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7월 10일 일요일
[연중 제15주일]“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25-37)
제1독서<그 말씀이 너희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30,10-14)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0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11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12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13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도 없다.
14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화답송시편 69(68),14와 17.30-31.33-34.36ㄱㄴ과 37(◎ 33 참조)
◎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 주님, 저의 기도가 당신께 다다르게 하소서. 은총의 때이옵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 주님, 너그러우신 자애로 저에게 응답하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를 돌아보소서. ◎
○ 가련한 저는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하느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
○ 가난한 이들아, 보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
○ 하느님은 시온을 구하시고, 유다의 성읍들을 세우신다. 그분 종들의 후손이 그 땅을 물려받아, 그분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곳에 살리라. ◎
제2독서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1,15-20)
그리스도 예수님은 15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복음<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10,25-37)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 (신명30,10-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11)
신명기 30장 15-20절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을 촉구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명기 30장 11-14절까지 마지막으로 율법을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때문에' 라는 뜻을 가진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작하는 본문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지키도록 요구하시는 율법은 지키기 어렵거나 일상 생활로부터 괴리된 낯선 것이 아님을 밝힌다.
여기서 '너희에게 명령하는'으로 번역된 '메차웨카'(metsaweka)는 '명령하다'는 뜻을 가진 '차와'(tsawa) 동사의 강조형 분사 능동태와 2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말로서, '너에게 명령하고 있는' 이라는 뜻이다.
분사형은 행동의 계속됨을 나타내기 때문에 여기의 '명령'은 과거에 모세가 내린 어떤 명령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계속 주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든 율법의 말씀을 가리킨다.
한편, '힘든 것도'로 번역된 '니플레트'(niphlleth)는 '능가하다', '특별하다'라는 뜻을 가진 '팔라'(phalla) 동사의 수동형으로서 '(이해하기) 어렵다', '놀랍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고 '너희에게'로 번역된 '밈메카'(mimmeka)는 '~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민'(min)과 2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전치사구로서 '너에게'라는 뜻이다.
따라서 '로 니플레트 히 밈메카'(lo niphlleth hi mimmeka)는 '그것은 너의 영역 밖에 있을 만큼 어려운 것이나 놀라운 것이 아니다'로 이해할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고 있는 명령 즉 율법은 그들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명기 29장 28절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감추어진 것은 주 우리 하느님의 것이지만, 드러난 것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것이니, 우리는 이 율법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즉 율법은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영구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It is not hidden from you).
그리고 '멀리 있는 것도'로 번역된 '레호카'(rehoqa)의 원형은 '라호크'(rahoq)인데, 거리적으로 이스라엘로부터 멀다는 의미보다는 이스라엘이 도달할 수 없을 만큼 율법이 결코 난해하거나 심오하지 않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표현이다.
따라서 신명기 30장 11절은 율법이 우리가 지키기에 너무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과 더불어 율법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전한다.
연중 제15주일 제2독서 (콜로1,15-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20)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시어 만물로 하여금 당신 자신과 화해하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하셨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평화를 이룩하시어'로 번역된 '에이레노포이에사스'(eirenopoiesas)의 원형 '에이레노포이에오'(eirenopoieo)는 '평화'를 뜻하는 '에이레네'(eirene)와 '행하다', '~되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포이에오'(poieo)의 합성어로서 신약에서는 이곳에서만 쓰였다.
그 의미는 '평화를 만들다'(make peace)이며, 본절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해의 구속사업을 통해 하느님과 만물 및 만물안의 모든 생명체 상호간에 평화를 이루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도 바오로의 다른 서신인 로마서 5장 10절과 에페소서 2장 15절과 16절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느님과 원수되었던 인류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으로 인해 하느님과 평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무죄하신 성자 그리스도께서 죄는 인간들이 지었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취하고 이 땅에 내려오시어 흠없으신 당신 몸을 자원으로 희생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본문의 전치사 '디아'(dia)는 '~을 통하여'(through)라는 의미로서 평화를 이룩하는 데에 십자가의 피가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무죄하신 당신 독생 성자의 피를 흘리게 하셔야만 했는가?
