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한국 교회사 4 (박해 (1830))
1831년 조선 신자들의 청원으로 교황청에서는 조선에 교구를 설정하였고, 파리외방 전교회에 소속된 브귀기애르 소 주교가 조선에 선교를 지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브귀기애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던 중, 사목지를 눈앞에 두고 중국 땅에서 병을 얻어 죽게 되고 2대 주교인 범 주교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836년 이후 조선에는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입국을 하게 되고, 조선의 교회는 이로써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들은 신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를 함으로 인해서 조선에서는 신도들의 숫자가 다시 늘어갔으며, 신자들의 신앙도 더 깊어지게 됩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또 한번 큰 박해를 하는데, 그것이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입니다. 이 기해박해의 원인 역시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와 같았는데 외적으로는 천주교를 사학으로 단정했기에 일어난 것이고, 내적으로는 남인 시파 안동 김씨가 벽파 풍양 조씨에게 정권을 빼앗겨 시파를 박해하는 중에 일어난 것입니다. 먼저 1839년 3월 초에 궁녀 박희순 등 수십 명과 정하상, 유진길, 범 주교, 정 신부, 나 신부, 신대보 등 200여 명이 순교를 하게 되는데, 범 주교는 전교회장 현석문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순교자들의 행적을 만들라고 해서 1842년에 “기해일기”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기해일기는 당시의 박해 상황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겨 중요한 역사 자료가 되었고, 이 기해일기 속에는 총 110명이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고, 1925년 79명의 순교복자 중 70명의 순교 복자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나중에 순교성인이 되는데 결정적 자료가 되었습니다. 또한 정약종의 아들인 정하상은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자신의 체포를 예감하고 “상재상서”라는 책을 지어서 자신들이 믿는 천주교가 나쁜 사교가 아님을 역사적으로 변호 하였고, 그 당시 유행하던 주자학의 허례허식을 논박했다가 정하상 역시 1839년 8월 15일 그의 동료 유진길과 함께 모반무도의 죄목으로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 상재상서에서 정하상은 유교의 사상과 윤리관을 통해서 천주교 교리인 천주의 존재, 천지 창조, 영혼론, 십계명, 상선벌악, 천주교와 불교의 비교 등에 대해서 설명을 했고, 아울러서 조선 유학자들이 오해하고 비난하고 있는 천주교의 신앙을 해명하고 옹호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해박해를 통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이제부터는 조정의 천주교 탄압은 단순한 국내 문제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한국인 성직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김대건과 최양업, 최 프란치스코 등을 선발하였고, 그들을 마카오에 보내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지만, 그중 최 프란치스코는 열병으로 도중에 죽고, 갖은 고생 끝에 김대건은 1845년 8월에 사제로 서품 되어 한국 교회의 최초 방인 사제가 되게 됩니다. 이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부유하고 지체 높은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영리하였기 때문에 모방 신부로부터 신학생으로 간택되었다고 합니다. 사제로 서품 되고 짧은 동안에만 사목 했지만, 김대건 신부는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남겨 주신 분이고, 순교를 통해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이었습니다. 김대건 사제는 1845년 10월에 금강 하구에 입국하여 전국을 누비면서 전교를 하던 중 1846년 병오교난 중 잡혀서 순교를 하고, 1925년 복자 위에 오르게 되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순교자 102명과 함께 성인 품에 오르게 됩니다. 또한 김대건 신부는 한국 교회의 모든 성직자의 주보가 되어 성직자들의 표양이 되신 분입니다.
다시 150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 정계는 1846년 철종이 즉위하고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게 됨에 따라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누그러지게 되고, 이로 인해 교회의 전교는 활발해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에 들어오고, 1849년에는 최양업 토마도 사제로 서품 되어 신도들을 위한 봉사 활동에 합류하게 됩니다. 최양업 신부는 산간에 흩어져 있는 신도들을 찾아다니고,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의 집전을 통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신자들에게 교리의 내용을 쉽게 알려주기 위하여 “사향가”를 비롯해서 “천주가사”를 지어 부르게 하였고, 이 천주가사는 신자들의 묵상 자료로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최양업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의 노력으로 인해 1850년 조선에는 신자가 11,00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는 사목활동 12년만인 1861년 6월에 주교에게 업무 보고를 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오는 도중에 급환으로 선종 하게 되고, 그의 유해는 배론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1857년 이후로는 푸르티에 신부가 충청도 제천의 배론에 성요셉 신학교를 설립하고 성직자 양성에 전념하였고, 1863년에는 조선에 천주교 신자가 20,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1858년부터는 조선에 교회 서적이 간행되고 주요 도읍에는 약국이 설립되어 병자와 고아들을 돌보는 사업까지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63년 안동 김씨 세도가 무너지고 풍양 조씨가 세력을 잡게 되었다가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대규모의 박해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병인박해로 1866년 병인년에 시작된 이 박해는 그후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박해를 통해서 8,000여 명의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말살 정책은 1868년 4월에 일어난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으로 인해서 더욱 굳어져 갔는데, 이 오페르트는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해서 그 유해를 미끼로 조선의 개국을 요구하려 했지만 유해를 도굴하던 중 발각되어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그 결과 주춤했던 박해는 다시 가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로 인해 처형당했으며, 그후 1869년과 1870년 2년 동안의 박해는 잠시 가라앉았으나 1871년 신미양요로 다시 치열해집니다. 그리고 대원군은 전국의 각 요지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1873년 그가 실각할 때까지 천주교에 탄압을 계속 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조건 교회는 근거를 잃고 처참하게 무너졌는데, 처형된 순교자만도 8,000에서 20,000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