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7월 03일 일요일
[연중 제14주일]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루카10,1-12.17-20)

제1독서<보랴,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이사66,10-14ㄷ)
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를 두고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11 너희가 그 위로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리라. 너희가 그 영광스러운 가슴에서 젖을 먹어 흡족해지리라.
1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13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14 이를 보고 너희 마음은 기뻐하고 너희 뼈마디들은 새 풀처럼 싱싱해지리라. 그리고 주님의 종들에게는 그분의 손길이 드러나리라.
화답송시편 66(65),1-3ㄱㄴ.4-5.6-7ㄱ.16과 20(◎ 1)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하느님께 아뢰어라. “당신이 하신 일들 놀랍기도 하옵니다!” ◎
○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너희는 와서 보아라, 하느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이루신 놀라운 그 위업을. ◎
○ 바다를 바꾸어 마른땅 만드시니 사람들은 맨발로 건너갔네. 거기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기뻐하네. 그분은 영원히 권능으로 다스리신다. ◎
○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모두 와서 들어라. 그분이 나에게 하신 일을 들려주리라.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당신 자애를 거두지 않으셨으니,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
제2독서<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갈라6,14-18)
14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15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16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
17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18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루카10,1-12.17-20)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022년 7월 3일 연중 제14주일 제1독서 (이사66,10-14ㄷ)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 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12-13)
이사야서 66장 12절은 주 하느님께서 회복된 예루살렘에 강물같은 평화를 넘치게하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본문에서 '예루살렘에'에 해당하는 '엘레하'(elleha; to her)는 대상을 나타내는 '엘'(el)이란 전치사와 여성 3인칭 단수 목적격 접미어가 합성된 형태로 되어 있다.
그 예루살렘에 평화가 넘치게 하시는 분은 '내' 즉 본문의 화자인 주님이시다.
이러한 사실이 '히느니 노테'(hinni noteh; behold I will extend)를 통해 강조되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 '보라, 내가 펼치고 있다' 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펼치고 있는 주 하느님께서 주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구문이다.
특히 '노테'(noteh; I will extend)는 '펼치다', '뻗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나타'(natah)의 능동태 분사로서, 임박한 미래 혹은 현재 진행의 의미를 나타낸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펼치시는 것은 강물같은 평화이다. 이 평화 즉 '샬롬'(shallom)은 부족함이 전혀 없이 온전히 채우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충족함', '평화'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본문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샬롬'(shallom)은 물질적인 측면에서 예루살렘의 번영이라는 차원을 넘어 영적인 측면에서 하느님과 회복된 관계로 인해 하느님께서 시온(예루살렘)에 허락하시는 평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메시야의 인류 구속 사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를 예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장차 모든 성도들이 주님께서 메시야의 인류 구속 사업을 통해 거저 주시는 은혜로 그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을 보여준다.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 흐르는 시내처럼'
본문의 예언은 이사야사 61장 7절의 후반절과 일맥상통하는 예언이다. 여기서 '시내처럼'에 해당하는 '케나할'(kenahal; like a stream)의 어근 '나할'(nahal)은 원래 우기 때에만 흐르다가 건기 때가 되면 완전히 말라 버리는 와디(wadi)를 의미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하천이 언제나 넘쳐흐르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예언된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방 여러 민족들의 영광을 끊임없이 넘쳐 흐르는 시내처럼주신다는 것은 회복된 예루살렘에 이방 여러 민족들의 재물들이 끊임없이 공급되게 하실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은 예루살렘 귀환 이후에는 부분적으로만 성취된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를 통해 이것은 점점 더 성취되고 있다.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본문은 이사야서 60장 16절과 일맥상통한 예언으로서, 문자적으로 '너희들이 옆으로 안겨서 젖을 빨 것이며, 무릎에서 즐겁게 놀 것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주님의 백성이 주님 대전에 불순종하고 이방 민족들을 의지하여구원을 얻으려고 애썼을 때에는 오히려 이방 민족들의 약탈을 당하고 유린을 당했다.
하지만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게 되면, 하느님께서는 과거 그들을 수탈하게 했던 이방 민족들로 하여금 그들을 섬기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이 이방 민족들의 도움을 얻어 성장할 뿐만 아니라, 그 무릎에서 뛰놀 것이라는 예언은 민족들이 이제 더 이상 위협적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을 암시한다.
'귀염을 받으리라'에 해당하는 '테샤오샤우'(theshaoshau; be dandled)의 원형 '샤아으'(shaah)는 이사야서 11장 8절에서 회복된 메시야 왕국에서의 평화의 상태를 예언하는 단어, 즉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미는 모습을 그리는 단어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매우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모습을 강조한다.
