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을 저주한 이유

2012. 12. 13. 오후 8:28:22

글자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

창9:25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에게 천대받는 종이 되어라."
어떤 데는 ‘너도 아들로 인해 고통 받아 보라’는 의미에서 가나안을 저주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럴 수도 있지만 함의 아들은 4명으로 나와 있다.   창10: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성경은 또한 특별히 가나안이 저주 받기 전 함을 가나안의 아비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 순서대로 보면 가나안은 함의 막내아들이다.   그런데도 노아는 특별히 가나안을 저주하였다.  그리고 가나안의 족보에 대해서도 특별히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노아의 축복과 저주의 효과는 아브라함 세대에 와서야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더욱 명확히 나타난다.

사실 가만히 생각 해 보면 아브라함의 계보를 잇는 셈의 족보나 야벳의 족보나 함의 족보나 별 차이점이 없다.   노아 홍수 이후 이들을 통해서 세상 각 나라와 민족이 퍼져 나갔다.   그들은 노아 이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잊어 갔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조상들마저도...

노아 이후 퍼져 나간 각 나라와 족속 중 아브라함 외에는 어느 누구도 선택받지 못했다. 다시 말해 모든 민족이 저주를 받은 것이다.
축복을 받은 셈과 야벳의 족속 중 유일하게 셈 족속의 후예 아브라함만이 선택받은 것이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계보 중에서 어디까지 믿음을 지켰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의 저주받은 것을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모세오경 중의 하나인 창세기가 쓰인 시점의 시대적 배경인 것 같다.

가나안의 저주를 언급하므로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의 당위성(물론 아브라함이 헤브론 막벨라 굴을 매입한 것도 당위성의 하나이지만...)과 또한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두려움을 없애게 하려는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를 느낄 수 있다.

또한 가나안의 저주는 현대까지 내려오는 사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가나안의 저주는 ‘새로 형성된 가인 족보에 대한 저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인 승리를 예언하고 있다.

창9장 26 그는 또 말했다. "의 하느님, 야훼는 찬양받으실 분, 가나안의 종이 되어라.  27  하느님께서 야벳을 흥하게 하시어 의 천막에서 살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어라."




왜 함 대신 가나안을 저주했는가?

[질문] : 최근 창세기 9장 말씀의 노아의 포도주 사건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하체를 드러냈을 때 함이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아마도 조롱하는 투로) 알리자 셈과 야벳이 아버지에게 치욕을 주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아버지를 덮어 주는 장면, 그리고 노아가 깨어나 사건의 전모를 알고 저주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읽다 보니 어딘가 좀 이상하다 싶은 부분이 있어서 해설을 듣고 싶습니다.

1. 25절에 보면, 분명히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조롱을 한 것은 함인데 노아가 저주하는 대상은 함의 아들 가나안입니다. 성경에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고 나와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죄를 잊지 않으신다는 의미이고 앞에 나온 인자를 천 대까지 베푼다는 것이 더 강조되어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을 강조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노아는 거의 가나안으로부터 나오는 족속 전체를 저주한 듯 보이고 실제로 성경에서도 가나안 자손은 죄다 노예가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째서 함이 아닌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으며, 그것도 가나안의 후손 전체가 저주를 받게 되었나요?

2. 아버지 노아에게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셈과 야벳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27절에는 하나님께서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말은 셈 아래로 들어가 셈의 축복을 누린다는 의미로 보여 지는데, 셈이 장자이기 때문에 더 많은 축복을 가져간 것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저의 해석이 잘못된 건가요?

