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주교의 실패
함석헌은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이 빠져 있는 무속신앙의 심성을 바꿔야만 이 나라의 운명이 바뀐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에서 불교는 무속신앙과의 타협으로, 유교는 담론에 머물러 개조에 실패했다고 한다. 천주교는 새로운 사조임에 틀림없으나 그 자체의 귀족주의적 속성으로 민중의 교육에 소홀히 하여 한민족의 심성을 개조하는 데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신교는 무속신앙(=토속신앙과 풍속)을 철저히 부인하고 이를 교육으로 전파하였기에 대한미국에서 성공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함석헌의 이 말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함석헌이 기독교계의 대들보이고 대한민국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점을 고려할 때 그의 평가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독교는 우선 믿고 그 다음에 알면 된다고 한다.
천주교는 알면 자연스럽게 믿음이 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3개월 ~ 12개월의 교리교육후에 영세를 받아 정식 신자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영세를 받은 신자의 25%만이 미사에 참례한다고 미사 참례율 올리기 운동을 한다. 개신교는 수천명씩 주일 예배에 참여하고 재산을 내놓아 대형교회를 빚없이 짖고 있다.
개신교신자들은 제사에 와서 절은 커녕 제수만드는 것에 동참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점집에 안가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
나의 의문은 이렇다.
왜 영세받은 신자의 25%만이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가?
왜 천주교는 성당을 지으면서 빚을 얻고 그 빚을 갚는 데 어려움을 겪는가?
왜 천주교는 자선에 기독교보다 인색한가?
| 우리 천주교를 개신교와 결코 비교할 수는 없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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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성공한 개신교에 대비해 실패한 천주교의 사례를 언급한 함석헌 옹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내용을 한민족의 장래를 바라보면서 긍정적 시각에서 바라보고자한다.
현실의 문제로 일단 접수한 상태라야 미래를 볼 수 있음을 밝혀둔다.
영세 받은 자의 25%만 주일 미사 참례는 우리 모두의 탓이라기엔 문제의식을 흐리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부풀릴 필요는 없지만 사제 수도자의 몫이 너무 많다.
개신교 관련 목사 또는 그 제 조직에 비해 우리의 성직자의 사목 자세에 그 첫 원인을 두고자한다.
이 미사 참여인원과 교무금 납부 세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여기서 파생되는 게 ‘성당을 지으면서 빚을 얻고 그 빚을 갚는 데 어려움을 안고’와
‘천주교는 자선에 기독교보다 인색’한 게 자연 따라오는 파생적인 문제라 여겨진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제언을 총합적으로 생각해야 될 것 같다.
그 주된 원인은 성직자의 안일한 사목 방침이다.
꼭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세 가지 제안은 비단 함석헌 옹이 본 내용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중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푸는 유일한 방법은 성직자의 너무 안일하다는 사목 방침을 제고해야 한다.
모든 게 성직자 중심으로 본당 또는 가톨릭 제 조직의 운영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주인 의식의 결여로 직결된다.
대부분의 성직자는 철저한 임기주의로 일정 기간이 끝나면 다른 임지로 떠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당 또는 제 조직은 평신도 중심이지 성직자 중심이 아니어야 한다.
너무 성직자 중심으로 모든 활동이 전개되어 책임 의식에 한계가 있다.
그리고 선교에 있어서는 성직자마저 너무 무사 안일주의에 젖어있다.
그 주된 요인이 수동적 복음화이다.
찾아오는 신자 만들기에만 급급하다.
찾아 나서는 것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이라 다들 외면한다.
어쩜 양면이 조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상의 총괄적 문제점을 떠나 각론에서의 문제점을 몇 가지 제안하고자한다.
1. 성직자는 본당 또는 제 단체의 인사권에 개입하지 말아야한다. 본당의 주인은 평신도이고 사제는 분명히 그곳의 손님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2. 본당 조직은 사목회 조직으로 운영하고 독립된 감사 기능을 두어 투명성을 갖도록 해야 한다.
3. 각 지역별 교리 교육을 전담할 수 있는 조직을 활성화시켜 교리의 편리성을 도입하여 영세 받기가 쉬운 시스템을 갖추도록 하자.
4. 본당별 기존 봉사 조직을 지역 제 단체들과 연계하여 지역/종교/제 활동 단체가 결합된 봉사 조직을 활성화시켜 지역 선교 복음화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5. 본당 또는 제 단체의 유급 또는 무급 근무자의 경직된 근무 자세와 봉사 정신 미흡으로 복음화의 걸림돌이 많이 발생하는 것을 감안해 봉사자의 순환근무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지금껏 열거한 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견해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리고 이 의견들은 여러 조직의 특수성에 따라 정면 배치되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게다. 오히려 반대 내지는 불안 요소가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랄뿐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개신교가 천주교보다 훨씬 좋다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어쩜 지금의 가톨릭이 안고 있는 이 문제가 종교계의 진정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자칭 문제없다고 개신교가 떠벌이는 그곳에 사실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을 수 있다.