회복된 메시야 왕국에서는 독사가 젖먹이 어린 아이에게 더 이상 위협적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 위협적인 존재였던 민족들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을 '샤아으'(shaah)라는 단어가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이사야서 66장 13절에서 '위로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나함'(naham; comfort)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어에서 3이라는 숫자는 7이라는 숫자와 더불어 완전함을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위로하다'는 단어가 거듭 세 번이나 사용된 것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주실 위로는 충분하고도 완전한 위로라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이사야서 후반부인 40장부터 66장까지에서 모두 12구절에서 14회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빈도는 전반부와 중반부라고 할 수 있는 1장부터 39장까지에서 모두 3구절에서 3회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이사야서 후반부가 전반부와 다르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다 더 강조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본절에서 주님의 위로는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는 것에 비유된다.
여기서 '자식을'에 해당하는 '케이쉬'(keish)의 어근 '이쉬'(ish)는 어린 아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성한 한 남자를 지칭하는 단어이다(창세2,23).
어머니가 어린 젖먹이를 위로하는 것은 다분히 신체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장성한 아들을 위로하는 것은 영적이며 정신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그런 차원에서 주님의 위로하심이 이와 같다는 것은 장차 예루살렘의 거주민들에 대한 위로가 영적이며 정신적 측면의 위로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위상을 회복하여 그 안에 거주하는 자들은 더불어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2022년 07월 03일 일요일
[연중 제14주일] 오늘의 묵상 (김인호 루카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지명하시어 당신께서 가시려는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힘겨울 때마다 “둘씩” 짝지어 보내시는 예수님을 원망하며 호소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효율면에서나, 신자들에게 주는 부담의 차원에서나 혼자가 낫지 않을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둘씩 짝지어 보내신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는 심부름꾼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만 하거나, 마술사처럼 그럴듯한 기적을 보여 주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동료와 나누는 관계 안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군중은 제자들의 행동과 말투뿐 아니라 그 둘이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느낍니다.
혼자 있을 때는 빛이 나지만 둘이 있을 때 빛을 내지 못한다면, 기적을 일으키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할지라도 진실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면 함께 살아가는 모습에서 활력과 생명력이 넘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더 큰 진정성을 얻게 됩니다.
복음은 화려한 말이나 신기한 행동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이와 함께 만들어 가는 일상의 작은 사랑을 통하여 선포되는 것입니다.
‘성인 옆에 순교자 나고, 신심 깊은 부인 옆에 냉담한 남편이, 열심인 사제와 수도자 옆에 빈자리만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둘씩 짝지어 보내신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리며 부부와 동료, 본당 공동체 모두 저마다 함께 묶여 파견된 제자임을 기억합시다.
(김인호 루카 신부)
-s.jpg)
생명의 말씀(2022년 7월 3일(다해 연중 제14주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오늘복음을 묵상하며 선교(missio)의 본래적인 의미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또한 ‘열심한 신자들’에게서 전교(傳敎)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의(dogma) 아래 신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개종(改宗)시켜 교세를 확장하는 것이라는 개선주의적 교회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선교의 주도권은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선교의 본질적 내용인 복음 선포(κƞρυγμα) 안에는 이미 하느님의 구원 위업이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이 모든 인간의 마음과 온 세상 안에 약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통하여 이룩하신 이 구원을 모든 인간에게 무상의 선물로 나누어 줄 당신의 일꾼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할 때가 되었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요한 4,35-38)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도로서 실존은 ‘나는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되었다.’는 신원 의식입니다.
사도(使徒)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지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대리자(in persona Christi)라고 하겠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직무는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성제 안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잘 드러납니다. 모든 성사 거행을 보이지 않게 주재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주교나 사제는 그분을 대신하여 모임을 주재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1348항)
제가 잘 아는 방송작가님을 통하여 깨닫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연극이나 드라마나 영화를 관람할 때 우리의 주된 관심은 아마도 탤런트 같은 배우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연기자들은 작가가 쓴 희곡 대본을 잘 이해하고 소화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신의 몸과 전 존재 안에서 온전히 체현(體現)할 때 훌륭한 주인공이 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작가의 높고 고상한 이데아와 배우의 연기가 하나가 될 때 불후의 명작이 이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진정한 나’를 담고 드러내는 것이 인격(persona)인데 신약성서의 언어인 희랍어는 이를 휘포스타시스(ׯπנστασιօ)로 쓰며 그 뜻은 연극배우가 쓰는 가면(假面)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함은 하느님의 광대무변한 사랑과 구세경륜이 우리를 재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오늘 제1독서에서 잘 보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갓난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돌보시는 어머니의 심정과 같기에 말입니다!(이사 66,11)
구요비 욥 주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연중 제14주일(루카10,1-9)
비겁함의 영이 아닌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우리 안에 주셨다.