 

  [답변] : 성경난제 해석의 두 원칙

 질문하신 주제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기록된 부분 내에서도 불합리하고 모순되는 상황이 노정되는 경우가 성경에는 종종 나옵니다. 합리적 유추가 힘든 성경 난제들을 해석하는 원리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성품에 바탕을 두고 접근해야 합니다. 둘째는 성경에 명확하게 계시되어 있는 여타 영적 원리나 다른 구절들과 비추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인간과는 달리 완전하게 공평하신 하나님이 모순되고 불합리한 처사를 할 리는 결코 없습니다. 그분의 저주에 불공평성이 개입될 여지는 추호도 없습니다. 비록 인간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했지만 성경에 기록된 전후 사정에 따르면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가나안이 하나님께 벌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벌 받았을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비의 악행을 삼사 대까지 보응한다는 말씀에 대한 질문자님의 생각은 옳습니다. 하나님에게나, 원죄라는 성경 원리에 아비가 공산당이면 아들도 빨갱이 취급하는 것 같은 연좌제는 결코 적용되지 않습니다. 구원과 심판은 반드시 개인별로 이뤄질 뿐입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아들의 이빨이 시지 않는 법입니다. [성경문답] /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는가요? 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이 굽어지게 만드는 해석은, 해석자의 의도가 전혀 그렇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해도, 틀린 것입니다. 또 아비 함의 죄 때문에 아들 가나안이 벌 받았다는 해석도 잘못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 설명이 논리적으로 그럴싸해도 하나님의 성품과 성경적 원리에 비추어서 당연히 배제 되어야 합니다.

 

왜 함은 저주 받지 않았는가?

 이에 관해선 많은 의견들이 있으나 대표적인 몇 개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함이 받을 형벌의 가혹함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려고 가나안으로 대표되는 그 후손들을 저주한 것이라고 합니다. 함이 노아의 막내아들인 것 같이 가나안도 막내이므로 같은 원리로 벌을 받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 두 해석은 아비가 받을 벌을 무죄한 아들에게, 그것도 같은 막내아들이라는 이유로 내리는 하나님이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성경 원리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기계적인 하나님이 되어버리기에 잘못된 해석입니다.

가나안이 아비의 수치를 먼저 보고 아비 함에게 일러바쳤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 해석은 하나님 심판의 공평성에 대한 변증은 분명히 됩니다. 상당한 타당성과 가능성이 있는 유추이긴 하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자의적으로 유추했다는 약점이 생깁니다.

노아는 예언의 은사를 통하여 장차 가나안 족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실제로 25-27절에 나타나는 가나안과 셈과 야벳이 문맥상 의미로는 그 개인보다 종족 전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선지자들이 장래 일을 예언하는 예가 종종 있기에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렇게만 해석하면 함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는 모순이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가나안도 이미 죄악에 빠져서 함과 같은 잘못을 평소에도 잘 저지르고 다님을 조부인 노아가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드시 본인의 잘못에 따라 벌하는 하나님 심판의 공평성에 비추어 볼 때에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함이 저주 받지 않은 이유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결정적 난점에 대해 "Hard Sayings of the Bible"(성경의 난제들, Kaiser, Davids, Bruce, Brauch 공저, IVP 1996 발간)이란 책에 아주 타당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노아는 그의 아들을 저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함과 그의 두 형들은 노아와 함께 하나님이 이미 축복한(창 9:1)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노아든 어느 누구든 그 축복을 저주로 바꿀 수는 없다. 민수기 22-24장의 발람의 예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p.117, 필자 번역)

함이 노아에게 잘못을 범한 당사자이기에 벌 받아 마땅하지만, 노아로선 이미 하나님이 직접 축복한 그를 저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나안은 아비와 같이 동일한 죄의 성향을 보이기에 그를 저주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 여타 기록에 따른 해석이기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이 택정하여 은혜로 주신 구원이 취소 불가능함을 이미 여기서도 예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만약 함의 잘못으로 그 후손이 다 벌 받아야 한다면 성경은 다른 아들들도 함께 언급해야 합니다. 창10:6에 따르면 함에게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의 네 아들이 있었는데 노아는 가나안만 지적해서 저주했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었고, 가나안만 평소에 죄를 많이 범하는 줄 노아가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해석에 더 타당성이 붙습니다.

