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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성 목요일 파스카 음식을 잡수시면서, 비폭력에 대한 새로운 계약으로 빵과 포도주를 그의 몸과 피로 주신 다음, 12제자 중 한 사람이 자기를 배신할 것이라고 조용히 말했다. 제자들은 즉시 그런 배신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하지만, 곧이어 그들이 벌인 일은 그들 중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지 자리를 다투는 지저분한 싸움이었다. 예수님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불과 몇 시간 동안에, 이 무례하고 무식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통을 제쳐두고 대신 자기들의 문제에 집중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건이 있은 지 2000년이 지냈는데도 상황은 달라진 게 별로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계승했다는 자들은 지금도 역시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정하고, 그분에 대해서 논쟁하고, 그분을 포기하는 것이 다반사인 것 같다.
예수에 대한 배신 그리고 오늘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배신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거의 말이 없다. 예컨대, 오늘날 왜 계속해서 교회가 붕괴되고 있는지, 혹은 예수 공동체가 왜 붕괴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미국에서 가톨릭교회를 떠난 사람의 숫자가 3천만명이라는 사실, 그리고 널리 퍼져있는 분노, 적대감, 불화,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논쟁을 두고 볼 때, 나는 이 고통스런 주제인 '배신'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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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IOTTO di BondoneNo. 31 Scenes from the Life of Christ: 15. The Arrest of Christ (Kiss of Judas)1304-06 |
성목요일, 친구의 배신과 예수의 슬픈 체념
물론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가장 친밀했던 친구 유다에게서 배신당했다. 유다는 평화와 사랑과 비폭력을 핵심가치로 지닌 예수 공동체에 굳게 결속된 한 사람이었다. 시편가운데 한 구절은 구세주를 배신한 사람은 아주 가까운 그의 친구일 거라고 말한다. 요한 복음에 따르면, 유다는 예수님 공동체의 돈지갑을 담당하였고, 그는 늘 거기서 돈을 훔쳤다고 한다.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그는 종교인들과 정부 당국에 접근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그들에게 인도할 지 문의했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내가 예수를 넘겨주는 대가로 무엇을 주겠습니까?” (마태26:15) 이에 대해 “그들은 그에게 은전 30냥을 주었고, 유다는 그 이후 줄곧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고 있었다”라고 마태오 복음 사가는 썼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사탄이 유다 안으로 들어갔다”라고 쓰여있다. 그 당시에 “사탄”은 자주 로마제국을 지칭하는 암호명으로 사용되었다. 즉, 폭력, 전쟁, 억압, 그리고 죽음의 악마를 지칭했다. 어떤 사람들은 유다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님을 체포하기를 원했던 제국주의 정권의 탐욕스런 첩자였다고 생각한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유다는 “칼과 몽둥이로 무장한 수석 제관장들과 원로들이 보낸 큰 무리”와 함께 도착한다. 군인과 당국자들은 예수 공동체가 폭력으로 대항하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사실 그랬다. 베드로는 칼을 빼 들고 싸움을 시작했다. 만일 그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칼을 버리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알다시피, 유다는 예수님의 뺨에 입을 맞춤으로써 그의 신원을 확인해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지중해 사람들이 인사하는 법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정부 관리들과 군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기 때문에, 유다가 누가 예수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어부들 중 한 사람일 수 있었다.
분명히, 유다는 “스승님!”이라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예수가 제왕인 것 같이 조롱한다. “유다야, 인자를 입맞춤으로 배신하느냐?”라고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슬프게 묻는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어떤 복음서에서나, 예수는 배신을 언급하면서, 평화, 비폭력, 그리고 슬픈 체념 속에서 상대방에게 응수한다.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라고 예수는 마태오 복음 26장 50절에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끝까지 비폭력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파괴하는 자를 친구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아무도 단념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자기의 공동체가 깨지고, 그 공동체가 자기를 버렸을 때, 어떤 느낌이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일해온 모든 것들이 와해되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을까? 작가였고 교수였던, 헨리 나웬 (Henri Nowwen)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이 그의 공동체와 친밀한 영적인 사귐을 나누고, 제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설 때에 이러한 폭력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하신 애끓는 기도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망연자실하셨음에 틀림없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상처를 입으시고, 무서웠고, 슬펏고, 우울했고, 비탄에 잠기셨다. 예수님은 그 긴 기도를 통해서 그의 사랑하는 하느님에게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그는 끝까지 조용하고, 양순하고, 비폭력적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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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IOTTO di BondoneNo. 28 Scenes from the Life of Christ: 12. Judas' Betrayal1304-06 |
교회 안에서 누가 누구를 배신하고 있는가?
때때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비폭력을 지향하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빠짐없이 모두다 얼마 있지 않아 교회로부터 배신을 경험한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을 배신할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것처럼 그렇게 큰 배신은 당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숱한 배신에 직면한다.
지금 우리는 제도 교회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음을 보고 있다. 한편에선 전쟁을 일으키는 제국의 팽창을 경험한다. 이때 우리는 자신들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우리가 언제 배신을 당했는가? 누가 우리들을 배신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배신했는가? 교회 안에서 우리가 당한 작은 배신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우리는 예수님처럼 비폭력적이었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누구를 배신했는가?" 이런 것들은 사순절에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질문들이다.