(루카10,1-9)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 몸소 가시려는 곳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셨다는 것은, 세례자 요한의 역할, 그 일을 하라고 보내시는 것이다.
(루가1,76-77) 76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77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요한1,23)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 제자 둘, 각자의 생각이 아닌 주님의 뜻 그 길, 곧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대속,그 구원의 기쁜 소식(복음)을 한마음으로 선포하라고 보내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 주님의 길을 구원의 진리로 소리를 내면 되는 것이다. 그 복음의 소리를 듣고 받는 이들이 믿음으로 구원의 열매를 맺도록 시는 분은 늘 함께하시는 주님의 영, 성령이시다.(마태20,28 요한14,26참조) 또한 그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얻는 구원, 그 새 계약의 증인이시다.(히브10,15-18)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 일꾼들, 그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또 다른 일꾼, 곧 하늘의 일꾼, 성령을 청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수확할 수 있는 실력(능력)이 못 된다는 것이다. 곧 누가 참 믿음인지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태13,24-30. 39참조)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 박해, 핍박을 각오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들의 칭찬, 대우 같은 것을 받을 생각을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 사람들의 힘,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또 사람의 방법, 길(道)로도 하지 말라고 하신다.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 인간들의 평화, 그 이야기하지 말고 먼저 주님의 平和를 주는 그 기쁜 소식, 福音을 이야기하라 하신다.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 필요 이상으로 대접 받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신다.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 당시에 잘 모르는 집에서는 식사를 하지 않았답니다. 부정한 재료로 한 음식을 줄까봐, 그러면 율법을 어기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관습을 깨라고 하신 말씀이다.
(사도10,13-15) 13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4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 그러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 번째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1티모4,4) 4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다 좋은 것으로, 감사히 받기만 하면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 예수님의 말씀대로 율법의 관습(慣習)을 부수어 고쳐준 것이다. 율법에 묶여 죄의 용서도 모르고 法 지킴의 그 무거운 짐 같은 신앙으로, 마음이 짓눌려 고생하는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그래서 하늘의 평화, 안식을 살도록 하늘의 대속, 그 진리(생명)의 복음 선포로 고쳐준 것이다.
오늘 독서의 선포, 소리로 치유를 받고자 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우리의 생명(구원)의 약속이 있다고 전하고, 그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 평화가 내리신다고,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재의 영을 주셨다고 하신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힘과 사랑과 절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도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주기 위한 것으로,(신앙 진리는 영생, 구원을 주는 십자가의 대속, 그 길)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한 것이고,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창조이전에 *약속하신 것이라 전한다.
영원히 변치 않는(변할 수 없는) 그 하느님의 말씀, 약속이 하느님 나라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의 그 가까이(엥기켄-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이미 와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깨닫고 믿었을 때 하늘나라를 미리 살 수 있는 것이다.
(히브4,2-3) 2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하느님나라)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 제사와 윤리의 그 자기 의로움의 신앙으로는 절대 누리지 못하는 하느님나라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 그 십자가의 죽음, 그 의로움을 생명, 구원의 진리로 믿고 의탁했을 때 누리는 자유와 안식, 곧 하느님나라다.
(골로1,13)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야고1,25)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잃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 천주의 성령님! 우리 모두가 十字架의 福音, 그 완전한 자유의 법에 머무는 그 實行으로幸福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저희가 의탁합니다.~~~아멘!!!
연중 14주일 복음 (루카10,1-12.17-20)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1~3)
시나이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에는 제자들의 수가 70인으로 되어 있지만, 바티칸 사본과 베자 사본 등에는 72인으로 되어 있어 파견받은 사람의 수효를 확정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70이나 72라는 숫자는 문자적 의미 외에도 상징적이며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
70은 유대인들이 거룩한 수로 여기는 7에 충만한 수의 의미를 갖는 10이 곱하여진 숫자이다. 그리고 72는 12의 6배, 즉 12사도의 6배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당시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의 실제적인 수효임과 동시에 앞으로 모든 믿는 이들에 의해 온 세상에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임을 상징하는 의미도 지닌다(창세10장; 창세46,27; 민수11,16~25참고).
또한 루카 복음 10장 1절에 72인을 수식하고 있는 '다른'이라고 번역된 '헤테루스'
(heterous)는 형용사로서 명백히 12명의 사도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둘씩 보내시며'에 해당하는 '아페스테일렌 아우투스 아나 뒤오'(apesteilen
autous ana dyo; sent them two by two)에서 '보내시며'로 번역된 '아페스테일렌'
(apesteilen)는 '파견하다'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apostello)의 부정과거형으로써 12사도의 파견 때에도 사용된 같은 단어이다(루카9,2).
