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기록목적
글. 임동선
"성경을 탐구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함이니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거하느니라"(요 5:39).
들어가는 말
책의 선택이나 책을 읽는 방법은 대체로 그 책을 쓴 저자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의 목적을 이해하려면 저자가 누구인가를 파악해야 할 것이며 저자가 전공한 분야, 혹은 관심갖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컴맹의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다루는 방법을 소개한 것처럼 교육적인 목적을 가지고 썼는가? 소설이나 주간지처럼 흥미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썼는가? 혹은 어떤 시나 수필처럼 자기 인생을 진지하게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썼는가? 아니면 논문들처럼 연구결과,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썼는가? 등 무슨 목적으로 쓴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을 알 때, 우리는 그 책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책을 잘못 선택해서 지루하게 읽는 곤란도 당하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책을 선택하는데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 책을 쓴 사람이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가급적 우리는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 권위자가 쓴 책들을 읽음으로서 더 정확하고 귀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닥치는대로 읽습니다. 이야기에 재미를 느껴 창세기부터 읽던 사람이 레위기에 오면 막혀서 중단하기도하고 의무감으로 읽던 어떤 사람은 간신히 몇 년만에 성경을 통독하나 그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쓴 목적은 성경을 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의 저자가 누구이며 그 저자가 성경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 곧 기록 목적이 무엇인지를 진술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성경을 대하는데 도움되었으면 합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다양함
"네 부모를 공경하라 또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말들이 성경 안에 있기 때문에 읽습니다. 예수님을 몰라도 잠언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해도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고린도전서 13장을 베껴 쓸 줄 압니다. 그것은 분명 달콤하고 좋은 말로서 다가올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읽듯이 그렇게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달걀에는 노른자위와 흰자위가 있습니다. 생명은 노른자위에 있고 흰자위는 단백질로 이루어져 노른자위에게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고 단지 듣기 좋은 말만 골라 읽는 사람들은 흰자위의 경험밖에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경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 한 두 번이라도 나간 사람이라면 성경 이야기 한 두 가지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따먹은 이야기, 노아의 방주 이야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 모세가 홍해 바다를 가른 이야기, 다윗이 골리앗을 싸워 이긴 이야기 등등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거나 글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 흥미거리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어린이들을 위해 편집된 성경책은 동화책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심풀이 땅콩처럼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책이 아닙니다. 전설의 고향도 아닙니다.
요즘에는 성경통독을 위한 테이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을 속독하는 모임이나 집회도 열립니다. 사람들은 "나도 성경책 한 번 뗏다"라는 성취감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체크해 가며 읽습니다. 어떤 목사는 부흥회 팜프렛에 강사로서의 자신을 소개하면서 성경 일천독(一千讀) 한 것을 자랑스러운 경력처럼 적어놓았습니다. 성경은 그런 경력을 만들어 주기 위해 있는 책이 아닙니다. 아울러 많이 읽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기록 목적을 깨닫고 바로 읽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여러가지 자료들로 충만합니다. 예를 들면 노아의 방주에 나타난 배를 짓는 규격이 있습니다(창6:16).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크기를 말씀하시면서 길이 300규빗, 넓이 50규빗, 높이 30규빗(1규빗은 45-50cm)으로 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제시된 대로 30:5:3(길이:넓이:높이)의 비율로 배를 지으면 가장 안정성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박사는 성경에 나타난 먹어도 좋은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뽑아내어 인간의 건강한 식생활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육의 눈으로 성경을 파는 사람은 절대 진리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른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요 6:63).
또 누가 성경을 읽습니까? 기독교를 대적하기 위해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루 웰리스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그의 친구 잉거솔과 함께 기독교를 꾸며낸 이야기 곧, 신화(神話)로 간주하고 기독교의 이야기를 없앨 목적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2년에 걸친 연구 끝에 그만 "나의 주 나의 하나님!"하며 크게 울부짖게 되었습니다.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후, <벤허>라는 소설을 쓴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허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읽은 많은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려다가 오히려 복음 증거자가 된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도구로 성경을 이용합니다. 성경의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닌데(벧후 1:20), 많은 이단들이 성경을 자기들의 주장에 맞추어 오용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에서 <평화>나 <사랑>, <일치(우리는 하나라는 개념)>란 말 등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셈은 거짓 종교로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의 <코란>은 모세오경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신흥 이단 종파들에서는 성경에 제시된 메시야가 바로 그들의 교주임을 선전하였습니다. 그 무리의 교주는 자칭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바로 말세에 미혹케 하는 영을 받아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사탄의 자녀들입니다.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거듭나지도 못한 채, 성령의 인도하심보다도 그들의 철학적 기초 위에서 성경을 해석하므로 성경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본 의도에서는 너무나 먼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돈벌이가 잘 되거나 복을 비는 요술주문서(妖術呪文書)정도로 이용합니다. 바이블 코드라는 것도 나와서 성경을 가지고 장난쳤습니다. 별에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의문에 매인 사람들
더러 보면, 기독교 신앙에 순종하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가히 신앙적인 모습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할 때에는 구약의 율법이 풀리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의문의 법을 그대로 지켜야 할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산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적힌 글자 그대로 의문(儀文, letter, 글자라는 뜻)에 따라 산다는 게 아닙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율법 조문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으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for the letter killeth, but the spirit giveth life, KJV)"(고후 3:6).
