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달력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오늘날 모든 국가 달력은 서력기원(서기)으로 통일되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원 1년으로 설정한 달력이다. 유다인들도 공적으로는 이 달력을 사용한다. 하지만 전례 때만은 특수달력을 사용하고 있다. ‘천지창조’를 기원 1년으로 계산한 ‘유대달력’이다. 그들은 천지창조를 기원전 3760년에 일어난 일로 보았다. 따라서 서력기원을 유대력으로 바꾸려면 3760년을 더하면 된다.
구약의 유다인은 달을 중심으로 하는 음력을 사용해왔다. 따라서 해가 지면 하루가 시작되는 것으로 알았다. 다시 말해 일반달력은 밤 12시(자정)부터 하루가 시작되지만 유대력은 해가 지면 바로 다음날이 시작된다. 유다인은 이러한 전통의 근거로 창세기 1장 5절을 내세운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나갔다.’ 따라서 안식일을 포함한 모든 축제는 해가 지면 바로 시작된다. 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면 무조건 끝낸다.
유다인의 대축일이 되면 해가 지는 ‘정확한 순간’을 알리는 것이 ‘산헤드린’의 임무 중 하나였다. 논란을 없애기 위해 유다 최고법정이 관여한 것이다. 그들은 달을 관측해 새날이 시작됨을 공적으로 선언해야 했다. 따라서 예루살렘 인근 산에는 신호를 위한 봉화불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호를 받으면 즉시 불이 켜졌고 꼭대기에서 꼭대기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여러 사정으로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원후 4세기경 오늘날의 유대력이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유다인의 축제는 해마다 날짜가 바뀐다. 음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달은 지구를 한 바퀴 도는데 대략 29.5일이 걸린다. 이런 이유로 유대력은 ‘한 달은 29일’ ‘다음 달은 30일’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양력에서 11일 정도 모자라는데 3년마다 윤년을 만들어 보충한다. 즉 윤년이 되면 ‘한 달’을 추가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아다르 달’(2-3월)에만 추가시켰다. 그런 까닭에 아다르 달은 제1아다르 달과 제2아다르 달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푸림절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크세르크세스 임금 십이 년에 하만이 ‘푸르’ 곧 주사위를 던지니 열둘째 달인 아다르 달이 나왔다(에스 3,7). 에스테르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렇듯 ‘푸르’는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 곧 제비뽑기를 뜻한다. 그리고 푸르의 복수형태가 푸림이다. 에스테르기의 ‘크세르크세스’는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를 다스렸던 임금이며 ‘하만’은 재상이다. 그런데 하만은 유다 민족과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는 왕을 움직여 유다인들의 재산을 빼앗고 민족을 몰살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리하여 제비뽑기로 날짜를 잡았는데 ‘아다르 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만은 실패한다. 유다인 출신의 에스테르 왕후가 개입했기 때문이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임금은 하만을 사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해버린다. 이렇게 해서 유다인들은 멸족의 위험에서 다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푸림절은 이 사건을 기념해 만든 축제다. 그리고 아다르 달은 양력 2~3월에 해당되기에 이스라엘에서는 2월 말이나 3월 초에는 반드시 푸림절을 지내고 있다.
예절의 핵심은 ‘에스테르기의 낭독’에 있다. 무명의 가난한 처녀에서 왕후로 발탁되는 극적인 장면을 읽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개입하시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을 되새기게 한다. 이후 친교를 나누며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예식은 종결된다. 그런데 후대로 오면서 전례와 연관 없는 행사들이 첨부되었다. 17세기부터는 왕후 에스테르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이 성행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민속축제로 자리 잡았다. 현재도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큰 어린이 축제다.
