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4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귀먹고 말 더듬는 이 (마르 7,31-37)
아히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솔로몬의 손에서 나라를 찢어 그중에 한 지파만을 솔로문의 아들에게 남겨 둘 것이라고 한다. (1열왕11,29-32; 12,19)
29 그때에 예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가다가 실로 사람 아히야 예언자를 길에서 만났다. 그 예언자는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들에는 그들 둘뿐이었는데,
30 아히야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 옷을 움켜쥐고 열두 조각으로 찢으면서,
31 예로보암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열 조각을 그대가 가지시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제 내가 솔로몬의 손에서 이 나라를 찢어 내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겠다.
32 그러나 한 지파만은 나의 종 다윗을 생각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내가 뽑은 예루살렘 도성을 생각하여 그에게 남겨 두겠다.’”
12,19 이렇게 이스라엘은 다윗 집안에 반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화답송 시편 81(80),10-11ㄱㄴ.12-13.14-15(◎ 11ㄱ과 9ㄴ 참조)
◎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
○ 너에게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낯선 신을 경배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님, 너의 하느님이다. 너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 올렸다. ◎
○ 내 백성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은 나를 따르지 않았다. 고집 센 그들의 마음을 내버려 두었더니, 그들은 제멋대로 제 길을 걸어갔다. ◎
○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나 그들의 원수들을 당장 꺾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적들을 치리라. ◎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어루만져 주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다. (마르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1열왕11,29-32;12,19)
"그때에 예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가다가 실로 사람 아히야 예언자를 길에서 만났다. 그 예언자는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들에는 그들 둘뿐이었는데 " (29-30)
'아히야'(ahiya)는 '주님의 형제' 라는 뜻이다. 그는 에프라임 지파의 성읍인 실로(shiloh)의 사제 가문 출신으로 다윗과 솔로몬 초기에 활동했던 나탄 예언자의 뒤를 이어, 르호보암 시대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대변함으로, 이스라엘에 큰 영향을 끼친 충실한 선견자였다.
그는 일생동안 철저히 하느님만을 따랐으며, 훗날 예로보함이 하느님께 범죄하였을 때까지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냉철하게 그에게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전했다.(14,1-13)
새 성경은 예로보암이 아히야 예언자를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원문은 반대이다. '와이므차 오토' (waimtsa otho)는 '그를 만나니'로 번역되는데, '만나니'에 해당하는 '와이므차'는 '발견하다' (창세36,24), '찾아내다' (1사무12,5)라는 뜻을 가진 '마차'(matsa)의 단순 능동태(Qal)에, 행동이 즉각적으로 이어짐을 나타내는 계속적 '와우' (wau)가 결합된 형태이다.
그러니까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그를 찾아내었다.' (that ,,,, found him)이다. 이것은 두 사람이 자연스럽고 우연하게 만난 것이 아니라, 예언자 아히야가 적극적 의지를 갖고 예로보암을 찾아가 만났음을 나타낸다.
예언자 아히야가 보여주는 이같은 신탁에 대한 적극적인 증언 자세는 솔로몬에 대한 예로보암의 반란이, 단순히 지파간의 갈등 즉 세력 다툼의 과정에서 빚어진 정치적 결과물이거나, 한 개인의 야심 즉 예로보암 자신의 탐욕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예로보암을 사용하셔서, 솔로몬의 죄악을 징계하시기 위한 목적에서 발생한 심판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예언자는 '새 옷'을 입고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새 옷'(새 의복)은 남북으로 분열된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이 신생왕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징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입은 적이 없는 새 옷은 앞으로 이루어질 심판이 어떤 인간적인 요소의 개입됨이 없이, 오로지 하느님에 의해 비롯되고 준비될 것이라는 신적 기원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옷'으로 번역된 '살르마' (salma)는 어떤 사람의 신분을 드러내는 정식 의복이라기 보다는 밤에 덮고 잘 수 있는 '담요' (신명22,17)나 물건을 쌀 수 있는 '보자기'(1사무21,9)를 의미하는 물건이다.