요즈음 국내 여행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선량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것이 정의와 평화에 관한 것이든, 여성과 동성애자들에 관한 것이든, 시골 본당의 폐쇄에 관한 것이든, 행정문제에 관한 것이든, 그들이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반복해서 듣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나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실상 제국에 협력하는 것은 어떠한 형태일지라도 예수님께 대한 배신행위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만일 예수님이 지금 아프카니스탄, 팔레스틴, 파키스탄, 시리아 그리고 멕시코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적들이나, 아이들 속에 계신다면..., 그런데, 우리가 아이들을 억압하고, 해치고, 죽이고 있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지원할 때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경제 제재와 전쟁 등을 통해 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이라크 아이들을 죽여온 미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뿐 아니라, 배신한 것이다.
우리가 이런 경험을 나누면서, 우리는 자신이 비폭력적인 예수님에게 집중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고요하고, 평화롭고, 비폭력적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번민 속에서 조차도 평화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는 평화, 사랑 그리고 비폭력 정신에 집중하고, 우리가 사는 동안 그 정신에 충실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이번 성목요일과 성금요일에 세상은 예수님처럼 우리가 비폭력적으로 남아있고,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예수님처럼 한없는 연민과 우주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은 "언제든 전쟁, 불의, 제국에 항거해야 한다는 것"
시인 로버트 블리 (Robert Bly)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배신을 통해서만이 현명해진다.” 그 말씀은 강력한 통찰력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처럼 배신당하면서도 깊은 기도와 사랑, 이해와 용서, 그리고 깊은 성찰을 통해 일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지혜와 더 깊은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예전에는 미처 모르고 있었던 연민의 새로운 지평에 들어서게 된다.
아마도 가장 큰 도전은, 우리마저 예수님을 배신할 수 없다는 요청일 것이다. 비폭력적이셨던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로서, 좀 세련되지 못한 표현이지만, 배신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거부하고, 버릴지라도, 우리는 그에게 충실한 제자로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 직장에서, 교회와의 다툼 속에서도, 십자가로 가는 길에서, 빈 무덤으로 가는 길에서, 다시 다락방으로 가는 길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예수님 가까이 있기를 원한다. 그것은 매 단계에서 전쟁, 불의, 제국에 항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세마니 이야기 읽어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와 같은지,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와 같은지, 혹은 남녀 할 것 없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모든 제자들 같은지, 조만간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모든 사람인지 확실히 모르겠다. 그 공동체가 다시 짜여지고, 그분이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은 단지 그분께서 돌아가신 후에 평화, 사랑, 용서의 손길을 가지고 우리에게 돌아오셨을 때 보여주신 그분의 인자한 비폭력 때문이다.
우리는 에수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가
평화, 사랑, 일치과 같이 성 목요일에 해당하는 성경구절에서 곰곰이 생각해야 할 성경 주제는 너무도 많다. 한가지만 더, 즉, 우정의 선물에 대해서 언급하겠다. 그분의 공동체가 배신과 논쟁으로 깨지지만, 예수님은 지금부터 그들을 종이나 노예라고 부르지 않고, 자기의 '벗'이라고 부르겠다고 심금에 닿는 따뜻함으로 말씀하신다. “나는 당신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우리들은 우리의 친구가 되기를 바라시는 인자하시고, 사랑스럽고, 비폭력적인 하느님을 가지고 있다. 성경 이야기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 친구의 손을 거절한다.
이번 사순절에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좋겠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리고 예수님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가? 우리의 어떤 부분이 성체의 비폭력의 정치적 암시에 놀라서 하느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는가?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 그분의 새로운 비폭력 약속을 지킨다는 것, 그분의 체포와 사형집행의 정치적 맥락에서 그 우정을 이해한다는 것, 그분을 배신하거나 부정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분의 친구로서, 그것이 우리 삶을 혼란스럽게 만들지라도, 용기를 가지고 전쟁과 불의에 대한 그분의 비폭력 저항 운동에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논쟁하고 있을 때 이렇게 가르치셨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지배자’라고 부르게 한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가 22:25-27)
우리들은 계속 논쟁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배신하며, 예수님을 다시 한번 부정하고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비폭력을 깊이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더 큰 지혜를 발견하고, 세상을 바꾸는 비폭력을 가지고 현대판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하는 성숙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들이 믿음, 힘과 용기를 찾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심 없이 섬기는 법을 배우고, 불의와 전쟁에 대항해서 비폭력 저항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배운다면, 우리는 결국 이기심, 후회, 공포를 버리고 우정 어린 그분의 손을 맞잡을 것이다.
“평화의 하느님의 친구가 되는 것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큰 지혜이다”라는 사실을 아직 배워야 할 것이다.
기사 원문 출처/ National Catholic Reporter 2012-3-27
죤디어 (John Dear, 예수회 사제)
번역: 서인수(영한통역-번역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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