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4월 16일 수요일
[성주간 수요일]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26,14-25)
제1독서<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50,4-9ㄴ)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화답송>시편69,8-10.21-22.31과 33-34(◎14ㄴㄷ) ◎ 주님, 은총의 때이옵니다.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 당신 때문에 제가 모욕을 당하고 제 얼굴이 수치로 뒤덮였나이다. 저는 제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고, 제 친형제들에게 이방인이 되었나이다. 당신의 집을 향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욕하는 자들의 욕이 저에게 떨어졌나이다. ◎
○ 제 마음이 모욕으로 바수어져, 저는 절망에 빠졌나이다. 동정을 바랐건만 헛되었고, 위로해 줄 이도 찾지 못하였나이다. 그들은 저에게 먹으라 쓸개를 주고, 목마를 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나이다. ◎
○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가난한 이들아, 보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
복음<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마태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성주간 수요일 제1독서(이사50,4-9ㄴ)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4-5)
이사야 예언서의 '위로의 책'(40-55장)에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이 네 개의 노래로 되어있는 '야훼의 종' 또는 '주님의 종'에 관한 신탁이다(42,1-9; 49,1-7; 50,4-11; 52,13-53,12).
여기서 주님의 종이 누구를 가리키는가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주님의 종'으로 이해하였다.
첫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는 주님의 종의 선하신 성품과 주님의 종을 향한 하느님의 전적인 보증을 강조했다(42,1-9). 두번째 노래는 하느님의 전적인 부르심과 영광과 승리의 약속을 강조하였다(49,1-7). 이에 비해서 세번째 노래와 네번째 노래는 모두 종의 고난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 독서가 들어있는 세번째 노래(50,4-11)는 주님의 종이 고난 가운데서도 전적으로 인내하며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주님의 종의 고난에 집중적으로 촛점을 맞추는 네번째 노래(52,13-53,12)와 구별된다. 세번째 노래의 말하는 자(話者;화자)도 두번째 노래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종 자신이다.
이 종은 하느님께 순종적이고 신실한 자이며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큰 고난을 당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로서 모든 믿는 이들에게 참 신앙의 표본이 되는 인물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4)
본문에서 주님의 종은 자신을 1인칭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주 하느님)을 자신의 '주'로 칭한다. 이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는 단순히 종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권한을 가진 주인이란 의미가 아니라 온 우주의 주재권을 가지고 있는 만왕의 왕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주님의 종은 바로 이러한 만왕의 왕이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제자의 혀'를 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제자들'에 해당하는 '림무딤'(limmudim)은 '배우다'(신명5,1),'본받다'(신명18,7)의 뜻이 있는 동사 '라마드'(lamad) 에서 유래하며,'배우는 자'란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
이사야서 8장 16절에서에서 '제자'란 의미로, 54장 13절에서는 '교훈을 받는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단지 공부를 많이 해서 박식해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의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통해 그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배워 스승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완벽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제자의 혀를 주시어'란 말은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 아래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만 하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후반절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는 내용 역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주님의 종의 열정을 보여준다. 즉 주님의 종은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그의 말씀을 바로 듣고, 깊이 이해하여 순종하며 주님께서 전적으로 신임할 수 있는 자인 것이다.
주님의 종은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주님의 백성에게 바른 지식을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같은 측면에서 본문의 '주시어'에 해당하는 '나탄'(natan)은 '위임하셨다', 또는 '임명하셨다'는 의미로 의역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 메시아적 사명을 완수하실 때에 사람들로부터 배우지 않은 자인데 어디에서 그런 깊은 지식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으셨다(요한7,15-16). 주님의 종이셨던 그리스도는 성부 하느님을 통해 참된 지식을 공급받으셨고, 그 지식에 근거하여 말씀을 전파하셨던 것이다(요한8,28).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4)
이 본문은 왜 주님께서 종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는지 그 목적이나 결과를 말해준다. 즉 본문은 제자의 혀를 가지신 주님의 종의 주요한 사명이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특히 그는 지친 이<困苦(곤고)한 자>에게 말씀을 가르쳐 그를 돕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지친 이'에 해당하는 '야에프'(yaeph)는 피곤하여 지친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 '야아프'(yaaph)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피곤해 기진맥진한 사람을 의미한다(40,28.30.31).