하만이 임금을 움직여 유다인 말살문서를 왕명으로 공표한 날이 첫째 달(니산달) 13일 이었다(에스 3,12). 그런데 이날은 파스카 축일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날도 니산달 13일이다(레위 23,5). 따라서 푸림절 제정에는 다분히 의도적인 면이 숨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다민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자의식이다. 하만과 에스테르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기록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죽게 되면 기꺼이 죽겠습니다.”(에스 4,16) 에스테르는 임금 앞에 나아가면서 이렇게 외친다.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 앞에 나아가면 누구나 죽음을 당하는 것이 페르시아의 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 뒤에는 유다인들의 애절한 기도가 있었다. 결과는 사건을 뒤집는 역전이었다.
초막절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히브리말 수카(Sukkah)는 나무 가지로 얼기설기 엮은 움막을 뜻한다. 이 단어의 복수형태가 숙콧(Sukkot)인데 초막절(草幕節)은 숙콧의 번역이다. 그러니까 움막(초막)들의 축제란 뜻이 되겠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며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그들은 몰랐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하느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초막절은 그때의 시련을 기억하며 의미를 되새기는 축제라 할 수 있다.
초막절은 연중 마지막 축제로 일주일간 열린다. 유대 전례력으로 7째 달인 ‘에타님 달’ 15일에서 22일까지다. 정확하게 말하면 14일 저녁부터 22일 해가 넘어가는 순간까지다. 양력으로는 9월말에서 10월초에 해당된다. 이때 많은 유다인들은 수카(초막) 안에서 음식을 먹고 마신다. 잠을 자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개신교에서는 수장절(收藏節)이라 번역했다. 추수한 곡식을 저장할 때의 축제라는 뜻이다. 가톨릭에서는 장막절(帳幕節)이라고도 했다.
유다인들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뭇가지로 초막을 지었다. 올리브나무와 소나무 또는 야자나무나 갯버들이 사용되었다.(느헤 8.15) 그리고는 잎이 무성한 생가지를 초막 안에 깔고 일주일을 지냈다. 그렇게 함으로서 선조들의 광야생활과 시련의 의미를 몸으로 체험했던 것이다. 가족전체가 축제에 참여했기에 우애도 다지고 친밀감도 나누는 현장실습이기도 했다.
원래 이스라엘 남자들은 파스카 축일과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에는 의무적으로 성전참배를 해야 했다.(탈출 34,23) 하지만 후대로 오면서 정치적 이유로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초막절은 성대하게 지냈다. 마지막 축제인데다 추수를 끝낸 뒤라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초막절이 되면 예루살렘에는 평소보다 두 배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린다고 한다.
유다인의 축제는 음력 14일과 연관된 날이 많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파스카 축제도 그렇고 푸림절도 그렇고 초막절도 음력 14일 밤부터 시작된다. 전깃불이 없던 시대에 둥근 달이야말로 가장 신비스런 불빛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막절에는 전통적으로 한해의 비를 기원하는 기도를 바쳤다. 이스라엘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에는 전혀 비가 오지 않는다. 초막절을 지내야 겨울비가 시작되고 비가 많아야 보리와 밀이 충분히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누카(성전 봉헌축제)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 신약성경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하누카’ 기록이다. 이렇듯 예수님 시대에도 봉헌축제는 있었다. 유다인들은 이 축제를 하누카(Hanukkah)라 불렀다. 직역하면 봉헌(奉獻)이란 뜻이다.
그들은 봉헌축제를 ‘키슬레우 달’ 25일부터 8일간 지냈다. 양력으로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해당된다. 축제 첫날에는 ‘하누카 촛대’라 불리는 독특한 장식에 촛불을 켠다. 그런데 첫날은 한 자루만 켜고 이튿날은 두 자루를 켜고 이런 식으로 8일 동안 차례로 불을 붙인다. 유다인의 불길이 그렇게 퍼져나감을 기원하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성탄절을 지키지 않기에 하누카 촛대에 많은 장식을 해왔다. ‘크리스마스트리’ 대신 촛대를 장식했던 것이다.