상기에 인용한 책에선 가나안의 잘못을 함과 같은 성향 즉, 성적 문란함으로 해석하고 또 그런 성향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가나안 지역에선 그런 증거들이 굉장히 많이 발굴됩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고, 율법에서 성적범죄에 가장 가혹한 벌을 내리시는 이유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바로 그 지역에 있었으며, 성적으로 문란하기로 유명했던 로마제국조차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근동 지역을 정복한 후에 그들의 도가 지나친 성적 타락에 대해 놀랬다고 그 책에서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아가 성령의 간섭으로 예언한 것도,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가나안 족속이 저주를 받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옳습니다.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구체적 실현 여부보다는 노아 때에 이미 예언한 것이 달성되는데 장구한 세월이 흘렀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극단적로 타락한 그런 족속에게마저 한없는 인자와 긍휼로 회개하기를 오래 동안 기다려 주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은 애굽에서 사백년 간 노예 살이 시키면서도 가나안 땅에 죄악이 차고 넘칠 때까지 그 진멸을 미루었습니다.

 

성경의 이중적 예언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비교적 의견이 일치됩니다. 우선 노아의 손자 대에서 세부적으로 종족들이 나눠지지만, 세 아들 중에 야벳은 백인종, 셈은 황인종, 함은 흑인들의 조상으로 봅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고 해서 인종 간의 우열을 비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쉽게 말해 백인이 가장 우월하고, 황인은 그 다음에, 흑인은 맨 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현재는 백인종이 우월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역사를 따지면 거의 모든 문명의 발상은 오히려 셈족에 의해서였습니다. 최근에는 황인종의 도약이 두드러집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흑인들의 시대가 도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구절을 인종 간의 우열의 차이로 보는 것은 너무나도 비성경적이자 반역사적 해석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인종차별적 저주는 더더욱 아닙니다. 분명 가나안 족속만 저주받았지 구스의 후손인 아프리카 흑인들이 저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이 구절을 (의도적으로?) 오역해서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합리화시킨 잘못을 범했던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수치스런 오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후대에 이 두 제도를 금지시킨 사람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이자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노예제도는 영국의 윌리암 윌버포스에 의해, 인종차별은 미국의 마르틴 루터 킹 목사에 의해 폐지되었습니다.

본문은 문자적 의미 그대로 예언입니다. 성경에는 장래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그 본인은 구체적으로 전혀 몰라도 성령의 간섭으로 묵시적으로, 때로는 아주 생생한 묘사를 통해 예언하는 일들이 많이 나옵니다. 또 그런 예언들은 한 사건보다는 점층적으로 여러 단계에 걸쳐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는 "예언적 안목"(Biblical Prophetic Perspective) 혹은 "이중적 성취"(Dual or Dynamic Fulfillment)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본문의 예언도 역사적으로 수차에 걸쳐 달성된 것으로 봅니다. 먼저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절)의 경우를 봅시다. “종들의 종”이라는 표현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식 관용구입니다. 가장 비참한 종이라는 뜻이지 종들이 된 여러 종족들 밑에 있는 종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노예가 자기 밑에 노예를 둔다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입니다.

이 예언은 먼저 가나안 족속들이 셈 족인 이스라엘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또 비천한 종의 신세가 됨으로서 달성되었습니다.(수9:23, 왕상9:20,21) 정말로 “가나안은 셈의 종이”(26절) 되었습니다. 또 후대에 야벳 족속인 페르시아와 마게도니아와 로마 등에 의해서 가나안 족속인 페니키아가 철저히 정복당했습니다.

27절에서 우선 “야벳을 창대케 하사”의 문자적 의미는 넓은 공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벳은 14종족의 선조가 되었고(창10:2-5) 또 그 후손인 백인들이 헬라와 로마 제국을 이루었고 또 근대 유럽과 현대 미국에서 창대케 되었습니다.