그리고 '말로'에 해당하는 '따바르'(dabar)는 주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주님의 말씀은 창조의 권능과 생명을 부여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메시야가 원하는 주님의 말씀은 지친이로 하여금 생명과 능력을 회복하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의로움과 구원에 이르지 못하며 어떤 소망도 없다고 고백하는 자들, 그리하여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들은 그 말씀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어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4)
주님께서는 그의 종이 가르치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도록 매일 아침마다 (morning by morning) 그의 이성과 영성을 일깨우신다는 사실이 예언된다. '일깨워 주신다'에 해당하는 '야이르'(yair)의 원형 '우르'(ur)는 문자적으로 잠을 깨우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서 모두 65회 사용된 용례에서 이 단어는 주로 마음을 부추기거나 감동시켜 어떤 일을 하게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이성을 날카롭게 하시고 영성을 일깨우며 사명감을 북돋운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 이어지는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란 예언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듣게 하신다'에 해당하는 '리쉬모아으'(lishimoah)는 '듣다'라는 의미를 지닌 '샤마으'(shamah)의 부정사에 '~하기 위하여'란 뜻의 전치사 '레'(le)가 결합된 형태로 직역하면 '듣도록'이라는 의미가 된다.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실패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문제(이사48,8.18)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먼저 들으시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모범을 보이시는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4)
본절은 주님의 종이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고 순종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은 주님께서 종의 귀를 여셨다는 본문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귀가 모두 열리지 않았다는 이사야서 48장 8절의 진술과 정확히 대조를 이룬다.
"너는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다. 예로부터 네 귀가 열리지 않았으니 네가 배신만 하고 모태에서부터 반역자라 불릴 것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이사48,8)
원문상으로도 '열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타흐'(patah)가 본문과 이사야서 48장 8절에 각각 사용되었다. 그들은 듣는 귀가 닫혀 있어서 들어도 듣지 못하며(이사6,9) 아예 주님의 명령 듣기를 싫어하는 자들이다(이사48,8).
반면 주님의 종은 주님께서 그의 귀를 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고 완전하게 순종한다. 바로 여기서 주님의 종이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완전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근거가 나온다. 따라서 믿는 이들도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거역하고 범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종의 듣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5)
원문에서 '나는'에 해당하는 '아노키'(anoki)라는 인칭 대명사가 매우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이 단어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만큼은'이라는 강조적 의미를 나타낸다. 주님의 종만큼은 부르심과 말씀에 절대 순종의 자세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거역하다'에 해당하는 '마라티'(marathi)의 원형 '마라'(mara)는 원래 음식의 맛이 매우 쓴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구약성경에서 대부분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이사1,20; 민수20,10; 신명1,26). 그러나 주님의 종은 절대로 그렇지 않고 오히려 언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행하신다(요한8,29).
또는 '뒤로 물러서다'에 해당하는 '아호르 네쑤고티'(ahor nesugothi)는 겁을 집어 먹고 뒤로 도망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님의 종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에 섰을 때 온갖 두렵고 떨리는 일이 계속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도망치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이러한 주님의 종의 사명은 메시아의 공생활 가운데 그대로 구현되었다.
[성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누군가는 자신의 사랑을 상대에게 고스란히 건네줄 결심을 하고, 누군가는 상대를 팔아넘길 결심을 합니다.
이 불공평한 관계는 비단 예수님과 유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비극은 우리 주변에도 때로 발생하니까요.
