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1일 금요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루카 6,39-42)
제1독서<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1코린9,16-19.22ㄴ-27)
16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2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27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 84(83),3.4.5-6.12(◎ 2)
◎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 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영혼 여위어 가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과 이 마음 환성을 올리나이다. ◎
○ 당신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
○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행복하옵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 떠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
○ 주 하느님은 태양이요 방패이시니, 주님은 은총과 영광을 주시나이다. 흠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을 아끼지 않으시나이다. ◎
복음<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 6,39-42)
39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제1독서(1코린9,16~19.22ㄴ~27)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4~25)
코린토 1서 9장 24절에서 27절까지는 운동 경기자의 비유와 사도 바오로의 모범을 통한 성도의 절제에 대한 권면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오로는 당시 많은 설교자들이 자주 비유를 드는 운동 경기 비유를 들어 절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교훈한다.
운동 경기는 희랍 세계에 매우 성행하던 것이었으므로 코린토 교인들에게 이 비유는 매우 잘 이해되었을 것이다.
특히 코린토 지역에서는 매 3년마다 이스트미안(isthmian games)가 개최되었는데, 이것은 올림피안 경기(olympian games), 피티안 경기(pythian games), 네미안 경기(nemean games)와 함께 희랍 4대 경기 중 하나였고, 주로 경마와 격투기 등의 경기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한편 여기서 '경기장'이라고 번역된 '스타디오'(stadio; a race)는 606.75 피트로 약 200m 길이의 단위를 일컫는 말이다. 이것이 나중에 큰 규모의 경기장, 곧 스타디움(stadium)이라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매 세번째 여름에 거행되었던 이스티미안 경기와 같은 경기들은 희랍 전 지역의 사람들을 운집시키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 바오로 시대에 헬레니즘 세계 전체에 대중화되었다. 따라서 대규모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우수한 경주자들이 참가하였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 경주 만을 위해 먹고 자고 훈련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기에 참가하는 모든 선수들간의 경쟁 의식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그 경기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명성과 가문의 영예를 안겨주는 것이었다.
또한 사도 바오로의 시대에 작은 지방의 경기에서는 몇 사람에게 상이 수여되었지만, 이 구절에서 코린토 교인들을 염두에 둔 큰 경기에서는 오직 한 사람에게만 상이 주어졌으며, 따라서 2위나 3위를 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상은 최후의 승리자 오직 한 사람에게만 수여된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인들을 향해서 이러한 경기의 규칙을 '여러분은 모릅니까?'하고 묻는다.
이것은 당시 코린토 교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경기 규칙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당시의 운동 경기를 바로 복음을 증거하는 자신의 생활에 적용시키는 동시에 코린토 교인들의 영적 상황에 연결시켜서 '이와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라고 권면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 비유를 통해 모든 성도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목표를 향해 여전히 달려가는 도상적 존재이며,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절제'가 필요함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어떤 누구도 자신의 모습을 이미 다 완성된 존재라거나 더 이상의 진보나 발전이 필요 없는 존재라고 주장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코린토 교인들은 너무나 영적으로 교만해서 더 이상 영적 진보가 필요 없는 것처럼 행동했고, 더 이상 목표가 필요 없는 존재처럼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들이 과거에 안주하는 삶을 떨쳐 버리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야만 하는 존재이며, 절제함으로써 신앙 생활의 향상을 이루어야 하는 자임을 보여주고자 이러한 비유를 들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여기서 '경기자'에 해당하는 '호 아고니조메노스'(ho agonizomenos; who competes in the games)는 '경기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라는 뜻인데, 이것은 운동 경기에 참가하고 있는 자를 지칭하며, '경쟁하다','격렬히 몸부림치다' 라는 뜻을 지닌 '아고니조마이'(agonizomai)에서 파생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육상 경기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기에 참가하는 자를 말하며, 26절에 나오는 권투까지 포함한다. 그런데 어떤 경기이든 경기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면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서 '절제를 합니다'로 번역된 '엥크라튜에타이'(engkrateuetai; is temperate; goes into strict training)는 '훈련하다','자제하다'라는 뜻을 지닌 '엥크라튜오마이'(engkrateuomai)의 현재 직설법이다.
불변의 진리나 격언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현재형이 쓰인 것은 훈련이나 절제가 당시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에게는 매우 당연하고도 통상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절제란 자기 자신을 정복하다는 뜻인데, 당시 운동 선수가 우승하기 위해 숙련된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10개월 이상 훈련했던 사실과 금주, 엄격한 절식, 식이요법, 성(性)생활의 절제도 요구되었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운동선수의 '절제'를 코린토 교인의 '무절제'와 대비시켜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코린토 1서 5장에 제기된 음행의 문제, 6장에 제기된 세상 법정에서의 소송 문제, 7장에 제기된 혼인의 문제, 결정적으로 8장에 제기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섭취에 대한 비난이 바로 그것이다.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운동선수들은 고된 훈련과 절제 속에서만 승리의 화관을 바라볼 수 있다. 여기서 '화관'으로 번역된 '스테파논'(stephanon; a crown)은 '경기에서의 우승을 뜻하는 화관(면류관)' 또는 '화환을 머리에 두르다'는 뜻을 지닌 '스트레포'(strepho)에서 나온 명사로서 라틴어에서는 '코로나' (corona)로 번역되었다.