또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는 주전 330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중근동과 페르시아는 물론 인도까지 정복해서 제국에 편입시킴으로써 달성되었습니다. 야벳이 셈의 장막(지역)에 거한 것입니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에서 ‘그’라는 대명사가 받는 의미가 애매합니다. 어쨌든 셈족으로 받으면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종이 된 것으로, 또 야벳으로 받아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달성된 셈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런 이중적 예언이 문자적 현실적으로 성취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영적인 진리도 자주 내포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와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구원이 셈 족속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셈이 장자라서 기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따른 택정이라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야벳을 그 장막에 거하게 하시되 창대케 한 후라고 말합니다. 셈의 장막은 당연히 하나님이 구속하시는 영적차원으로 보아야 합니다. 야벳 족속이 처음 얼마 동안은 셈 족속과 종교적 영적으로 분리되겠지만 나중에는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족속도 야벳의 종이 되므로 언젠가는 동일한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결국 이 저주의 예언은, 성경의 다른 저주의 예언들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당장은 심판으로 나타날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이끄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를 통해 모든 열방을 셈의 장막으로 모을 것이 즉, 이방인의 구원 계획이 선포된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하자 범죄 당사자들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지만 동시에 여자의 후손으로 구원하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이제 홍수 후에 노아의 가족만 있는 상황에서 인간들이 범죄 했지만 동일하게 궁극적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먼저 저주의 예언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오랜 인내 후에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이 유대에서 발원되어 사마리아를 통과하고 유럽을 거쳐 차츰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건너오는데 근 이천 년이 걸리긴 했지만 구원의 약속도 달성되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더디게 이뤄지고 여전히 세상에는 온갖 고난과 죄악이 넘치는 것 같아도,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으로선 주님을 다시 보내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역사 완성을 곧바로 내일이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셈의 장막 밖에 있었던(인종적 의미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우리로선 그 안으로 불러주신 은혜만도 평생을 두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항상 경성하여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세상과 사람 앞에 그분의 빛을 드러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처럼 정미하고 엄위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정으로 겸비해지고 또 주야로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에 감춰진 계시 No 15 (가나안을 저주한 이유!)

홍수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랜 기간을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나태한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노아는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날무를 심었고 그 포도의 소산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였습니다.(창 9:20-21)
그리고 그의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창 9:21)

홍수 이전의 노아에게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었겠지요?
이 때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합니다.  보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아’ 인데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도 함은 아비의 하체를 아주 자세히 관찰 한 것 같습니다.

충분히 못 본 척 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는 다른 두 형제에게 고합니다.  고하다’ 라는 단어는 반대편에서 말 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는 두 형제에게 그냥 말 한 것이 아니고 적대적인 위치에서 말 했습니다.

예를 들면 법정에서 말 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편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변호사... 다른 한 편은 반대편에서 죄를 들춰내며 정죄하는 검사...함은 변호사의 입장이 아닌 검사의 입장에서 두 형제에게 아비의 허물을 말 했습니다.   고하매’ 라고 번역 된 단어는 ‘비방하다’ 라고 번역 하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사실 엄격히 말하면 노아는 자신의 장막 안에서 벗었기 때문에 그 의 장막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 될 것 이 없습니다.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습니다.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보지 않고 정확하게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함의 정확하고 자세한 보고의 공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노아가 술이 깹니다.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창 9:24)  이 구절의 번역에 조금 의심이 갑니다.

노아는 오백세 이후에 아들 세 명을 낳습니다.(창 5:32)  기록된 순서는 셈, 함, 야벳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순서를 지킵니다.
그런데 첫 아들로 기록된 셈은 노아가 502세때 낳습니다.

"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창 11:10)  여러모로 보아도 야벳은 셈의 뒤에 출생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함은 출생 순서로 본다면 셈의 동생이 아니라 셈의 형입니다. 아마도 셈과는 두 살 차이가 날 것 같습니다. (출생 순서가 뒤집혀진 경우는 뒤에도 나옵니다 - 아브라함)   기록 순서가 출생 순서라 하더라도 함은 그 작은아들이 아닙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창 9:24)
여기서 그 작은 아들은 아마도 가나안을 말 하는 것 같습니다.  아들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 인데 '손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창 29:5절에서는 손자로 번역했습니다.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가로되 아노라(창 29:5)함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창 10:6) 그 중에 가나안은 제일 마지막에 이름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함의 작은 아들일 것 같습니다.

 추정해보면!

