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계치유 이대로 좋은가?
“ 자기의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요한9,3절
◈ 열면서
“구약 성서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고통이 죄에 대한 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욥과, 토비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죄없이 고통을 받아야 할 경우를 당하면 이 세상에서 더 큰 보상을 받기 위한 시험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경우는 대단히 많았다.
이점에 대해 구약성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성서를 읽기 위하여 김 요한 영식글P127중에)
가계치유에 관해 가르침을 하는 이들은 한결 같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세적인 문제 즉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총체적인 것이다 조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라 한다.
◈ 들어가는 말
가계치유에 대해 강의 하는 이들은 심지어는 이런 예를 들기도 한다.
미국의 어떤 두 가문의 예를 들어(열심한 가정, 그렇지 못한 가정) 6대손의 내력을 조사하여 통계를 내보니 열심한 가정은 판사가 몇 명에 변호사가 몇 명에 상원의원 하원의원 등등 부통령까지 지낸 화려한 가문이었다고 소개하는 반면,
열심치 안은 가정은 알 콜 중독자에 빌어먹는 신세에 단명하는 신세에 장애인이 많다고 소개를 하며 자손들이 사회적으로 안되는 이모든 영향은 조상들이 잘못 살은 탓이니 조상들로부터 받는 영향을 치유해야한다면서 조상을 위해 기도하며 미사를 많이 드리라는 주문이었다.
(참고: 연옥영혼을 위하여, 조상을 위하여 그밖에 죽은 영혼을 위하여 드리는 각종 미사와 기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
이밖에도 이런 주제로 강의 하는 경우 이와 흡사한 말씀들을 하고 있다.
과연?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환경이, 고난이, 역경이, 질병이, 모두 조상의 탓이란 말인가?
속담에 잘되면 내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란 말이 맞기라도 하단 말인가?
사실 우리 모두는 건강하고, 잘살고, 행복하게 살며 자자손손이 나와 같이 그렇게 살기를 누구나가 바라고 원한다. 구태여 주어진 하느님의 축복이라면 구지 이것을 외면하자는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단지 가계치유가 우리의 가치관을 현세적이고, 안일한 신앙으로, 흐르게 하여 그 결과 기복적인 신앙을 불러들인 다는 점과, 지금 우리 가톨릭의 신앙의 현주소를 냉철히 비판해보면 대부분이 현세적인 신앙에서 탈피하지 못함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일 것입니다.
(단, 기복과, 현세적인 신앙 자체를 탓하는 것보다. 기복과, 현세적인 신앙에 서 변화와, 탈출하려 하지 않는 타성을 말합니다.)
◉ 구약의 세계에서는
구약 백성들의 신앙생활은 첫째 죄를 짓고, 둘째 벌을 받고, 세 째 회개하고(예언자 출현), 넷째 축복받는 이 네 단계의 연속이었고, 인과응보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알고 있다.
신명기5장9절에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는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사 대에 까지 갚는다.”
주전8세기에 집필된 신명기에서 백성들의 사상이었다.
주전 6세기말에 집필된 에제키엘 18장1이하의 말씀을 살펴본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 이런 속담이 너희 이스라엘에 퍼져있으니 어찌된 일이냐”.사람의 목숨은 다 나에게 딸렸다. 아들의 목숨도 아비의 목숨처럼 나에게 딸렸다.
그러므로 죄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나는 너희 하나하나를 너희의 행실대로 다스리리라. 주 하느님이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의 행실을 고쳐라”. 유배생활을 하는 이들은 그들의 선조들의 죄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고, 느낀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는 저마다.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다. 각자의 미래는 다른이의 죄의
결과에 달려있지 않고 그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들이냐 거절하느냐에 달려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마음의 회개를 생활의 변화를 요구하신다. 라는 말씀을 매일 미사 책 86쪽에서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참조:공동번역 에제키엘18장1절32절까지 해설 참조
욥기를 좀더 살펴본다면 우리의 하느님은 인과응보(우리가 잘하면 상을, 못하면 벌을 주는)의 하느님이 아님을 욥기는 깨우치고자 합니다.