그러니까 아히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효과적이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찢기에 용이한 담요같은 것을 의도적으로 걸치고 왔음을 뜻한다.
"아히야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 옷을 움켜쥐고 열두 조각으로 찢으면서" (30)
찢어진 옷을 통해 왕권의 이동을 상징하는 것은, 이미 예언자 사무엘이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달할 때에도 사용된 바 있다.(1사무15,27-29)
그러나 솔로몬의 경우는 사울의 경우와 차이가 있다. 사울은 사무엘 예언자로부터 폐위 선고를 받고, 급한 나머지 사무엘을 붙잡는 과정에서 그 옷이 찢어져,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심판의 결과를 스스로 드러낸 반면, 여기서는 예언자 아히야가 스스로 자신의 옷을 잡아서 찢음으로 하느님의 강력한 심판 의지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대리인이기 때문에, 본문의 행동은 하느님 자신의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열두 조각'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데, 결국 이스라엘 왕국 분열이란 우연한 사건이거나 사람의 계획에 의한 결과가 아니고, 하느님의 주권적 계획과 의지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열조각을 그대가 가지시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제 내가 솔로몬의 손에서 이 나라를 찢어 내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겠다. 그러나 한 지파만은 나의 종 다윗을 생각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내가 뽑은 예루살렘 도성을 생각하여 그에게 남겨 두겠다.'" (31-32)
열두 조각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데, 유다와 유다지파에 흡수된 시메온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열 조각)를 예로보암에게 허락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가르시는 하느님의 주도적 행위를 통하여, 예로보암이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왕권을 획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솔로몬의 손에서 ~~너에게 주겠다' 에서 '손'은 '야드'(yad)로서 단순히 인체의 한 부분을 지칭하는 경우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관용적으로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책임, 돌봄 그리고 지배를 포함하는 권한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된다. 그러니까 솔로몬의 권세와 관할 에서 이스라엘의 10지파를 취하여 너에게 준다는 말이다.
예로보암은 요셉 지파의 공사를 독려하고 감시하는 일개 감독으로서, 통일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솔로몬의 거대한 권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조그만한 권세를 가진 자인데, 전능하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 친히 약속하시고, 그분의 손에 의해 시행될 사건이기에, 하느님꼐서 친히 솔로몬의 권능을 파하여 그의 관할 아래있던 10지파를 찢어내어 예로보암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 지파만은" 솔로몬에게 남겨둔다는 말이 나오는데, 12지파에서 10지파를 빼니, 두 지파가 남는다. 그런데 한 지파라고 말하는 것은, 시메온 지파와 유다 지파를 하나의 지파로 보았기 때문이다.
과거 야곱이 그의 아들들에 대하여 예언할 때, 레위 지파와 더불어 시메온 지파는 흩어져 버림을 당할 것으로 예언되었다.(창세49,5-7) 이 예언대로 시메온 지파는 한 지파로서의 독특성을 잃어 버렸으며, 유다 지파에 할당된 지역인 남부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여호19,1-9)
따라서 여기서도 시메온 지파는 유다 지파와 한 지파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다윗과의 계약을 지키시기 위해, 이스라엘의 일부를 다윗 후손의 통치하에 남기셨음을 의미한다.