노아의 장막에서 벗은 모습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은 가나안입니다. 그 고얀놈은 그 상황을 아비 함에게 자세히 고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지! 그 아들에 그 아버지인지! 어쨌든 정말 둘은 닮았습니다.

함은 다른 두 형제에게...술 깨어 일어나 보니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조사 해 보니 가나안이 한 짓(광고-동네방네 소문 냈음)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노아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함의 네 아들 중에 가나안만 저주 받은 것을 보면 이 추정을 뒷받침 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셈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셈을 축복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데 바로 그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노아는 권위자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권위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계시하고 있습니다.   권위자는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 13:1)

가정의 가장에서 교회의 지도자, 국가의 통치자.... 
다윗은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분명 귀신들린 미친 왕임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우리는 잘 못된 지도자(권위자)를 볼 때 하나님의 때 보다 먼저 자신의 손으로 심판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윗의 행동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또는 권위자의 허물을 현미경으로 파 헤치는 것은 좋지 않은 태도이며 그것은 가나안, 함이 범했던 실수 이지만 큰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 들은 없는 것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옳지 않았습니다.

가정에서는 남편이 권위자입니다. 저는 결혼식 주례 설 때 남편의 말에 100% 순종하겠다고 약속 할 때 성혼 공포 합니다.
물론 남편에게는 자신의 목숨 보다 더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받지만...
남편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셈과 야벳은 허물을 보지 않고 덮었습니다. 그 것은 우리에게 중보기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위자의 허물을 위해 기도로 덮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직언은 필요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선지자의 사명을 받은 사람은 사람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외쳐야합니다. "이는 요한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마 14:4) 선지자로 부르심 받은 성도는 사람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그 대로 전해야만 합니다.

마라나타!

 

  3. 가나안에 대한 자주가 아프리카 문명의 후진성으로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것에서,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모습을 볼 수 있다


성경 비교표

개역판

공동번역판

창세기 9장

창세기 9장

노아와 그 아들들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1)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노아와 그의 후손

18    배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었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 19    이 세 사람이 노아의 아들인데, 온 세상 사람이 그들에게서 퍼져 나갔다. 20    한편, 노아는 포도원을 가꾸는 첫 농군이 되었는데, 21    하루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천막 안에 누워 있었다. 22    마침 가나안의 조상 함이 아버지가 벗은 것을 보고 밖에 나가 형과 아우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23    셈과 야벳은 겉옷을 집어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드렸다.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았다. 24    노아는 술이 깨어 작은아들이 한 일을 알고 25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에게 천대받는 종이 되어라."26    그는 또 말했다. "셈의 하느님, 야훼는 찬양받으실 분,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어라. 27    하느님께서 야벳을 흥하게 하시어 셈의 천막에서 살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어라."28    노아는 홍수가 있은 뒤에도 삼백오십 년이나 더 살아, 29    모두 구백오십 년을 살고 죽었다.

창세기 29장

창세기 29장

야곱이 라반의 집에 이르다1   

 1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2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3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4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5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6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7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8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9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10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야곱이 장가들다

1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가서 2 보니,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는 양들이 세 무리로 엎드려 있었다. 사람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양떼에게 먹이고 있었는데 그 우물에는 큰 돌뚜껑이 덮여 있었다. 3 그 돌뚜껑은 양떼가 다 모이면 우물에서 굴려냈다가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나서는 다시 제자리에 덮어두는 것이었다. 4 야곱이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여보십시오. 당신들은 어디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하란에서 왔습니다." 5 그가 물었다. "그러면 나홀의 아들 라반을 아시겠군요?" 그들이 대답하였다. "알고 말고요." 6 야곱은 그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예, 잘들 지내십니다. 아, 저기 라반의 딸 라헬이 양떼를 몰고 오는군요." 이 말을 듣고 7 야곱이 말하였다. "아직 대낮이 아닙니까? 가축을 모아들일 시간도 아닌데, 왜 양떼에게 물을 먹여가지고 가서 풀을 뜯기지 않습니까?" 8 그들이 대답하였다. "양떼가 다 모여들기 전에는 안 됩니다. 다 모인 다음에야 이 우물에서 돌뚜껑을 굴려내고 양들에게 물을 먹이게 되어 있습니다."9 야곱이 그들과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목동 라헬이 아버지의 양떼를 몰고 왔다. 10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외삼촌 라반의 양떼를 보자 선뜻 나서서 우물에서 돌뚜껑을 굴려내고 외삼촌 라반의 양들에게 물을 먹였다.