뉴스는 거의 날마다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편리를 위하여 아기를 팔고, 딸을 팔며, 약자를 파는 사건을 보도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사랑을 팔아 버린 유다가 받은 돈은 겨우 “은돈 서른 닢”이었습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라는 문장을 그리스 말 성경에서 그대로 옮기면 “무엇을 나에게 줄 거요? 내가 당신들에게 그를 넘기겠소.”입니다.
‘무엇을’이라는 그리스 말 의문사를 문장의 첫머리에 배치하여 ‘거래’라는 인상을 먼저 부각시킵니다.
사실 성주간 월요일부터 계속 복음에 등장하고 있는 유다는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냄비나 접시에 담긴 음식을 서로의 숟가락이나 젓가락에 신경 쓰지 않고 함께 먹는 것처럼, 유다인들도 친한 관계에서는 비슷한 식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친밀함’을 자신의 주관적 판단으로 이용하고 배신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아무개”(그리스 말 ‘데이나’)라는 낱말이 등장합니다.
병행 구절(마르 14,13; 루카 22,10)이 그를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로 명시한 것과 달리 마태오 복음서는 특정 인물을 지칭하지 않아 그 “아무개”가 우리 자신일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습니다.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파스카 식사를 하실 자리를 ‘아무개’에게 부탁하셨듯이, 우리 안에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드실 만찬을 마련하여 드리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성주간 수요일]
죽은 제물로 살아나는 이들.
(마태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 왜 은돈 서른 닢일까?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계약)대로 살지 않아, 그분의 호의로 그분과 일치를 이루려는 계약이 깨졌을 때~
(즈가11,11-14) 11 그 계약은 그날로 깨졌다. 그리하여 나를 지켜보던 양 장사꾼들은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었음을 깨달았다. 12 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좋다고 생각하면 품삯을 주고, 그러지 않으면 그만두시오.” 그러자 그들은 내 품삯으로 *은 서른 세켈을 주었다. 13 주님(야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나의 값어치를 매겨 내놓은 그 잘난 *품삯을 금고에 넣어라.” 나는 *은 서른 세켈을 집어 주님의 집 금고에 넣었다. 14 그러고 나서 나는 ‘일치’라는 둘째 지팡이를 부러뜨려, 유다와 이스라엘의 형제 관계를 깨 버렸다.
= 하느님과의 일치, 하나 되는 길이 깨졌다. 그래서 영원히 어둠 속에 갇혀야 할 우리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 당신의 몸값으로 서른 닢(세겔)을 받아 십자가의 대속, 그 진리로 어둠 속의 생명의 빛을 비추게 돤 것이다.
(요한8,12. 9,5) 12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5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 아무개 - 나, 우리다. 오늘 나, 예수가 너의 집- 마음(신앙)에 들어가 함께 파스카 음식으로 축제를 지내겠다 하신다.
파스카 음식~
(탈출12,1.3.5-7.12) 1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3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에게 이렇게 일러라. ‘이달 초열흘날 너희는 가정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집집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 5 이 짐승은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마련하여라. 6 너희는 그것을 이달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잡아라. 7 그리고 그 *피는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12 이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면서,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 신들을 모조리 벌하겠다. 나는 주님이다.
= 이집트(세상)의 풍요를 참으로 만족하는 삶을 치시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그 풍요를 좋아했기에 죽어야한다)
그러나~
(탈출12,13.22) 13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22 그리고 *우슬초 한 묶음을 가져다가 대야에 받아 놓은 *피에 담가라. 그것으로 그 대야에 받아 놓은 *피를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너희는 아침까지 아무도 자기 집 *문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 죽어야 할 이스라엘이 흠 없는 어린 숫양의 피로 거저 받는 구원이다.(그것이 구원의 약속, 복음, 계약이다. 그 말씀 밖으로 나가면 죽음이다.) *대속의 제물(피)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12,1)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 대속으로 죽은 제물(예수)로 살아 났으니, 그래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되었으니 그에 합당한 예배, 곧 구원의 진리(십자가)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영광을 드리는 신앙을 사는 것이다. 그런 이들을 하느님께서는 찾으신다.