이것은 이 땅에 첫 사람의 교만과 불순종으로 계명을 어겨 죄가 들어오고, 모든 인류가 첫 사람안에서 죄를 지어 죽음으로 치닫게 된 이후로 그 죽음을 막는 유일한 원리가 바로 '피흘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 마음이 아프듯이,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는 계명을 어겨 창조주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며, 그 선성(善性)에 누를 끼치고 성성(聖性)을 모독하며, 공의(公義)를 거스려 일어나게 된 하느님 아버지의 의노는 당신과 위격과 레벨이 같은 하느님만이 풀어 드릴 수 있고,
죄는 인간이 지었기 때문에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속죄를 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이 원리는 하느님 아버지 당신 자신이 세우셨다.
즉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피가 그 생명으로 속죄하기 때문이다'(레위17,11; 히브9,22)고 선언하셨다.
구약 시대에 수없이 흘려지고 뿌려졌던 양과 송아지의 피는 해당 제사 그 한가지 죄에 대해서만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제사였지만(히브7,27), 저주의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리신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 단 한번으로 영원하고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여 죄사함 및 화해를 위한 더 이상의 피흘리는 제사가 필요없도록 만드신 것이다(히브10,10.11).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원문은 새 성경의 번역과 조금 다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된 모든 만물들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성혈의 구속 공로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셨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죄를 범한 인류와 화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간절한 희망이요, 기쁨이었다.
여기서 '화해시키셨습니다'로 번역된 '아포카탈락사이'(apokatallaksai)의 원형 '아포카탈랏소'(apokatallasso)는 끝마침과 완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포'(apo)라는 전치사와 그 자체로 이미 '화해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카탈랏소'(katallasso)의 합성어이다.
사도 바오로는 '화목하게 하다', '화해시키다'라는 의미를 전달할 때 주로 '카탈랏소'
(katallasso)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로마5,10; 2코린5,18.20).
그러나 여기 콜로새서 1장 20절과 22절, 에페소서 2장 16절에서는 '아포카탈랏소'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완전한('아포'; apo) 화해('카탈랏소'; katallasso)의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카탈랏소'보다 그 의미가 훨씬 강하다.
여기서는 죄를 범하기 이전에 가졌던 평화의 관계로 완전히 되돌아가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같은 강조형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과의 완전한 화해를 기뻐하시며 간절히 희망하셨던 것이다.
한편 '유도케센'(eudokesen)이라는 단어는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신다'는 뜻인데, 원문에는 콜로새서 1장 19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 새성경에는 '기꺼이'로 번역했다.
이 단어의 원형 '유도케오'(eudekeo)는 '잘하다', '좋다'라는 뜻의 부사 '유'(eu)와 '생각하다'(마태3,9), '여기다'(2코린11,6)란 뜻의 동사 '도케오'(dokeo)의 합성어로서 '좋게 생각하다', '기쁘게 여기다'라는 뜻을 갖는다.
즉 이것은 기대하는 것이 충족되었을 때에 행복해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낸다
(마태3,17; 갈라1,15.16).
이 단어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 인간과 다시 화해하게 되기를 얼마나 바라셨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느님의 이러한 바람이 그리스도의 육화(강생)과 십자가상 대속적 죽음을 가능케했다.

2022년 07월 10일 일요일
[연중 제15주일]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어느 겨울,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하러 가던 길에, 술에 취해서 쓰러져 있는 행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괜한 참견으로 일정에 방해를 받을까 봐 안타까운 마음만 지닌 채 그냥 지나치려는데, 오지랖 넓은 동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보세요. 경찰서죠? 출동 부탁드립니다.”
‘오지랖이 넓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으로는 ‘쓸데없이 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참견하는 면이 있다.’는 뜻인데, 통념으로는 남의 일도 자신의 일처럼 여기며 참견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 사람에게 꼭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사마리아 사람을 본받으려는 마음이 들기보다는, 왠지 사제와 레위인이 이해되고 때로는 그들을 변호하고 싶어집니다.
그때는 하느님께 드릴 제사와 성전 봉사 때문에 너무 바빴을 것이고, 시간이 여유로웠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요. 과연 그러하였을까요?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곳을 향하여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점점 지나치는 것이 많아지고, 참견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많아집니다.