이것은 보냄을 받는 72인의 제자들이 12사도와는 확실히 다른 별개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이유'나 '목적', '권한'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둘씩'에 해당하는 '아나 뒤오'(ana dyo; two by two)의 의미는 아마도 서로돕고 격려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마르6,7; 코헬렛4,9), 그들의 사명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기에,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 율법의 요구를(신명19,15; 민수35,30)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갑작스런 도래와 함께 그때 올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의 준엄함에 대해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루카12,12)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직접 전해 듣고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가진 고을들이 그렇지 못한 소돔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심판의 엄정섬을 전제하고 급격하게 온다면, 시급하게 선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추수하는 행동은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모으는 종말론적인 과업을 뜻한다.
여기서 '수확'에 해당하는 '테리스모스'(therismos; harvest)는 '수확' 그 자체뿐만 아니라 수확의 대상인 거두어 들여야 할 곡식 및 수확의 과정을 의미할 때도 사용된다.
무르익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수확은 농경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주제이다.
하지만 '수확'이란 예수님께 있어서 하느님의 나라의 여러 국면들을 설명하는 좋은 소재였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일 소지를 미리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확을 기다리는 완전한 무르익은 곡식과도 같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따라서 여기서의 예수님의 명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로 빨리 들어오게 하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루카 복음 10장 2절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시급한 데 비해서, 이 일을 몸소 행할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안타까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다.
또한 지금 파견을 받고 있는 일흔두 제자들의 책임이 중대하다는 사실도 강조하고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다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인에게 또 다른 일꾼들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로 번역된 '데에테테'(deethete; ask; pray)는 단순히 '요청하다'는 의미 이상의 '기도하다', '간구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테오마이'(deomai)의 부정 과거 명령법으로서, '너희들은 간구하라'는 매우 간절하면서도 강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천국의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할 당시의 그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시는 주님의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말씀이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사실은 루카 복음 10장 3절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0장 16절에는 제자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양'('프로바타'; probata)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여기서는 '어린 양'('아렌'; aren; lamb)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사가보다 이 단어를 통해 제자들의 '연약함'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양은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이리에게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짐승이다.
또한 '양'이 착한 것의 상징이라면, '이리'는 악한 것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양과 같은 제자들이 이리 떼와 같은 세상의 악한 세력들과 영적 싸움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가운데로'에 해당하는 '엔 메소'(en meso; among)라는 전치사구는 이미 그 자체로 '가운데'라는 뜻이 있는 '메소'(meso)와 '~안에'라는 뜻의 전치사 '엔'(en; in)이 결합되어 '한가운데 속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어린 양과 같이 연약하고 착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교하기 위해 험악하고 공격적인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복음 전파자들은 험하고 공격적인 세상 속에서 마땅히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태10,16).
2022년 07월 03일 [연중 제14주일]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복음(루카10,17-20)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 ‘주님의 이름’ 때문이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 ‘악(惡)의 힘을 억누르는 권한(權限)’, 주님의 이름을 받은, 곧 주님의 말씀의 권한을 받은 것이다.
(루가5,24)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 중풍을 고치심이 ‘죄의 용서의 권한’이라 하신다. 곧 우리의 머리이신 주님의 말씀대로, 명령대로 그분의 지체(몸)인 우리가 올바로 움직이지(살지) 못한 그 죄를 머리이신 주님께서 지체들인 우리의 잘못(죄)을 가져 가셨기에 용서의 권한이 있으신 것이다. 그 권한으로 용서(容恕)하신 것이다.
(마태8,16-17) 16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충 이사53장 참조)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구원에 더 기뻐하라는 말씀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信仰)이며 평화, 구원이다.
(2코린4,17-18. 5,1.4-7) 17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18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5,1 우리의 이 지상(보이는)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보이지 않는)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4 우리는 이 천막 속에 살면서 무겁게 짓눌려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천막을 벗어 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죽을 것을 생명이 삼키도록 말입니다. 5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6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7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늘의 은총, 진리, 영광, 우리의 구원이시다.
(요한1,4-5.9.11-12.14) 4 그분(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세상)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세상)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주님의 이름으로 받은 권한은 이 땅(세상)인 내 삶이 빛이 아니라 어둠임을, 곧 보이는 세상의 힘의 원리가 보이지 않는 진리, 평화, 생명이 아닌 죄, 죽음임을 인정하는 그 자기 버림, 부인(否認)의 힘이다.
평화(에이레네 eirēnē)는 ‘두마리 소가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뜻한다. 곧 인간들의 뜻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뜻, 길로 동행(同行)할 때, 평화다.
☨보증으로 늘 함께 하시는 천주의 성령님!
우리가 열심히 지은 집, 보이는 이 어둠의 집을 부인하게 하시어, 아버지께서 외아들 그리스도 위에 세우신 집, 그 빛(평화)의 영원한 집에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의 마음과 발길을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