(요한4,23-24) 23 “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 안에서(타투떼이아-소통) - 진리로 소통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파스카 음식, 곧 하느님의 뜻(일)인 생명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뜻(일)을 위한 사람의 말을 먹는 것이 예수님을 파는 배반인 것이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 이 부분은 사제의 묵상글을 참조한다.
저는 교회의 사람입니다.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삶을 살겠다고 서약하였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쉽게 이해하도록 강의하고 그 복음 말씀에 젖어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그런데 가끔 의문이 듭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나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과 또 그분의 말씀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를 더 드러내고 유명해지고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나의 앞에 하느님께서 계시기는 한가?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 내가 너무 나대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고민과 질문은 나태하고 오만하였던 저의 정신을 맑게 만들어 줍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언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 예언이 저에게는 미래의 일이 아닌 이미 행한 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자신의 것을 채웠던 사람은 유다가 아니라 *저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처럼 이야기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그런 저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어쩌면 복음을 묵상하며 쓰고 있는 이 글도 예수님을 팔아 내 배를 채우려고 하는 배반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나의 일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우리는 정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스스로에 대한 관대함을 버릴 때, 핑계를 내려놓고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대답을 되새길 때 우리의 실수는 줄어들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최종훈 토마스 신부)
☨ 천주의 성령님! 지금까지 음식(말씀)을 잘먹고 나(사람)의 일(말)이 아닌 주님의 일(말씀)을 하는자가 되게 하소서. 그분만이 진리이심을 깨닫게 허소서. ~아멘!!!
성주간 수요일 복음(마태26,14~25)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3ㄴ~24)
마태오 복음 26장 23절(ㄴ)의 '넣어'라는 현재 진행적 의미로 번역된 '엠밥사스' (embapsas; dipped)는 '담그다', '적시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엠밥토' (embapto)의 부정 과거 분사이다.
따라서 '엠밥사스'(embapsas)는 구체적으로 대접에 담겨 있는 과일과 식초 혼합 스프(soup)에 빵을 담그어 찍는다는 뜻이며, 그 시제는 과거로서 이미 빵을 담그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과 함께 스프에 빵을 찍어 먹기 위해 대접에 손을 넣은 사람은 유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 전부였을 것이기에(마태26,21),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당신을 팔아 넘길 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신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배반자가 될 가능성이 열두 제자 모두에게 열려져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편 병행 구절인 요한 복음 13장 26절에는 예수님께서 빵을 적셔서 유다에게 주시면서 당신 빵을 받는 자가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일은 그 자리에서 모두 일어났던 일이었을 것인데, 마태오 복음사가와 요한 복음사가가 강조하고 싶었던 메시지의 차이에 따라 각각 한 사건만이 선택되어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요한 복음사가는 배신자가 유다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서 주님의 참된 제자들 가운데서는 배신자가 나올 수 없고, 그리고 나와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배신자가 제자들 중 누가 될지 모른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기록함으로써 자칭 주님의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배신의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자'에 해당하는 '후토스'(hutos; the same)는 지시대명사로서 '바로 이 사람'이라는 뜻의 강조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후토스'(hutos)는 예수님을 팔아 넘길 자가 예수님과 함께 대접에 손을 넣은 그자, 곧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가까운 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강조적 표현을 하는 이유는 구약에 나타난, 제자 중 한 사람이 배신에 대한 예언의 성취에 중점을 두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즉 시편 41장 10절에서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제 빵을 먹던 그'가 본문에서 '예수님과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의 가까운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떠나간다'에 해당하는 '휘파게이'(hypagei; goes)의 원형 '휘파고'(hypago)는 '~아래에' 또는 '~에 의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휘포'(hypo)와 '가져가다'는 뜻의 동사 '아고'(ago)에서 유래한 합성 동사로서,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을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동사는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닌 자의에 의한 떠남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떠나가는 것이지만, 그 섭리를 적극적 의지로 따르셨음이 나타난다.