손수건을 떨어뜨린 앞 사람에게도, 어느 집에 쌀이 떨어졌다는 말에도, 언덕을 오르는 할머니의 숨 가쁜 소리에도 도무지 무심합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잠시 멈추어 서고, 그냥 지나쳐 가다가도 마음이 쓰여 되돌아가는 선택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한 오지랖’,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착한 사마리안의 비유(영생)
복음(루카10,25-37)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 문자 그대로 율법(律法, 제사와 윤리)으로 읽었느냐? 율법의 실체인 진리(眞理)로 읽었느냐? 다시- 인간의 의로움을 위한 율법으로?, 하늘의 대속으로 거저 받는 의로움, 그 은총(恩寵, 은혜)의 복음으로 읽었느냐? 물으신 것이다.
(로마10,4) 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 마음, 정신, 힘,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면 당연히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율법(律法)으로는 불가능(不可能)하다’고 야고보서(2,8-10)는 말한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 이웃을,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유(比喩) 말씀으로~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强盜)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요한10,8)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强盜)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 진리이신 예수님 이전의 율법 자들이 도둑이며 강도들이라 하신 것이다, 곧 율법(제사와 윤리)을 열심히 지킨 그 인간의 의로움을 지켜라 강조하여, 율법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 그 진리를 헛되게 하는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로 얻는 하늘의 의로움을 받지 못하도록 빼앗아 버리는 도둑이며 강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강도를 만난 사람이 옷(의로움의 옷)을 빼앗긴 것이고, 그것이 죽음의 상태인 ‘초주검’인 것이다.
(1코린15,56) 56 죽음의 독침(毒針)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로마3,20)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자신을 돌아보라고, 알아들으라고 비유로 생명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 율법 자들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길 반대쪽으로 가버렸다. 그들이 나빠서, 못되서가 아니라 율법은 그 초주검의 사람을 도울 방법(길)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 가엾은 마음(스폴랑코니조마임- 慈悲),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을 비유(比喩)한 사마리아인이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 기름- 성령. 포도주- 계약의 피. 율법, 그 옛 계약으로는 돌볼 수 없는 진리(眞理)이신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새 계약의 피(血)다.
(마태26,28) (聖餐禮) 28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두 데나리온- 신. 구약을 뜻하는 것으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얻는 하늘의 용서, 의로움, 곧 하늘의 영원한 생명, 구원을 약속하고 있다.
(요한5,39)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골로2,14)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죄)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로마3,24) 24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1요한4,9)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앞 28절에서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마음, 정신, 힘,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람하면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타(異他)의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으로 다가오신 사마리아인의 자비(慈悲)를 받아라’다. ‘너도 그렇게 하여라. 받아라.’ 하신 말씀이다.
(1요한3,18)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 그리스도의 진리의 자비, 사랑을 먼저 받아야 그 구원의 자비(慈悲), 사랑을 이웃에게 주어 이웃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내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자비, 사랑이 너무 감사(感謝)해서 나에게 나타나는 현상(現象)이 이웃사랑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 마음 까지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결과인 것이다. 나는 그 이웃 사랑이 너무나 부족하기에 하늘의 자비(慈悲), 사랑을 더욱 깨달으려 매일 성경(聖經)을 묵상(黙想)하고 기도(祈禱)한다.
결론(結論)<책-황금률 중에서>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네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기에 앞서, 우선 강도만난 사람이 사마리아인을 만났기에 생명을 구했듯이 너도 사마리아인을 만나야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또 율법(제사와 윤리)주의 신앙을 열심히 하면 천국(天國)간다고 여기는 열심신자 일수록 초주검의 과정을 통해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음을 깨우쳐 주시려는 말씀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참뜻이다. -이상-
☨ 보호자 성령님! 저희 모두가 좋은 몫인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오늘 말씀이 다가오시어 기르치시고 의탁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연중 제15주일 복음.루카10,25-37)
너무 쉬우면서도 너무 어려운 것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고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손발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은 향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덕을 높이 쌓으려고 애쓰는 한 젊은이가 산골짜기에 있는 고승을 찾아가서 “스님, 이 고통스럽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참 지혜를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께서 “나쁜 일은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하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스님, 그것은 세살박이 어린 아이도 다 아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어서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세살박이 어린 아이도 다 아는 것이지만 여든 노인도 다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나쁜 일은 멈추고 좋은 일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해야 한다.’‘용서해야 한다.’,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이웃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손발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함으로써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아는 바를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실천하되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는 율법교사의 물음에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되묻습니다. 그러자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분명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행함으로써 아는 것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이어 율법교사는 자기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한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길을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을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길을 가던 한 사제가 그 사람을 보았으나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레위인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레인인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를 돕는 일을 도맡아보던 사람으로 하느님과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사제나 레위인은 아마도 그 사람을 도와주어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사람의 후광으로 내가 빛나지도 않으니 도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강도 맞은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 주고는 여관으로 데려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그를 간호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떠나갔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누굽니까? 당시 사제나 레위인등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마리아인을 사람취급도 안 하였습니다.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며 부정하게 살아간다고,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이라고 여겼고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돌보았습니다.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당연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묻자, 율법교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가10,3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답 안에는 아직도 사마리아인을 입에 담기 싫어하는 마음이 배여 있는 것입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 입니다.’ 하고 대답해야 했습니다. 자기가 못한 것을 대신 행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의 대답을 듣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풀어라!”