하누카 축제는 마카베오 독립운동과 연관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희랍의 지배를 받았고 임금은 ‘에피파네스’라 불린 안티오코스 4세다. 그는 희랍문화를 심는다는 구실로 유다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할례와 안식일을 금지시켰고 율법서를 불태우며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게 했다. 어기면 사형이었다. 기원전 167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억지로 참배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유다인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이것이 마카베오 독립운동의 시작이다.
에피파네스는 군사들을 보내 반란을 진압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그의 주력부대는 인근의 ‘파르티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마카베오는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성전에 세워진 제우스 상을 제거하며 이단자들을 몰아냈다. 기원전 164년 12월의 일이다. 그는 제단을 다시 만들고 율법에 따른 감사의 제사를 바쳤다. 그리고 이날을 기념하는 축제를 지내기로 했다. 이것이 ‘성전 봉헌축제’의 유래다(2마카 10,8). 개신교에서는 수전절(修殿節)이라 번역했다. 성전을 정화했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용어다.
전승에 의하면 성전을 탈환한 마카베오는 제단의 등잔대(Menorah)에 불을 밝히려했다. 그런데 기름이 하루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기름이나 사용할 수는 없었다. 율법에 따라 대제사장이 승인한 기름만이 가능했다. 그런데 하루 분량의 기름이 8일간 불을 밝히며 타올랐다고 한다. 유다인들은 이를 기적으로 여기며 8개의 등잔이 달린 메노라(등잔대)를 만들고 8일간 기념했던 것이다. 이후 기름대신 초를 사용하면서 하누카 촛대가 등장하게 되었다.
오순절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구약의 삼대 축제는 유월절(파스카) 초막절 그리고 오순절이다. 가장 큰 축제는 물론 유월절이다.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축제로 봄의 파종시기와 맞물려 민족 전체가 움직인다. 오순절은 파스카 축일부터 오십일 뒤에 열리는 또 다른 축제다. 그러니까 오순(五旬) 즉 오십일의 시작은 파스카 축일임을 알 수 있다.
오순절 축일은 대개 5월 말이나 6월 초에 해당된다. 이때는 밀 수확이 대부분 끝난 시기다. 따라서 풍작에 대한 감사축제가 오순절의 기원이었다. 이런 이유로 개신교에서는 ‘맥추절’로 부르기도 한다(탈출 23,16). 글자 그대로 ‘밀 추수 축제’란 뜻이다. 가톨릭에서는 ‘수확절’로 번역했다.
후대로 오면서 유다인들은 오순절의 의미를 모세와 연관시켰다.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을 내려주심에 감사하는 축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랜 망명생활로 밀농사 보다 다른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오순절을 성령강림과 연관시켰다. 주님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 성령께서 오셨기에 이를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아무튼 오순절의 어원은 희랍어 펜테코스테(pentekoste)로 ‘50번째 날’을 뜻한다. 칠일이 일곱 번 겹치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의미 있는 날’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불교와 유교에서도 사람이 죽고 49일째 되는 날에는 성대한 제를 올렸다. 49제의 기원이다. 그런 뜻에서 개신교는 ‘칠칠절’이란 용어를 사용했고(탈출 34,22) 가톨릭은 ‘주간절’로 번역했다. 따라서 맥추절, 수확절, 칠칠절, 주간절은 모두 오순절의 또 다른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오순절에 대한 기록은 레위기에 처음 등장한다(레위 23,15-16). ‘너희는 곡식 단을 흔들어 바친 날부터 일곱 주간을 헤아려라. 이렇게 오십일을 헤아린 뒤 새로운 곡식 제물을 주님께 바쳐라.’ 유다인들은 이 기록에 따라 오순절을 지켰던 것이다. ‘흔들어 바치는 예물’은 제사장을 통해 주님께 봉헌하는 첫 수확물을 뜻한다. 기독교의 오순절은 언제부터 지켰는지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2세기 문헌인 ‘사도들의 편지’에 오순절에 관한 기록이 있다. 박해 속에서도 지켜지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초대교회는 부활주일에 세례를 베풀었고 새 교우와 함께 오순절을 시작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