한편 이 동사는 단순히 장소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 뿐만 아니라 인생을 떠나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죽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마르5,19; 요한7,33; 16,5).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로 가시는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정해놓으신 십자가를 통한 죽음의 길을 갈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은 실제로 성경에 이미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다 (루카18,31; 24,25-27; 44-47; 시편22,2 ;이사53,2-12).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적 차원에서 볼 때는 이스라엘의 권력가들과 배신자가 예수님의 생명을 놓고 좌지우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무기력하게 수동적으로 팔려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지적으로 순종하여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불행하여라'에 해당하는 '우아이 데'(ouai de; but woe)에서 '데'(de; but)는 접속사로서 앞의 문장과 대조된 정반대의 사실을 강조하여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성경대로, 즉 하느님의 섭리대로 죽게 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팔아 넘기는 자의 책임은 결코 면제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불행하여라'에 해당하는 '우아이'(ouai)는 일종의 감탄사로서 '화가 있도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우아이'(ouai; woe)는 특히 하느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징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므로(마태11,21; 묵시8,13), 이 단어가 말하는 '불행'(화)의 종류는 하느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형벌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무서운 심판의 선언을 들은 유다는 두려움이나 회개의 감정은 커녕,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는 천연덕스런 모습을 보인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는 것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빠진 인간에게 사용되던 속담적 표현이다.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비극'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욥기(욥3,2.10.11)나 에녹서 38장 2절에도 나오는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심판과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유다의 비극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원문은 '좋았을 것'으로 번역된 '칼론'(kalon; good)이 문장의 서두에 나와, 존재함으로 생겨난 현재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욱 더 중폭시킨다.
2025년 04월 16일 수요일
[성주간 수요일]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작정하고 수석 사제들에게 먼저 말을 건넵니다.
예수님의 몸값으로 고작 은돈 서른 닢을 받은 유다는 예수님과 다른 사도들 앞에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있다가 최후의 만찬에서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는 뻔뻔함마저 보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처음부터 배신할 만큼 악한 이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이들”(마르 3,13)로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선택하실 만큼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이였지만 점점 돈과 탐욕에 사로잡혀 주님에게서 마음을 돌리고 맙니다.
유다의 배신은 한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점차 타락하여 마음이 변한 결과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신할 것을 미리 아셨지만,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그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나약한 우리가 세속적인 욕망에 붙잡혀 있을 때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시며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유다와 베드로 모두 주님을 떠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 둘의 마지막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뒤 회개하고 돌아왔지만, 유다는 절망에 빠져 스스로 파멸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리가 나약함으로 유혹에 빠져 있을 때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시편 34[33],9)
우리가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를 제대로 헤아릴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살펴봅시다.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 아닌 다른 것에 매이지 않도록,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회개하며 주님께 돌아가 새롭게 시작하는 믿음이 필요하겠습니다.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2025년 04월 16일 수요일 [성주간 수요일]
은돈 서른 닢
복음(마태26,14-1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예수)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 우리의 죄값으로 은돈 서른 닢에 팔리시기로 되었던 주님이시다.
하느님께서 호세아에게 하신 말씀(호세아= 예수)~
(호세3,1-3) 1 주님(야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음을 저지르는 여자를 사랑해 주어라.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해 주어라.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건포도 과자를 좋아하고 있다.” 2 그래서 나는 은 열다섯 세켈, 그리고 *보리 한 호메르와 한 레텍으로 그 여자를 사들였다. 3 나는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오랫동안 내 곁에서 지내야 하오. 창녀 짓을 해서도 안 되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어서도 안 되오. 나도 당신에게 그렇게 하겠소.”
= 모두 합하면 은 서른 닢이다. 사람의 몸값이 서른 닢이다.(탈출21,32) *보리는 간음한 여자가 드려야할 예물이다.(민수5,15) 간음은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간이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 욕망, 안전을 위하여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만족해 하는 것을 말한다.
