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통이 ?
자연의 세계도 풍파가 있듯이 우리 내 삶도 마찬가지로 삶의 풍파들이 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일들..............
이러한 삶의 풍파가 밀려들 때 우리는 어김없이 “왜? 어째서???”
라는 물음을 던진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처지를 당해야 한단 말인가.
성서의 인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첫번째 그들에게도 고통은 민감하게 작용을 한다. 욥기를 통해서도 그런 고백을 자주 듣는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라는 넋두리를 듣게된다.
의인으로 살다가 갑작스레 재앙을 만나 자녀들과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자신을 심한 피부병으로 고생하게 된 그는 분노에 차 하느님께 외친다. “어찌하여 고달픈 자에게 빛을 주시며 괴로운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가?”(욥3.20)
도대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 길래 고통을 겪는 이들은 하나같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를 외치는가?
성서에서 본 고통의 원인들
창세기 본문 3장을 자세히 보면 고통의 근본 원인은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창세 3,14-17참조)
인간이 죄를 지어서 고통을 받는다는 이론은 제일 먼저 등장한 이론인 동시에 지금도 통용되는 전통적 고통관이다. 이 고통관은 철저히 개인 처벌 원칙에 입각한 고통관이다. “재난은 사람이 스스로 빚어내는 것, 불이 불티를 높이 날리는 것과 같다네.”(욥5,7) 이러한 전통적인 고통 관을 잘 설명하고 있는 곳이 시편 1편이다.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의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시,1,4-6)
의인으로 통하던 욥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그와 가장 가깝다던 세친구들이 와서 욥의 무죄성을 의심하며 고통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르친다. 그들의 요지는 이러하다.
욥이 남 보기에는 성인군자처럼 보이나 사실 그 뒤는 못된 짓을 하지 않았다면야 어찌 그런 벌을 받는다는 말인가? 엘리바즈는 욥에게 무죄한 사람은 결코 멸망하는 법이 없으며 정직한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단절되지 않는다고 한다(욥4,7-8) 빌닷은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기에 의인은 적극적으로 돌보아 주지만 죄인은 그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욥8,3-6) 또한 하느님은 어떤 경우에도 죄 없는 이를 소홀히 대하지 않으나 악인의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단죄한다.(욥8,20-22)
소바르도 역시 하느님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보상을 하는 분이시니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보호해주시고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즐기도록 해주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기 꾀에 빠져 실패하고 죽음의 길을 가게 된다고 말한다( 욥11,11.20)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전통적 고통 관을 갖고 있다. 해서 “내가 죄가 많아서 이런 고통을 겪고 벌을 받고 있구나”하며 괴로워한다.
두 번째 사상은 하느님께서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신데....설령 자기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그러게 벌하실 리가 없다...해서 나오게 된 사상이 조상들의; 죄 때문에 벌을 받거나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서 여기저기에서 다른이의 잘못으로 벌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여호수아7,1-25에 보면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팔레스티나 땅을 점령하러 나갔던 이스라엘군은 처음에는 싸울 때 마다 승리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싸울 때 마다 패전하고 만다..........패전의 이유는 아간이 전리품을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몰래 훔쳤기에 벌을 받고 있음을 안다.......그리하여 아간 뿐만 아니라 아간의 가족전부가 벌을 받는다. 마치 삼족을 멸하던 우리나라의 법처럼 .....박해시대.... 삼족을 멸하는 경우는 성서에 자주 나온다.