 

 가나안을 저주한 노아

노아, 함과 가나안을 저주하다

창 9 ; 22 _ 26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When he drank some of its wine
그는 포도주를 먹고 취하여
 
 홍수가 끝나고 배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입니다. 이 세 명은 노아의 아들들이며, 이 세 명을 통해 온 땅에 사람들이 퍼졌습니다.

 다시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생각납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창 9 ; 22 _ 26의 술 취한노아의 모습이 그려진 천정화입니다.


The Drunkenness of Noah, Michelangelo Buonarroti, ceiling of the Sistine Chapel, the Vatican, Rome, 1509. Michelangelo shows Noah drunk before his sons, and simultaneously, in the background, Noah planting his vineyard.

1509년에 그린 이 그림에는 셈과 야벳이 옷을 가지고 와서 어깨에 걸친 다음, 뒷걸음질로 장막으로 들어가 아버지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리는 모습이 성경 그대로 그려 있습니다. 뒷면 배경으로 노아의 포도원 경작지의 모습도 그려있습니다. 이 그림이 천정에 걸려있는 로마 바티칸 성국의 시스티나 성당은 사도궁전일 뿐 아니라 교황님의 정식 집무실이기도 합니다.

 

 

 

Noah, a man of the soil, proceeded to plant a vineyard.

노아는 농사일을 시작하고,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노아는 농사일을 시작하고,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는 포도주를 먹고 취하여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조상 함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이 옷을 가지고 와서 어깨에 걸친 다음, 뒷걸음질로 장막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렸습니다. 그들은 얼굴을 돌려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았습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잠이 들었던 노아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노아는 작은 아들 함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나안은 형제들에게 속한 가장 낮은 종이 될 것이다.” 노아가 또 말했습니다. “셈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벳에게 더 많은 땅을 주시고, 셈의 장막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이다.”

 Cursed be Canaan!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오늘 노아가 저주한 가나안은 땅의 명칭이 아니라 인명입니다.
가나안은 노아의 손자이자 함의 아들입니다(창 9:18). 그는 가나안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 10:15-19; 대상 1:13-16). 함은 홍수 때 그는 아내와 함께 방주에 올랐으며 방주에서 나온 후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창 9:1). 하지만 그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고(창 9:21-22) 이로 인해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노아로부터 형제들의 종이 될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는데(창 9:25) 이 저주는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어 여호수아 시대에는 나무 패고 물 긷는 종이 되었으며(수 9:23) 솔로몬 때 남아있는 자손들을 모두 노예로 역군을 삼았습니다(왕상 9:20-21).

  saw his father's nakedness

그 아비의 벌거벗음을 보고

 오늘 노아는 포도주에 취하여 하체를 드러내었습니다(창 9:22-23). 표준새번역에는 '벌거벗은 몸'(창 9:23)으로 옮겼습니다.
성경이 놀라운 것은 성경에 기록된 여러가지 사실들이 위인전이나 수신교과서적인 충고들로만 가득찬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해가 잘 않되는 구절도 있습니다. 때로는 민망하기도 합니다. 오늘 술취한 노아의 적나나한 모습이 그렇습니다.
술이 깨어 자신의 술취한 모습을 형제들에게 일러바친 함에게 노아가 저주한 것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럴때 억지로 짜맞추려고 하는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은 인격적 수양을 목표로 기술된 도덕과 윤리의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명작 소설책도 아니고 게다가 과학책도 아닙니다.
인류의 구원과 회복에 관한 근원적인 참 생명이 무엇인가를 체험하게 하는 책이며 이 참 생명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을 알 게 해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치열하고 뜨겁고 격렬하며 세상의 생각과 충돌 하기도하는 책입니다.