결국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러 모임을 다녀 보면 거기 모인 분들의 성향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서 색깔이 드러납니다. 많은 경우에 교육수준이나 여러 가지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과만 이웃으로 지내고 싶어 합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율법교사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아무런 이득도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어떤 처지와 상황 안에서도 서로 돕고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에게는 강도를 만난 사람이 외면하고 지나가도 될 ‘남’ 이었습니다. 사랑에 관해 많은 말을 해온 그들이 정작 사랑을 증명해야 할 순간에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입으로 선포된 사랑이 위선과 거짓으로 판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게는 결코 그가 ‘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행할 수 있는 모두를 행했고, 줄 수 있는 전부를 주었습니다. 물질뿐 아니라 희생과 헌신으로 사랑의 마음을 모두 다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사랑은 말보다 행함에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주는 사랑이 진실한 것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으로 한정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복이지만 누구에게나 좋은 이웃이 되어 주기를 작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스승과 제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스승께서 제자에게 “밤의 어둠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아온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가 “동창이 밝아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아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제자가 고민하다가 “창문을 열어 모든 사물의 형체를 구별할 수 있으면 새 날이 밝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스승께서 다시 “아니니라” 하셨습니다. 제자가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스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너의 형제로 보이면 그때 비로소 새날이 밝아온 것이니라.”
우리가 아무리 사랑을 소리 높여 외쳐도 이웃을 형제로 여기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스쳐 지나간 사람, 사마리아 사람의 시선이 어디 있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나의 이웃이 누구냐?’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찾지 말고 내가 모두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노력하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그 안에서 반드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된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열 가지를 아는 것에 만족하기보다 알고 있는 한 가지를 실천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소 당신의 모두를 내어줌으로써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셨고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해야 합니다. 환자방문이나 봉사활동, 재능기부 등 이웃을 향한 마음이 활짝 열리기를 희망합니다. “행동은 입보다 크게 말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이웃을 향한 구체적 사랑의 표현을 확실히 하는 하루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무엇인지 아시죠?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이지 말고 민첩하게, 후회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1독서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30,11.14).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생명의 말씀(2022년 7월 10일(다해 연중 제15주일)
이웃
‘이웃’이라는 단어는 ‘가까이 사는 집 또는 그런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이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제1독서(신명 30,10-14)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관계 안에 머물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 곁에 있는 이웃처럼 의인화되어 묘사됩니다.
제2독서(콜로 1,15-20)는 ‘그리스도 찬가’라고도 불리는데, 심오한 구원과 신앙의 진리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리스도는 세상 창조의 원리로 소개됩니다. 만물은 “그분 안에서 …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으
며,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표현됩니다.
그리고 성자의 십자가 죽음은구원의 충만함을 완성했기에,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다는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을 듣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교회 공동체 안에 함께 하시는 이웃처럼 이해됩니다.
복음(루카 10,25-37)은 율법 교사와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 즉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뭐라고 적혀있는지 되묻습니다. 그러자 율법 교사는 신명기 6장 5절(“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과 레위기 19장 18절(“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을 인용합니다.
이어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문에 예수님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어떤 유다인의 이야기를 비유로 드십니다.
당시 사회적 명망이 높았던 사제와 레위인은 죽음 직전에 이른 동족을 보고 모르는 체하지만, 유다인들이 평소 원수처럼 여겼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극진한 대우와 치료를 해줍니다.