(참조; 욥기의 저자는 이러한 잘못된 신앙을 깨우치고 있다)
그러나 사탄은 욥의 충실성에 질투를 하며 그가 하느님을 향한 마음은 하느님이 복을 주심이기 때문이라고 문제를 제시한다.
이렇듯 사탄은 종교적인 자세가 보상에 대한 기대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욥의 친구들도 같은 견해이며 성서에도 그렇게 표현(욥기8,5-7: 11,13-19)하고 있다.
욥기에서 주는 교훈은 구약을 지배하고 있는 하느님 관 즉 인과응보 잘못된 신앙의
자세를 깨우치고 교육해서 속 좁은 하느님이 아님을 인간들에게 천명하고, 제물이나 제사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사랑을 원한다는(호세6,6)것과, 독자들에게는 “사심 없는” “답례 없는” 신앙으로 성숙되기를 갈망한 다는 것이 욥기의 핵심 주제 중에 하나 일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욥의 신심과 정의가 결코 사심 없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욥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기에서는 하느님은 인과응보의 하느님이 아니고 인간이 정의롭게 살아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순전히 무상으로 베푸심을 일깨우고 있으며 당시의 잘못된 신앙관에 철퇴를 가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2천5백년전에 쓰여진(욥기:기원전6세기) 욥기에서도, 그렇고 바오로 사도께서도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주어짐,(로마8,6)을 명확히 구분하여 믿는 이들이 이 세상을 바라보지 말며 하늘을 구하고
살아가야 기복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성숙한 신앙인으로 한 걸음 도약함을 가르침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욥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정의롭고 의롭게 살아가던(욥23,4-7)욥은 고생하며, 인생을(욥36,15) 배웠고 깨우쳐가는 것을
보게 되며. 그것은 정의롭게 사는 것은 축복을 받은 후의 변화된 삶의 모습이지, 그 자체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조건이 아니며 그분의 축복은 온전히 무상이며 거저주신 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욥기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무상으로 부여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라야 우리의 신앙이 비로소 하느님 현존 안에 결정적으로 온전히 진입한다는 중요한 진리를 알게 된다.
즉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참된 사랑과 마찬가지로 인과응보의 세계가 아닌 무상과 자유의 세계에서 온전히 제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내가 하느님께 주면 네게 주겠다는 사고방식에서 얽 메인 분이 아니라
모든 것, 인간의 모든 사업은 제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은총을 당연한 권리처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은총은 이미 은총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욥기가 주는 핵심적인 메시지 일 것입니다.
욥기를 읽는 독자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기복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완전한 신앙인으로
성숙되기를 작가는 기대 할 것이다.
◉ 신약에서는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나사렛 가정을 성가정이라 하는데 현세적으로 나사렛 가정이 어디 성가정으로 보이는 구석이 한군데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산상 수훈(마태5장-7장)에서도 그렇고, 예수님의 제자들의
전 생애의 삶을 들어 서도 어디 예수님을 따라서 사는 일이 현세적으로 복을 받는 구석이 어디있는가 라는 점이다.
그밖에도 세계적인 성인과 한국의103위성인의 삶도 그렇다는 것이다.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분이 아니고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맹인을 치유하시는 요한9,1절 이하에서도 말씀 하셨습니다.