모세에게 반항하였던 코라가 벌을 받을 때 그 자신은 물론 그의 온 가족이 죽임을 당한다. (민수16,32) 이렇게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까지 벌을 받는 다는 집단처벌이다. 군대식으로라면 단체기합이다.“다윗이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부하 장수들의 간청을 외면한 채 제멋대로 병적조사를 하였을 때 하느님은 다윗을 문책하기 위하여 다음의 세가지 벌을 제시한다.”(사무엘하24,1-16)이 셋 중에 하나만 빼고는 모두가 단체기합식이다. 삼년 동안에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든가. 다윗이 석 달간 원수들에게 쫒겨 다니든가. 아니면 사흘동안 이스라엘 땅에 전염병이 돌든가(사무하24.13)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사흘간 전염병이 돌기를 택함으로 이스라엘에 무려 7만명(15절)이나 죽어 통곡이 끊이지를 않았다. 다른 한사람이 범한 죄 때문에 하느님이 엉뚱한 이들을 친다는 사상이 난무했던 시기는 지금부터 2500년 전 얘기다. 이러한 이야기가 퍼지면서 민중 사이에는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 죄 값이 삼,사대 후손까지 이른다는 말이 퍼졌다(민수14,18: 신명5장9절 참조) 시간이 가면서 이런 소문은 무성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급기야 유배기에 이르러 속담으로 이스라엘 전역을 돌기 시작한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는 (예례31,29:에제18,2) 유배지에서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조상의 탓으로 벌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고통는 인간의 화두로 내려오게 되면서.....하느님이 정의로운 하느님이시라면 그렇게 턱없이 벌하지는 않을 거라는 반성이 끊임없이 제게 되면서 유배 이후에는 단체기합식 고통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이 집단 처벌을 베푸시는 분이 결코 아님을 강조하였다. “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이들의 이가 시끔해진다는 속담이 이스라엘 안에 퍼져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런 속담을 말하지 못하게 하리라 사람의 목숨은 다 나에게 딸려있다. 죄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으루 까닭이 없다.(에제18,2-4)”
“죽울 사람은 죄를 지은 장본인이다. 아들이 아비의 죄를 받거나 아비가 아들의 죄를 받거나 하지 않는다. 바로 살면 바로 산 보수를 받고 못된 행실을 하면 못된 행실의 보수를 받는다.(에제18,20)” 다시 개인 처벌 사상이 퍼지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지난날 조상이 지은 죄 과거의 죄로 말미암아 미래 없이 체념에 빠져 살아가던 그 당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자신들이 생활을 고치면 유배지에서 풀려난다는 그런 희망이었다.
세번째 다시금 고통의 원인이 한 인간의 죄나 잘못으로 보게 되면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라는 질문이 또다시 나오게 되었다. 내가 죄를 짓고 그릇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를 벌하시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가 아무런 죄나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고통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또 설령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부족한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던 중 넘어진 것인데 그러한 것에 일일이 시비를 걸어 벌을 준다면 도대체 누가 하느님 앞에서 복되게 살아갈 수 있으랴? 이러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하느님 앞에 다음과 같은 냉소적인 질문도 하게 되었다. “야훼님 제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그 때마다 옳은 것은 하느님이셨기에 법 문제를 하나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합니까?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가 잘되기만 합니다.?”(예례12,1)
“주께서는 눈이 맑으시어 남을 못살게 구는 못된 자들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으시면서 어찌 배신자들은 못 본 체하십니까? 나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때려잡는데 잠자코 계십니까?”(하바1,13)
개인 처벌에 입각한 전통적인 고통관은 무죄한 이들의 고통에 대해 납득할 만한 대답을 줄 수 없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천사 같은 아이들의 고통들....신약의 헤로데로 인해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의 죽음.....남아메리카의 지금도 하루에 5만이나 굶주려 죽는 그런 고통들...장애인의 고통들.....이런 고통들이 의인이 받는 고통에 대한 질문들이다. 욥은 사람 앞에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 할 만큼 의로운 인물이었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이란 이 몸의 허물이나 들추어내고 이 몸의 죄나 찾아내는 것입니까? 당신께서는 내가 죄인이 아니심을 아시나이다.”(욥10,6-7) 의인이 받는 고통에 대해 질문하고 응답하지만 거기에서도 고통의 참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고통은 인간이 이해 할 수 없는 신비라고만 할 뿐이다. 하지만 욥기는 분명한 사실을 한 가지 제시한다.