열 지파를 받은 예로보암에 비교하면, 다윗 왕조의 왕권은 극히 미약하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위를 영원히 보존하시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성실히 수행하셨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하느님의 약속은 다윗의 계보를 통하여 나신, 영원한 왕이시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성취되고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다.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복음(마르7,31~37)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2~34)
'데카폴리스'에 해당하는 '데카폴레오스'(Dekapoleos; of Decapolis)는 숫자 '십'(ten)을 뜻하는 '데카'(deka)와 '도시'를 가리키는 '폴리스'(polis)가 결합된 형태로서 '열 개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 도시들은 갈릴래아 호수 동쪽에 위치한 대부분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헬라화된 열 개의 도시들을 말한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다른 복음사가들이 언급하지 않은 지역을 소개하는 것은 이방인에 대한 주님의 관심을 나타내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마르코 복음 7장 31~37절과 병행 단락인 마태오 복음 15장 29~31절에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 말고도, 예수님께서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 여럿을 치유하신 것으로 나온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광범위하게 기록한 반면에,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에서 행하신 치유 중에서 대표적인 한 사건만을 정선해서 그 치유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여기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한 사람인데, '말더듬는 이'로 번역된 '모길랄론'(mogilalon; had an impediment in his speech; could hardly talk)의 기본형 '모길랄로스'(mogilalos)는 '어렵게'라는 뜻의 부사 '모기스'(mogis)와 '말하다'는 뜻의 동사 '랄레오'(laleo)에서 유래하여 '말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말더듬는 이'는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벙어리'라는 뜻보다는, 비록 어느 정도 소리를 내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상태로서 말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 7장 35절에서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손을 얹어 주십사고'
유대 사회에서는 '손을 머리에 얹어 하는 기도'를 가리키는 안수(按手)는 널리 베풀어졌다. '손을 얹어'에 해당하는 '에피테 아우토 텐 케이라'(epithe auto ten cheira; put his hand upon him; place his hand on him; lay on by hands)는 상속권 수여(창세48,14-20), 직책 수여(민수27,18.23), 축복(마태19,13.15) 등을 위해서도 베풀어졌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건강 회복을 위한 안수(마태9,18; 사도9,12.17)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는 단순한 안수가 아니라, 마르코 복음 7장 33절에 나오는 데로 행동을 통해 그 병을 즉각적으로 완전하게 고쳐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신다. 여기서 '따로'에 해당하는 '카트 이디안'(kat' idian; aside)는 '사적으로'라는 뜻의 관용어로서 비밀리에 행한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비밀리에 그를 고쳐 주시려고 한 것에 대해 학자들마다 의견이 많다.
환자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나누기를 원하셨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보고 군중이 흥분해서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숨기기 위해서, 또한 군중 가운데서 호기심만을 추구하는 이들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예수님께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치유하실 때에는 말씀으로만 하셨는데 (마르7,29.30), 여기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당시 사람들에게 침은 치료의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리고 아픈 부위에 손을 대는 것도 흔히 행하던 방법이었다.
예수님께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을 때, 그리고 침을 발라 혀에 손을 대셨을 때, 이 병자는 예수님의 극진한 자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에게 말씀하신 당신 치유의 손길을 직접 느끼게 하셔서, 치유된 후에도 당신 사랑과 축복의 생생함을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여기서 '한숨을 내쉬신'에 해당하는 '에스테낙센'(estenaksen; he sighed; with a deep sigh)의 기본형 '스테나조'(stenazo)는 '좁은'이라는 뜻의 형용사 '스테노스'(stenos)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스테나조'(stenazo) 동사는 '매우 답답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이 동사는 사람의 심정을 답답하게 하는 외적 요소에 의해 심적으로 몹시 압박감을 받는 상태(로마8,23)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귀먹고 말더듬는 것'에 대해 심적으로 압박감을 느끼셨다는 말인데, 그만큼 큰 사랑과 관심을 갖고 계셨다는 뜻이다. 이러한 매우 답답한 상태는 마르코 복음 7장 34절 후반부의 '열려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에파타'(aphphatha)는 문자적으로 '완전히 열리다'는 뜻의 아람어 (예수님의 모국어) 음역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방인 독자를 위해 희랍어 동사 '디아노이크테티'(dianoichtheti; be opened)로 풀어 주고 있다. '디아노이크테티'(dianoichtheti)는 '열다'(루카24,45)는 뜻의 동사 '디아노이고'(dianoigo)의 수동태 명령법으로서 '너는 열려져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귀가 먼저 열려지고, 그 다음으로 혀의 묶인 것이 풀리는 것을 뜻하지만, 앞의 예수님의 마음이 답답한 상태를 가리키는 '한숨을 내쉬신'과 대조된다는 점에서 '열려라'의 의미는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병자의 전체적인 상황이 풀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