지체부자유로 태어남은 우리의 죄와 조상의 잘못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겪는 영광의 십자가다라고 말씀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성서의 그 어떤 질병도 예수께서 치유하시는 장면에서 너의 조상을
먼저 치유해주신다 든지 조상의 영향이라 든지 하시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고 하시며 먼저 믿음을 치유해주심을 보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로마8,5)
또한 골로사이서 3장1-3절에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6장7-8절에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이고,
자기의 육체에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
이 모든 말씀은 최후의 심판은 우리가 일생동안 취한 선택의 자연스런 결과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성체를 영하고 살아갑니다
사도바오로께서도 (갈라디아2,20절)에 분명히 말씀 하셨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성체를 모시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여러 가지
달갑지 않은 빚 문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밖아 무효화 시켜(골로사이2,14)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요한3,16)되리 라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 있는데, 성령으로 온전히 무장만 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했는데(에페6,10이하) 왜 조상으로부터 악 영향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악 영향을 받는 그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우리가 무엇을 치유 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신앙을 가꾸어 가야하는지를 분별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믿음이 없고 성사 생활을 하지 않고, 성령으로 무장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면 먼저 무엇이 고쳐져야 하고 치유가 일어나야 할 것인지 너무나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조상으로부터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영향을 받는 다면, 그러면 우리가 믿는 예수는 누구란 말인가.
우리 모두는 허수아비를 믿는 신앙이란 말인가?.
우리는 참으로 나약한 인간이다 영원한 생명을 동경하기보다는 현세의 평안을 찾고 내세의 행복보다는 현세의 모든 부요함과 건강을 찾는 약함을 안고 있다.
이런 것이 천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마음을 빼앗기면 유혹하는 자가 호시탐탐(창세3,3) 약점을 노려 불행한 삶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먼저 하느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모든 것을 덧붙여 듬으로 받게 될 것이다(마태6,23이하)라고, 가르침을 하셨고, 이 말씀이 선포 될 때 유대인들의 정치적인 상황은 로마의 식민치하에 있었고, 먹고 살아야 할 곡식이 없어 굶주릴 때 였습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가르침은 참 기쁨과 참 평화를 위해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이다.
요즈음 웰빙(건강제일주의)이다 또는 신영성(하느님께의탁하지 않고 자신의 수련으로 자아를 키워가는)이다하여 감각적이고 외적이며 현세적인 것들이 마치 “키로 밀을 까부르듯이”(루가22,31)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하며, 이 세상과 우리의 생명조차도 버리고 하늘나라를 찾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반복해서 우리 자신을 끊고 포기해야 하며,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시고(마태5장-7장참조)자신의 나쁜 행실을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 하신다.
과연 로마12,1-2에서도 사도바오로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라 촉구함은 신앙은 언제나 긴장을 해야 분별과 지혜가
생긴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 나오면서
어떻든 우리는 환경이나 조상이나 그 어떤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성서에서도 말씀하셨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해결
방안도 명쾌하게 내려 주셨다.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을 물리 칠 수 있는 길은 성령의 칼인 말씀과, 믿음의 방패라고”, 사도 바오로께서(에페소6,10절이하)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러한 “싸움에 고난이 따르겠지만 용기를 내라하시며 이미 세상을 이기(요한16,33) 셨으니,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믿는 이에게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마르16,17)이라고 말씀하셨다.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병사가 날아드는 창과 화살을 막지못하고 뻥뻥뚫리는 방패를 가졌다면 다면 그것은 무용지물 일 것입니다.
또한 방탄조끼가 총알을 막지 못한 다면 방탄조끼를 손보아야 할 것이다.
세례를 받아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성사생활을 통해 은총을 누리며 성체로
날마다 힘 받고 사는 우리라면 냉철히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라 봅니다.
서울대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에서는 이미 “내 탓이오” 운동에 이어 “똑바로”
운동을 펼쳐 왔습니다. 바로 이 사회가 책임을 회피하고 도덕성을 잃어가는 모습에서
신뢰를 회복하자는 운동이며, 나,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찾자는 운동이겠지요!.
누구로부터가 아닌 진정 나로부터 행복과 평화가 (요한4,14)흘러 넘친 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위해, 각자 내면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사도바오로처럼 나도, 우리도, 모두도, 발견 하리라 믿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임을(로마서7,24절이하)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주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 아 ----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