곧 뱀의 유혹을 먹은 아담의 후예인 모든 인간이 간음을 하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 죄 아래 갇혀있는 것이다.(갈라3,22) 즉 지금도 여전히 창녀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1요한1,10)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 하느님의 말씀을 안다면, 올바로 깨달았다면, 자신이 죽을죄인 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 자비인 호세아,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다.
(갈라3,22.26)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26 (믿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 자신의 뜻을 위해 열심히 율법(*제사와 윤리)을 행하는 그 율법 자들은 믿지 않는다.
(마태21,32)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요한1,6-8.15-17)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 율법의 모든 조항을 다 지키면 행복하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그것을 알라고 주신 율법이다. (갈라3,24) 그래서 하느님께서 구원의 은총,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창조 이전에 예비하신 것이다.
(요한1,29)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우리의 모든 죄로 죽으시고 흘리신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없애시고 ‘깨끗하다. 의롭다.’ 하시는 그리스도시다. 그리고 그것이 구원의 은총, 진리라 하시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뜻으로 오셔서 간음으로 더러워진 나를 ‘거룩하다, 의롭다’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독서(이사50,4-9ㄱ)
우리는 그 누구도 심판할 수 없고, 그 누구에게도 심판 받을 수 없다. 말씀을 올바로 듣고, 올바로 깨달았다면 말이다.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 매일, 일용 할 양식인 독서와 복음을, 하느님의 격려(용서, 자유, 생명, 구원)의 말씀을 듣고, 먹고, 말하는가?
6 나는 매질하는 자(율법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 ‘용서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의 모형인 남자 솔로몬과 죄인의 모형인 슬람밋의 아가(노래)를 보자.
(아가1,4-6) 4 (여자) 나를 당신에게 끌어 주셔요, 우리 달려가요. 임금님이 나를 내전으로 데려다 주셨네.
=한 몸이 되었음이다.
5 예루살렘 아가씨(율법자)들이여 나 비록 가뭇하지만(더럽지만) 어여쁘답니다, 케다르의 천막처럼 솔로몬의 휘장처럼. 6ㄱ 내가 가무잡잡하다고 빤히 보지 말아요.
= 왕인 ‘내 신랑이 괜찮다 하니 무시하지 말라’는 말이다.
6ㄴ햇볕에 그을렸을 뿐이니까요. 오라버니들이 나에게 *골을 내며 나를 포도원지기로 만들어 내 포도밭은 지키지도 못하였답니다.
= 율법자들이 화를 내며 내 포도밭으 열매, 곧 피의 새 계약을 지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새 계약의 왕과 혼인을 했으니 검다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당하게~ 그것이 믿음이다.
(아가2,2.7 4,7 6,3) 2,2 (남자) 아가씨(율법의 의인)들 사이에 있는 나의 애인은 엉겅퀴 사이에 핀 나리꽃 같구나. 7 예루살렘 아가씨들이여 노루나 들 사슴을 걸고 그대들에게 애원하니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 4,7 나의 애인이여, 그대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그대에게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려.
6,3 (여자) 나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 그이는 나리꽃 사이에서 *양을 친답니다.
= 내 편이신 신랑, 주님이 검은, 더러운 나를 깨끗하다, 흠 없다, 예쁘다 하시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목숨 걸고 양(羊)인 자신을 돌보기 때문임을 아는, 믿는 여자의 고백이다.(요한10,11.27 참조)
*다른 분의 글로 마무리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과 올바른 계약, 곧 구원의 약속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어 차단되었던 복이 공급이 되어 이제 내가 스스로 나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는 의미이며, 그러한 자들은 다른 이들을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적대시 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오늘 말씀이 사랑, 믿음으로 자라나 굳세어져 내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깨끗하다 하시는 주님이 내편임을 잊지 않고, 율법(제사와 윤리)의 눈으로 빤히 보는 이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영광)가, 아버지의뜻(사랑)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