이 생기게 되자 이에 관해서 북경의 주교에게 문의를 하게 됩니다. 북경의 주교는 1790년에 가성직제도가 부당하다는 대답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라는 대답을 보내왔고, 세례를 제외한 모든 성사 집행을 금지시키고, 대신 선교사의 파견을 약속합니다. 그 이후 북경 교회를 통한 성직자를 모셔 오려는 노력이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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