이 대목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0,33)라고 묘사합니다. 이처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웃은 상대방에게 연민을 느끼고 아픔에 공감해주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사회·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시대를 살다 보니 심리적으로 아픈 이웃을 봅니다. 층간소음, 분노조절장애, 피해망상증, 나르시시즘, 가스라이팅 등에 사로잡힌 이웃 때문에 일상에서 ‘생지옥’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십니다. 구약의 백성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늘 신앙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을 보내며 내가 속한 신앙 공동체에서 나는 어떤 이웃으로 살고 있는지, 아픈 이웃을 향해 연민과 공감과 자비를 얼마나 품고 있는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김상우 바오로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2022년 07월 10일 [연중 제15주일]
“우리는 나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복음(루카10,25-37)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 성경(聖經) 전체, 율법 안에 들어있는(루가24,27) 구원의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율법교사의 질문이다.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 그렇게 못하면, 영원한 멸망, 죽음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마음, 목숨,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성경은 없다고 하신다.(로마3,9- 코헬7,20 시편14,1- 외 다수)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를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느님도 이웃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 정신,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큰 계명에는 그 하느님의 뜻이 숨겨져 있다. 곧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야할 존재라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사랑을 담는 것,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 나에게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을 주기 때문이다. *제사와 윤리, 그 율법의 자기 의(義)를 빼앗긴,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자신이 있으니 알려 달라’는 것이다. 율법교사라는 사람이 자신이 사랑해야할 이웃을 몰라서 묻는다? 질문 자체가 모순(矛盾)이다. 예수님을 시험(試驗)하려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빼앗기고)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 율법 자들은 모두가 도와주지 않았다.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다. 제사를 드려야할 사제(司祭), 레위인은 피를 흘리는 사람을 만지면 부정(不淨)하게 되어 제사(祭祀)를 드릴 수 없기에 도와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율법의 의(義)의 한계이다. 곧 강도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같이, 율법(제사와 윤리)신앙 또한 영(靈)이 초주검이 된 것임을 비유하신 말씀이다.
(요한10,7-8)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强盜)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 ‘십자가(十字架)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이신 그리스도’보다 먼저 온, 곧 옛 계약, 그 율법(제사와 윤리)의 의인(義人)들이 강도(强盜)인 것이다. 왜? 율법으로는 죄(罪)를 알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로마3,20)
율법을 열심히 지킨, 그 행위의 의(義)는 죄(罪)를 해결(解決)할 수 없어(야고2,10) 하느님의 심판(審判)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로마10,1-3)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 가엾은 마음(스폴랑코 니조마임-慈悲), 자비의 마음은 주님ㅇ늬 마음을 뜻한다. 곧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며, 그만큼 예수님을 싫어했던 당신 자신을 사마리아인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 강도만나 초주검이 되지 않았다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 유대인이다. 곧 우리에게 시련, 고통이 없었다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않았을 우리의 모습이다. 그것을 깨달아라 하심이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기름(성령), 포도주(피의 새 계약) 두 데나리온(구약과 신약), 여관(교회). 모두 성경(聖經) 전체에 들어있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眞理)를 모형(模型)한다. * 초주검이 된 사람을 비용을 들여 끝까지 돌보시어 살리시는, 곧 율법의 의로움이 살리지 못하는 주검(死)을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의 값으로 살리신 것이다.(에페1,7)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 율법교사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는 질문에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로 바꿔 물으신다. 사랑할 대상에서 사랑 받아야할 대상으로 바꿔 물으신 것이다. 곧 하느님의 뜻인 구원자 주님을 깨닫지 못하고 시험하려 했던, ‘네가 사마리아인의 이웃으로 그의 도움을 받아야 될 강도만난 자야’ 하신 것이다. 사마리아인(그리스도)의 도움을 받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강도(强盜)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이 사마리아인의 자비(慈悲)를 받았듯이 너도 가서 그렇게 그의 자비를 받아라’ 하신 것이다. 곧 ‘율법교사야, 너의 율법, 그 옛 계약의 너의 의(義)를 부인(否認)하고, 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의 의(義), 자비(慈悲)를 받아 살아나라’하신 것이다.(로마3,20-24 히브10,8-11 참조)
(1요한5,11) 11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영원한 보호자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