그건 각자의 판단 몫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문제도 문제로 보고 접근해 볼 필요는 있다.
그쪽도 그 나름의 문제가 정말 많이 있기에 우리 천주교를 저네들 개신교와 결코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 것도 문제라고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종교 단체는 성과주의가 최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결코 망각하지말자.
다시 한 번 더 이 의견은 단지 참조이라는 것을 거듭 밝히면서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김종업 (rlawhddjq) (2012/12/27) : 명쾌하고 좋으신 지적에 감사드립니다.~문제는 지적에 끝나지 말고 각자 자기가 처해있는 본당 사목에 동참하여 함께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그저 남의말 하듯 말로만 끝난다든가 남의 이야기 하듯 바라만 본다면 아무런쓸데가 없어요. "기쁜소식을 전하는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나부터 실천해 보겠습니다. 아주 작은일에서 부터요~감사합니다.
이정임 (kr3217) (2012/12/27)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영세받은" 이라고 표현하시면 "역전 앞"이라고 쓰시는 경우와 같습니다. 영세는 세례를 받는 일이거든요. 그러므로 영세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영세 했다고 표현하며 세례를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그리스도교를 한자 문화권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가톨릭도 개신교도 다 기독교입니다.
왜 천주교가 그러한지 먼저 자신에게 물어 보시는 것이 더 순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고 참례하고 있는가? 나는 성당을 건축할 때에 건축 기부금을 얼마를 냈는가? 그리고 나의 삶을 돌보아 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감사미사와 감사 헌금은 얼마를 드렸는가? 또한 나는 불쌍한 이웃에게 적어도 일년에 얼마 정도 기부를 했는가?" 그러시면 답이 그냥 나올 것 같은데...
아닌가요? 궁금한 내용 속시원하게 해결하셔서 주님의 평화를 누리시길 빕니다. 얼마나 그것들이 궁금하셨으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의견을 구하셨을까 싶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또한 천주교의 예비신자 교리 교육에 관하여도 좀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바오로 형제님으로 알고 있는데 왜 세례를 받기 전에 교리교육을 시키는지를 잘 모르시는 것 같으십니다.
알아야 믿음이 생기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모르신다는 말씀이신지요?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믿었기에 가톨릭 교회에 이미 입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면 자연스럽게 믿음이 온다고 하시는 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렇게 예비신자분들이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왔기에 그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를 알려 드리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알려 드리며 그동안 세상 속에 살면서 해보지 않은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등과 많은 가톨릭 교회에 관해서 알려 드리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그러한 과정 안에 있어도 가톨릭 신자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매일 또는 매 주일마다 영하지 않지만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영하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가르쳐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애쓰고 노력해서 세례를 받고 왜 신자의 25% 만이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기도와 성경을 통한 하느님 현존 체험의 부족이라고 저는 그동안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인생에 직접 개입하셔서 나를 당신이 그토록 주시고자 하시는 구원으로 이끄시려고 애쓰심을 느끼지 못하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본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만 주님께서 부르셨고 당신의 말씀을 들려 주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아브라함과 같이 부르셨고 아브라함에게 하시듯이 우리들에게도 말씀을 건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은 아브라함은 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가? 저는 이렇게 그동안 묵상해 보았습니다. 체널이 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흔한 TV를 보려해도 어떻게 합니까? 먼저 TV를 사야하고 전기코드를 연결해야 하고 전원을 켜야 하고 내가 보고 싶은 체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렇듯이 주님을 만나려면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들은 그러한 것을 애써 준비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성경을 읽기를 즐겨 해야 하고 기도 시간을 적어도 하루에 30분 이상 내어드려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을 내어 드리고 기도 자리에 않아야 하지만 많은 경우 성경은 물론 기도자리에 앉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이 생기는가? 감사하는 생활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 자리에 앉아 하루 동안 주님께서 나와 우리 가정에 어떻게 역사하셨고 어떠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묵상하며 감사를 드려야 하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늘 충만하기에 늘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복을 누린다면 오지 말라고 해도 주일 미사는 물론 평일 미사도 참례하러 갈 것입니다.
이상은 그동안 저의 삶을 통한 나눔이었습니다. 긴 답글로 실례를 했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