"이제는 우리를 붙들던 율법 안에서 우리가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건짐을 받았나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율법 조문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7:6).
복음이 온 후로, 의문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의 사람이 율법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문자대로의 율법은 복음의 사람을 얽어맬 수 없고, 복음의 사람은 오직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갈 5:18).
또한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실체들을 보여주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그림자인 율법은, 지키느냐 마느냐에 대한 실행의 문제에 있어서 그 효력을 다 했습니다(히10:1, 히9:24).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이 없습니다. 물론 율법의 윤리적인 면과 일치된 어떤 삶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돌에 새긴 그 법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기록한 주님의 성령의 생명의 법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을 의지하는 것으로 의문을 따라 살던 유대인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의 법으로 살지 유대인처럼 행위의 법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고수하며 예수님을 대적했던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모세의 말을 믿었더라면 또 내 말을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나에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 모세가 기록한 성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구약을 율법과 선지서로 나눈다면 율법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모세오경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모세 오경을 읽으면서 <예수>라든지 <그리스도>라는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읽다가 지치는 레위기 안에서도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 오경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누구인가?
성경은 약 160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기록되고 보존되어 온 책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다양합니다. 약 40여명에 이르는 그들 중에는 왕(다윗-시23편, 솔로몬-잠1:1)이 있었고 목자(모세/출3:1, 아모스/암1:1)가 있었으며 어부(베드로, 요한/마4:18-22), 의사(누가), 세리(마태), 총리(다니엘/단6:1)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시대마다 단행본처럼 나타났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을 통해 완성되는 시점, 곧 마지막 기록자인 사도요한 때에 가서, 그것은 66권의 전집처럼 되었습니다. 오늘날 서점에 가서 단행본을 임의로 골라 66권을 추려본다면 그 내용이나 주장은 각기 다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동시대의 것일지라도 서로 다른 의견들을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글을 기록하는 재료에 있어서, 혹은 문체에 있어서 조금씩 시대와 환경과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변함없는 목적과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 책을 기록한 저자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딤후3:16)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도 합니다(롬3:2).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한 것이라는 예들을 성경의 증거들을 통하여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렘15:1).
"주가 말하노라"(렘15:3).
"주가 말하노라"(렘15:6).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렘15:19).
"주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렘16:1).
"주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렘18:1).
그러나 성경은 꼭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만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마귀의 말(눅4:3), 천사의 말(눅1:30), 사람의 말, 짐승의 말(민22:30)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言)이 아닌 어떤 설명도 있습니다. 또 성경은 기록자들의 성격에 따라 문체와 서술 형식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히브리어로 어떤 부분은 아람어로, 어떤 부분은 헬라어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하나님에 계시가 기록된 글입니다.
"다윗이 성령님을 힘입어 친히 이르되,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막 12:36).