코린토에서는 각종 경기의 승자에게 솔잎이나 어린 파슬리 잎으로 만든 면류관을 수여했고, 올림피아 경기에서는 야생 감나무 잎으로 만든 화관을 수여했다.
이러한 화관들이 전 희랍 세계에서는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는 명예를 상징했지만, 솔잎이나 파슬리 혹은 야생 월계수 나무로 만든 화관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급기야는 썩기 마련이며, 경기에서의 우승자의 영광도 역시 잊혀지고 덧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 화관을 '썩어 없어질'에 해당하는 '프타르톤' (phtharton; corruptible) 화관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썩어 없어질 화관을 향한 세상의 운동 선수들의 노력이 대단한데, 하물며 영원히 바래지 않고 '썩지 않는'('아프타르톤'; 'aphtharton; an incorruptible) 종말의 영광의 상급을 바라보고 사는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노력과 영성 훈련, 그리고 절제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하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간절한 가르침인 것이다.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복음(루카6,39~42)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1)
이 구절은 '형제의 눈 속'과 '네 눈 속' 그리고 '티'와 '들보' 그리고 '보면서'와 '깨닫지 못하느냐'가 서로 대구를 이루는 매우 기교적 문장이다.
여기서 '티'에 해당하는 '카르포스'(karphos; mote; the speck of sawdust)는 '시들다'는 뜻이 있는 '카르포'(karpho)에서 유래하여 지푸라기나 왕겨 등을 의미한다.
반면에 '들보'에 해당하는 '도코스'(dokos; the bean; the plank)는 '받치다', '지탱하다'는 의미가 있는 '데코마이'(dechomai)에서 유래하여 건물을 바치는 기둥 혹은 서까래를 의미한다.
타인의 조그마한 결점을 상징하는 '티'와 자신의 큰 허물을 상징하는 '들보'라는 서로 대조되는 단어를 대구시킴으로써 이 구절의 내용이 강조된다.
인간의 눈 속에 지붕을 받치는 재목을 가리키는 들보가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것은 매우 심한 과장법이다.
이러한 과장법을 통해 예수님께서 전달하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타인의 작은 도덕적 잘못이나 교리적 오류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예리하게 지적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갖고 있는 더 큰 잘못, 즉 마치 들보와 같은 결함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음을 과장법을 사용하여 신랄하게 지적하신 것이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들보와 같은 결함은 바로 자신이 가진 죄악을 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와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는 가혹한 마음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구절에 나오는 동사들이 모두 2인칭 단수로 쓰였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당신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개개인이 바로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일일이 지적하는 심정으로 사용하고 계신 것이다.
[2020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루카 6,37-42)
37 '남을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 용서는 예수님께서 나와 너, 그 우리의 죗값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받는 것, 그 우리, 서로가 받은 용서이기에 그 누구도 심판과 단죄를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 십자가로 받은 용서, 그 진리의 복음을 나누며 서로 용서 받았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용서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38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 하느님의 약속인 십자가의 용서, 그 구원의 말씀을 후하게 주시라는 것, 예수님은 하느님의 구원 그 한 가지 일만, 한 가지 말씀만 하셨다.(요한7,21참조)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한가지 일, 구원의 약속의 책인 것이다.
(에페2,1-9) 1 여러분도 전에는 잘못과 죄를 저질러 죽었던 사람입니다.
=죄의 상태가 영의 죽음인 것이다.
2 그 안에서 여러분은 한때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곧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 안에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다 한때 그들 가운데에서 우리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본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4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6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 그런데 사람의 의로움, 사랑을 흘려 넘치게 주는 그 도덕과 윤리의 가르침을 받게되면 영원한 죽음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비유의 말씀을 주셨다.
39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 육이 원하는, 곧 세상의 재물과 명예(의로움) 그 뜻을 위한 인간 중심의 가르침을 받으면 함께 지옥이라는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뜻, 생각, 그 길이 아닌, 하느님의 뜻, 길인 영원한 생명의 가르침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하느님의 말씀(뜻)을 듣기 싫어한다.
(2티모4,2-4) 2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 가르치는 지도자(사제)나 듣는 신자들이나 하느님의 말씀보다 나타나는, 발현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신앙으로 따른다는 것이다.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 제자는 자신의 말(계명)이 아닌 가르침을 받은대로 스승(예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 그것이 스승 예수처럼 되는 것이다.
(이사55,8)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티토1,13-14) 13 이 증언은 참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하게 *꾸짖어 그들의 믿음이 건전해져서, 14 유다인(사람)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율법(윤리)의 눈, 그 법(죄-들보)의 눈을 깨달아라 하시는 것이다.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 율법의 눈, 그 들보를 버리라는 것, 의인이 되고자 하는 그 법이 오히려 심판과 단죄로 죄를 만들어 내는 위선인 것이다.
(로마3,20-22)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의 복음, 그 진리의 눈으로 봐야 형제, 이웃에게 용서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