고통 앞에서 하느님께 던진 질문,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등의 항변을 하느님께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솔직함을 하느님께서는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42,7절에 전통적인 고통 관을 꾸짖는 하느님을 보게 된다. “너희들을 생각하면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구나 너희들은 내 이야기를 할 때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욥42,7)” 다만 욥의 울부짖음은 솔직했다 고만 한다.이 것이 욥기에 나오는 “고통은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전부다. 여기서 귀중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고통은?” 왜라는 욥의 질문에 대답대신 신비스런 질문을 퍼부으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 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보아라”(욥38,4)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그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어디에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그 누가 주 줏 돌을 놓았느냐?”(욥38,5-6)............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욥40.6-8)
“네 팔이 하느님의 팔만큼 힘이 있단 말이냐? 너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와 같단 말이냐? 그렇다면 권세와 위엄으로 단장하고 권위와 영화를 걸치고 너의 분노를 폭발하여보아라. 건방진자가 보이거든 짓뭉개 주어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알아 주리라. 네가 자신의 힘으로 헤어 날 수 있으리라고.”(욥40.9-14)
하느님께 질문을 던진 욥은 그야 말로 그로기 상태에 빠지게 된다........마치 농부가 임금에게 왕국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하는 것을 일러주는 겪이다. 아무튼 고통의 원인에 대해 세 번째 대답은 고통은 신비라는 것이다. 요한 복음 9장에 나오는 태생 맹인처럼 말이다. 운명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에 고통은 신비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네번째 . 앞서에서 처럼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그럼 고통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래서 또 하나의 고통관이 나왔으니 고통은 우리를 시험하고 견책하기 위하여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백성은 괴로움을 참다못해 마침내 나를 애타게 찾으리라.”(호세5,15)
이스라엘 백성에게 괴로움을 허락한 것은 그로 인해 하느님을 다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인간을 정화시키고 단련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중요하다. 신앙인에게 고통은 하느님 사랑의 계획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께서는 사랑 하시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히12.6) 하고 나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견책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당신 자녀로 여기고 하시는 것이니 잘 참아내시오. 자기 아들을 견책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있겠습니까?”(히브12,7)라고 말한다.묵시록에서도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묵시3,19)” 이 고통 관을 금방 이해하게 하는 성서가 창세22장1절 이하에 나온다. 또 다른 예는 토비트에게서 본다. (토비트2장 참조)
“언젠가 당신이 잔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시체를 묻어주던 날 당신을 시험키 위해 파견된 자는 바로 나 (라파엘)였습니다. (토비12,13)” 이렇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단련시키기 위해 마련하신 것이란 사상은 비교적 적극 적으로 고통을 해석한 것이다.
다섯째 이렇게 적극적인 고통 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사상은 대속적 고통관이다.
한인간이 겪는 고통은 자신의 죄탓도 아니오 조상의 탓도 아니오 또한 다른 사람의 탓도 아니오 또 견책을 위해 주어지는 것도 아닌 다만 고통을 겪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입기 위한 것이라는 사상이다.
예) 성조 요셉....이사야 53,3-6...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알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헤메며 제멋대로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1베드2,24)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스스로가 알 수 있다. 자신과 하느님만은 결코 속일 수 없기 때 문이다. 하느님의 선택은 인간에게는 고통이 반드시 수반된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너무 너무 쉽게 충고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니 받아들이세요.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 잘 알고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게 되는 거예요” 라고 성서 인물들 또한 고통을 견디기가 어려워 죽여 달라고 청하는 모습을 봅니다.
1) 열왕기 상 19,4절에서 엘리야가 바알신(450명)을 쳐죽이자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든다. “아!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이제 이 목숨을 거둬주십시오 이제 다 끝났습니다.”