예수께서는 이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이것이 다윗의 말이라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이 다윗의 개인적인 발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내기 위해 "성령님을 힘입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부분은 성경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마15:7-9, 롬9:27-29, 행1:26 등)
성경을 기록하였던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전지자(全知者)가 아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알았으며 혹시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되어 받은 것들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단10:14-15).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성경은 영혼구원을 위한 책
"또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여 함이라"(딤후 3:15-17).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이 글에서 우리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아울러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고 마침내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의 영혼구원입니다. 구원되어진 영혼들이 진리 안에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인간의 영혼을 죄 가운데서 건지는 문제에 있어서 다른 전문가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지혜와 탁월한 계획과 탁월한 방법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이야 말로 인간의 구원에 관해 논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도 하나님을 유일한 구원자라고 하였고(사43:11) 그 하나님이 육을 입고 오신 예수 역시 유일한 구원자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마1:21, 행4:12).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생기는 것이고(롬10:17) 그렇게 해서 생긴 믿음의 결과는 혼들의 구원입니다(벧전1:9). 성경은 믿음을 심어주는 책이고 그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책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믿음을 심어주도록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
사도행전 8장을 봅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빌립이 일어나 가서 보니, 보라, 이디오피아 사람 곧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 밑에서 그녀의 모든 국고를 맡아 큰 권세를 가진 내시가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자기 병거(兵車)에 앉아 대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이에 빌립 집사가 가까이 가서 물었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오늘날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독교 신앙을 갖기 위해 성경책을 읽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구약에 대해 의문(letter, 문자)으로 읽을 뿐이지 정작 그것이 무엇을 보여주며 어떤 목적으로 이끄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빌립과 그 내시의 차이는 단 하나였습니다. 둘 다 이스라엘에 속한 자이고 할례받은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했지만 내시는 복음을 몰랐고 빌립은 복음을 깨달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빌립은 이디오피아 내시가 읽던 이사야의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행8:35). 예수를 가르쳤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디오피아 내시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빌립은 이 글에서 내시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모세 오경에서 뿐만아니라 선지자들의 글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이 성경이 그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탐구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함이니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거하느니라(요5:39).
예수께서 말씀하실 당시는 아직 신약성경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주께서 말씀하신 성경은 율법과 선지서인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말씀을 통하여 성경이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게 됩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탐구하라(요5:39)에서 <탐구하다>라는 말은 자세히 연구하고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탐구하라>는 단어는 직설법으로 쓰인 동사이지만 명령법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탐구하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실제로 영어성경(KJV)에는 이를 명령형으로 적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의 뜻은 "너희가 영생을 얻을 것을 생각하고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고 살펴라"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기록 목적이 예수께서 누구신지 알리고자 함이며, 그를 통하여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밝혔습니다. 오직 이것들을 기록함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로 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예수님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라고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문제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한동안 큐티(Quiet Time)가 유행했습니다. 그러나 큐티의 위험은 적용거리를 찾기에 급급한 나머지 진리이신 예수님을 소홀히 다루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훈련은 잘 되는 것 같은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아가는 지식이 결여된다면 그 큐티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몇 가지 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구약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백성이 호르산에서 이동하여 홍해길로 에돔 땅을 돌아가려 하였으나 그 길로 인하여 백성의 혼이 심히 낙담하여 백성이 하나님가 모세를 대적하며 말하되, 어찌하여 너희가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이곳에는 빵도 없고 물로 없도다. 우리 혼이 이 푸석푸석한 빵을 싫어하노라, 하매 주께서 불뱀들을 백성 가운데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중에서 죽은 자가 많더라. 그러므로 백성이 모세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와 당신을 대적하여 말하고 범죄하였사오니 주께 기도하여 이 뱀들이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니 이에 모세가 백상을 위하여 기도하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 하시니라.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21:4-9).
이 말씀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찾을 수 있습니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지만 이 안에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부분인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3:14-15).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고자 모세가 장대 위에 단 놋뱀은 놋으로 만든 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이것을 본다면 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놋뱀처럼 예수께서도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놋뱀을 보고 살아났습니다. 그것처럼 심판 앞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그들의 죄짐을 지고 골고다 언덕 나무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살아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될 것에 대해 보여 줍니다.
또 있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막대기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집회를 함께 모으고 너희는 그들 앞에서 반석에게 말하여 물을 내게 하고 너는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그들에게 주어 회중과 그들의 짐승으로 하여금 마시게 할지니라, 하시니 모세가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주 앞에서 막대기를 취하니라(민20:7-9).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여기에도 물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부분입니다.
"또한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모두 바다를 지나가며 모두가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고 모두가 같은 영적 음식을 먹으며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으니 이것은 그들의 뒤를 따르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신 것이요, 그 반석을 곧 그리스도셨느니라"(고전10:1-4).
반석이 영적인 음료를 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 등장한 모형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구든지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요4:13-14).
출애굽 때 등장한 <유월절 어린양>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가 있습니다.