 

포도주가 수천년전의 정경인 창세기에 등장한 것도 놀랍습니다.

 

술은 한국 기독교에서 오랫동안 금기시 되어 오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대개의 술은 포도주를 일컸습니다. 포도주는 성경에서 일상적인 음료수(욥 1:13)로 잔치 등에 사용되었으며(요 2:3)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지만(시 104:15) 많이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잠 4:17; 23:29-35; 31:4-5) 제사장들과 나실인은 포도주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레 10:9; 민 6:3).
포도주는 약용으로도 쓰였으며(딤전 5:23) 몰약과 섞어 마취제로도 쓰였습니다(막 15:23). 신포도주는 물에 타서 노동자들이 마시는 음료로도 쓰였습니다(룻 2:14).
포도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제를 드릴 때 사용되었으며(출 29:40)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을 베푸실 때도 사용되었습니다(막 14:24).
물론 예수님께서 최초의 기사와와 이적도 포도주를 가득 채우시는 일이셨습니다. 물론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기념하는 제례의식에도 포도주를 사용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내가 기쁘게 받아 들입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  할렐루야

가나안 ― 저주받은 후손

1. 인적 사항

  1. 노아의 막내아들인 함의 넷째 아들, 즉 노아의 손자.

  2. 구스와 미스라임, 붓과 함께 홍수 후 제 3세대를 이룸.

  3. ‘가나안’은 ‘자주 빛’이란 뜻. 그 후손들의 직업은 무역이었는데 자주빛 염료가  주요상품임.

  4. 가나안인과 베니게인의 선조.


2. 생애 주요 사건

  1. 노아의 저주

    ⑴ 저주의 내용 :

     ① 노아가 홍수 이후 농경의 산물인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자 함이 형제들에게 알리며 조롱함(창 9:20-23).

     ② 함이 아비를 모독한 징계로서, 그 아들 가나안이 노아의 저주를 받아 셈과 야벳의 종이 되리라고 예언됨(창 9:25-27).

   ⑵ 저주의 의미 :

① 아비의 잘못을 자손에게 저주가 내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음(출20:5).

② 그러나 후손이 받는 징벌의 직접적인 원인이 그 아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님. 
레위기18장 등을 참조할 때, 가나안 후손들이 받은 징벌의 직접적 원인은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 있었 음을 알 수 있음.
이러한 저주 예언이 징벌에 선행된 것은 보편적으로 이미 타락한 인류 중 일부집단에 대한, 특별은총이 유보 내지는 범죄에 대한용서 가능성의 배제로 보아야 함.

  ⑶ 저주의 실현 :

① 세계사의 초기에는 함의 자손 니므룻과 미스라임이 바벨론과 애굽을 세우고 막강한 군력을 확립하여 노아의 저주가 무효한 것처럼 보였음.

② 그러나 바벨론 포수 후 1세기도 안 되어 셈의 후손인 페르시아와 야벳의 후손인 헬라, 로마에 정복됨. 그 후 계속해서 사라센과 터키의 지배를 받음.          
③ 함의 후손이 살고 있는 아프리카의 원주민은 유럽인의 노예로 매매됨. 현대에도 아프리카 문명은 여전히 후진 상태를 답보하고 있음.


3. 성격과 업적

  가나안 개인 자체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 없음. 그러나 그는 홍수 후 초기 시대의 한 인물로서 그에 얽힌 성경 기사가 후대에 실현됨으로써, 성경의 역사성 내지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심을 간접적으로 증거 하는 구체적인 실례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음.


4. 교훈

  1. 500여 년 간 하나님을 섬겨온 노아도 술취함으로 자녀들에게 수치를 받는 것에서, 술취함은 방탕한 것이며 만악의 근본임을 알 수 있다(엡 5:18;사 28:7).

  2. 타인의 죄를 폭로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살피고 사랑으로 용서하며 감싸야 한다. 왜냐하면 범죄의 가능성이 모든 이에게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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