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한국 교회사 3 (박해(1790-1840))

2008. 5. 4. 오후 4: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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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한국 교회사 3 (박해(1790-1840))

우리 교회는 1790년 북경 주교로부터 가성직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대답을 받았는데, 이 대답을 받은 한국 교회는 선교사를 맞이하게 될 기쁨을 지닌 반면, 조상 제사의 금지로 인해 일어날 문제 때문에 두려움도 동시에 갖게 됩니다. 그래서 조상 제사가 금지됨에 따라 양반 출신 신도들 중에는 상당수가 교회를 떠났고, 이에 반해 양반의 특권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과 중인 이하의 신분 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교회를 지도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1791년 전라도 진산이라는 곳에서 조상 제사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 진산 사건은 신해박해로 이어지게 되는데,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영세한 윤지충이라는 사람이 북경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림으로써 일어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박해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는데, 윤지충은 1791년 10월 26일 진산 관청에 자수하고 진산 순수인 신사원은 윤지충과 권상연에게 천주교에 빠진 이유를 묻고 배교를 강요합니다. 그렇지만 윤지충과 권상연은 천주교가 이단이 아님을 역설하고 배교 요구를 거절하자 1791년 12월 7일 이 두 사람은 사형장으로 끌려가 순교의 영광을 받게 됩니다. 양반 계급의 지도자들이 사망하거나 진산 사건으로 인해서 순교 또는 배교함으로 새로운 지도층으로 중인 계급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들은 최창현, 최인길, 지황, 강완숙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해박해의 소용돌이가 1793년에 이르러 조금 잔잔해짐에 따라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직자를 다시 모셔올 계획을 추진하는데, 윤유일과 지황 그리고 몇몇 신자들로 구성된 북경 파견 밀사단을 조직합니다. 이들은 1793년 조선 왕국의 사절단에 끼여서 북경으로 출발하였고, 북경 주교인 구베아 주교를 만나서 신해박해의 소식과 조선 교회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1794년 2월에 조선으로 떠나 보냅니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조금 지체되었지만, 1795년 1월 초에 한양에 무사히 주문모 신부는 도착함으로 해서 조선은 최초의 선교사를 맞이하는 기쁨을 안게 됩니다.

중국인 성직자로서 조선에 파견된 주문모 신부는 나이 어린 조선의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였고, 그의 노력과 신도들의 열렬한 전교활동으로 인해서 우리 교회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는데, 그 당시 신자들의 숫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때 신도들은 주로 경기도 지방과 충청도, 그리고 전라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당시 정부에서는 주문모 신부가 전교활동을 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강완숙을 비롯한 신도들의 보호로 주문모 신부는 계속해서 전교를 할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신자들은 교리 연구 단체인 명도회와 같은 신심단체가 생겨 서로 교리를 익히기도 하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노력들을 함으로 해서 더욱 신자들이 늘어가고 있었습니다(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이었는데, 이 정약종은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교요지라는 한글 교리서를 손수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집권층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일대 탄압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인데, 이 박해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려 했던 교회를 뿌리 채 뒤흔든 아주 큰 박해였습니다. 이 박해로 인해 주문모 신부는 순교를 하는데, 사실 주문모 신부는 중국으로 피신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피신했을 때 신도들이 더 큰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스스로 순교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또한 이 박해로 인해서 그 당시 교회를 이끌어 나갔던 신자들, 즉 정약종을 비롯해서 이존창, 최창현,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홍낙민, 권철신, 유항검, 강완숙, 이순희 등 수많은 신자들이 잡혀 서소문에서 목이 잘려 순교를 하게 되고, 정약전, 정약용은 고문에 못이겨 배교함으로써 귀양을 가게 됩니다. 또한 이 참혹한 박해를 본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황사영이 “황사영 백서”를 통해 박해의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이 신유박해는 지방으로 퍼져나가서 전라도 유황검 등 300여 명이 순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순 왕후는 토사교문을 내려 유학을 장려하고 천주교 근절을 명했지만 1804년 정순 왕후가 죽자 박해는 다시 뜸해졌고, 신도들은 다시 교회의 재건을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됩니다. 정하상이나 이여진, 신태보 등이 그 인물들이었고, 1801년의 박해 때 배교를 하고 귀양갔던 정약용도 1811년 이후 교회 재건 운동에 참여했다고 전해집니다. 성직자들을 모셔오기까지 30여 년간 여러 곳에서 많은 박해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지만 이들은 북경의 주교에게 밀사를 다시 보내고, 선교사의 파견을 간청했고, 로마 교황청에까지도 편지를 보내서 딱한 사정을 호소하면서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한 노력의 결과로 중국인 신부인 유방제를 1834년, 모방 신부를 1835년 맞이하게 됩니다. 조선 교구의 설정의 주역은 정하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정하상은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서 1816년 역관의 하인이 되어 북경에 들어가 성직자 파견을 청하는 등 10여 년간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면서 성직자를 맞아들이려고 애를 쓴 사람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황청은 조선 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편지를 통해 알고서 극동 전교에 파견되었던 파리 외방 선교회에게 조선 교회에 성직자 파견을 청하고 1831년 9월 9일에 교황교서를 통해 조선 교회를 북경 교회로부터 분리 독립시키게 됩니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북경 교회로부터 분리되고 조선 교구로 승격되면서, 소 주교를 초대 주교로 맞이하게 되지만, 이 소 주교는 조선 교회에 입국하지 못하고 만주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범 주교가 다시 2대 주교로 임명되어 1838년 상복으로 변복을 한 다음 입국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모방 신부와 유방제 신부가 이미 선교를 하고 있었고, 조선 교회는 주교님을 모셔옴으로 해서 교회 창설 54년만에 또 교구설정 7년만에 완전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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