"주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달이 너희에게 달들의 시작 곧 한 해의 첫 달이 될지니라.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 달 십일에 너희 각 사람이 어린양을 취하되 자기 조상 집에 따라 한 집에 어린양 한 마리를 취할지니 그 어린양에 대하여 가족이 너무 적으면 그와 그 집의 이웃이 혼들의 수에 따라 그것을 취하되 각 사람이 자기가 먹는 양에 따라 그 어린양에 대하여 계산할지니라. 너희 어린양은 흠이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저녁때에 이스라엘 회중의 전체 집회에서 그 양을 잡고 피를 취하여 양을 먹을 집의 양 옆 기둥과 위에 있는 문기둥에 뿌리고"(출12:1-7)
이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고전5:7).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보호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율법과 선지서의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아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구나!'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깨달음이 확실하면 우리에게는 그분에 대한 믿음이 주어지며 그분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알지 못하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바로 알게 하는 책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인데 그 영생을 얻으려면 성경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가 오셔서 하신 일, 우리 안에 이루신 일이 무엇인가를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보내는 글에서 이 성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또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딤후 3:15). 이 말씀에 의하면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입니다. 다시 말해 영생을 얻게 하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이 즐겨 쓴 <영생(enternal life)>이나 바울이 즐겨 쓴 <구원(salvation)>이란 단어는 내내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옥에 들어갈 사람을 건지는 책
사람들은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죽음을 잊고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은 반드시 모든 인간에게 찾아옵니다. 죽음 후 5분이면 우리는 안식의 낙원으로 가있든지 불꽃 중에 고민하는 지옥으로 가 있을 것입니다(눅16:22-24).
만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눈감아 주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죄를 못 본 척 하시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재기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끊으시고 가두시며 함께 모으시면 누가 능히 그분을 막을소냐? 그분께서 허망한 사람들을 아시고 사악함도 보시나니 그런즉 그것을 깊이 생각하시지 아니하겠느냐?(욥11:10-11).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를 부자 만드는 것, 우리를 유명하게 만드는 것, 그런 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롬5:8, 요일4:10).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고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심판하셨습니다(고후5:21). 그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당하신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께서 나의 모든 죄짐을 지고 심판 당하신 사실을 믿는 사람마다, 영이 살아나며 산 영이 되어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할 모든 사람들
성경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적은 책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책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성경을 읽고 깨달아 영이 살아야 할 입장, 다시 말하면 살았으나 죽어 있습니다. 사람의 영은 주의 등불임에도(잠20:27) 그 등불이 꺼져버린 사람은 음부에 내려가기 위해 줄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몸과 함께 보내던 인생이 끝나면 사람은 영원을 어디서 보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 눈뜨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사망 가운데서 보내야 합니다. 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생명과 안식과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 목적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생명과 안식과 평안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통해 쓰신 책입니다.
성경을 일백 독 하고 지옥으로 가는 것은 불행 중에 불행입니다. 왜 그는 그런 불행을 택하게 됩니까? 영생을 위해 성경을 읽지 않으며 우리의 영생을 위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한대로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나 역시 전해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곧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고전15:3).
죄없으신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받게 하는 속죄(贖罪)가 이루어졌습니다.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가 처리되며 양심의 정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우며, 위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대하여 보여줍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믿어질 때, 예수께서 이루신 일이 확실히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성경이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통해 그것을 듣고 믿는 자마다 영생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이러한 내용과 목적을 무시한 채, 성경을 읽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서 아예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도 있고,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다 하더라도 그 보여진 사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지 못한다면 그 독자(讀者)는 자기의 생명을 지옥에 던져넣는 것과 같습니다. 지옥불을 끌 수 있는 소방차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지옥에 던져진 사람은 결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대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탐구하라 했으나(요5:39) 이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품고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푸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것은 읽고 깨달아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그 하나님의 주신 목적과는 다른 용도로 이 성경을 사용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위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고, 예수께로 가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전수받은 민족이었으나 예수께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는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림자에 매여 실체를 거부한 것에 대한 지적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또 성경을 소유한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성경이 증거하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품고 있는 성경을 이용하여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했습니다. 그림자로 실체를 대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아버지를 사랑함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요5:42-43).
오늘날도 기독교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성경을 보고 읽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많으나 성경이 말하는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사신 분을 모르고 예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제사를 계속적으로 드리는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고난 주간 성금요일(聖金曜日)을 예수의 제삿날처럼 모이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점궤를 보듯 성경을 보는 사람이 있고, 내 마음에 드는 말들만 골라 밑줄을 치면서 성경통독에 바쁜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또 성경을 읽으면서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읽었습니다. 성경을 소유한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향해 "그러나 그(모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5:47)하셨습니다. 성경을 읽고 있다면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을 확인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구원의 확신도 없이 성경을 1번 내지 10번 아니 그 이상을 읽었어도 그는 성경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 목사는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자 해야합니다. 오늘날 성경으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을 본받자고 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보여진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침례요한의 검소함을 본받자고 할 것이 아니라 침례 요한의 눈에 비쳐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인간 구원의 해답을 적어놓은 책입니다. 아울러 거듭난 사람들이 날마다 말씀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면서 예수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육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말씀이 육이 아니요 영이며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6:63).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므로 믿음을 심어주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