2)하느님께서 전하라 명한대로 조국의 멸망을 예언했다가 동족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왕따를 당해웅덩이에까지 던져진 눈물의 예언자 예례미야는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저주 받을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날, 복과는 거리가 먼 날, 사내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한 그 자도 천벌을 받아라....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나를 죽이셨던들, 어머니 몸이 나의 무덤이 되어 언제까지나 태속에 있었을 것을! 어찌하여 모태에서 나와 고생길에 들어서 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는가?”(예례20,14-18)
3) 토비트의 경우는 어떠한가? 맹인이 된 그 는 부인에게 얹혀 살아가던 중.....“주여! 많은 슬픔이 나를 짖 누르고 있으니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주여 이 고뇌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주시고 영원한 곳으로 나를 보내주소서.... 살아서 이 많은 고뇌를 겪기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이 조롱을 듣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토비3,6-7)
엘리야나 예례미야 그리고 토비트에게 그렇게 죽고 싶을 많 큼 고통이 절망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겪는 고통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의인 중에 의인인 욥도 무의미한 고통의 저주 앞에서 죽기를 갈망했다. “아! 이원통한 심정 저울질하고 재앙도 함께 달아보았으면 바닷가에 모래보다 무거우리니.... 하느님께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면, 그리하여 나를 산산이 부수시고 손을 들어 나를 죽여주신다면 차라리 그것으로 나는 위로를 받으리라” (욥6,1-10)
전도서 저자는 .... 나는 산다는 일이 싫어졌다.....하늘아래서 벌어지는 모든일이 나에게 괴로움뿐이다.(전도2,17)
이렇게 성서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고통의 무의성 앞에서 자기 생을 저주하고 죽음을 갈망하였는데, 놀랍게도 하느님만은 저주하지 않았다. 엘리야, 예례미야, 토비트, 욥, 그 어떤 사람도 자기 태어 난 날은 저주하지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저주하지는 않는다. 단지 하느님께 원망과 불평을 털어 놓을 뿐이다. 우리도 성서의 인물들과 똑같이 고통의 무의미성 앞에서 시달리고 있다.
예)자녀, 아내, 남편, 골육, 친지, 이웃들과 그 밖에 삶 속에 고통들...
왜 모든 종교가 고통을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고 고통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만을 가르치는가?
왜 예수께서는 고통을 치워 버리지는 아니하시고 당신의 현존으로 고통을 채우려고만 하실까?
그것은!
1) 고통은 삶의 실재요, 삶의 실상이기 때문이며 (고통은 자연 법칙 천적이야기. 어황속의 금붕어, 찰스코우만의 나비 에벌레 이야기)
2)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고 (c.s 루이스“어떤 사람들은 고통스런 일이 생기기 전에는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이란 듣지 못하는 이가 듣게 되는 하느님의 확성기다”라고. 루가복음15장설명,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오게 되는 것도 고통 때문이다.. 고통 앞에서는 우리의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깨닫고, 또 고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하느님께 살려 달라고 외치는 것이다.이런 의미로 볼 때 고통은 세상사에 정신을 빼앗긴나를 우리를 일깨워 하느님과의 관계를 재정비하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
3) 하느님께 대한 바른 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전에 나는 당신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을 봄니다(욥42,5)
예) c.s루이스 아내를 잃고... 소설가 박완서 남편과 아들을 보내고...삶의 고통
우리가 아무리 고통스런 처지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떠나거나 자살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고, 원망하고, 십자가를 내동댕이쳐도 하느님을 저주하고 떠나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느님 앞에 머물러 있을 때 언젠가는 지난날의 고통을 하느님 앞에서 정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 우리가 겪었던 고통은 구원적이요. 신학적인 체험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떠나거나 자살해서는 안 됩니다.
# 사도 바오로는 고통을 적극 적으로 수용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나는..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2고린토12,10)나는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큰 위안을 받고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2고린7,4)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중심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다.
# 사람의 눈이 흰자위와 검은자위로 되어 있다. 사람이 물체를 분별하는 것은 흰자위가 아니라 검은자위를 통해서이다. 왜 하느님은 인간의 검은 자위를 통해서 사물을 보게 만들었는가? 탈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인생이 어두울지라도, 네 현실이 눈동자같이 캄캄할지라도 켤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라. 오히려 그 어두움을 통하여 밝은 미래를 바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