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

2012. 10. 26. 오후 12:46:16

글자

번역자 주: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의 약 600여 개에 달하는 각 문항(Questions)들에 대한 "압축된 바꾸어 말하기"인 Paul J. Glenn 몬시뇰(1893-1957)의 저서: "A Tour of the Summa(신학대전여행)"의 IIa IIae q21,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 전문이며,

그리고 하반부의 글은, 상반부의 글에 대응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IIa IIae q21,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 전문이다.

21. Presumption

20.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

1. Presumption as a sin against hope is the wholly unreasonable expectation that God will save us despite the bad will in us which makes that saving impossible. Under the name and guise of reliance on God, presumption insults God and dishonors our own intelligence. It is presumption, for example, to expect forgiveness for sins without repentance. It is presumption to expect heaven without working to get there by merit.

1. 애덕(hope, 희망)에 반하는 한 개의 죄로서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presumption)은, 구하는 것(saving)을 불가능하게 하는 나쁜 의지(bad will)가 우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하실 것이라는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기대를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의지(reliance)라는 이 이름과 가장(guise) 아래에서,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은 하느님을 모욕하며 그리고 우리 고유의 지성을 불명예스럽게 합니다. 예를 들어, 회개 없이 죄들에 대한 용서를 예상하는 것은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입니다. 하늘(heaven)을, 마땅히 받을 만함(merit, 공로)에 의하여 거기에 도달하고자 일함 없이, 예상하는 것은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입니다.

2. Presumption is a sin, and can be a very grave sin, but it is not so grave a sin as despair. For, though it is inordinate and unreasonable in its expectation, presumption does recognize (however insultingly and distortedly) the divine mercy and goodness which despair utterly rejects and denies.

2.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은 한 개의 죄이며, 그리고 한 개의 대단히 중대한 죄일 수 있으나, 그러나 이것은 자포자기(despair, 절망)만큼이나 중대한(grave) 죄는 아닙니다. 이는, 비록 이것이 그 예상에 있어 지나치고(inordinate) 그리고 비합리적이기는(unreasonable) 하나,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은 (아무리 모욕적이고 그리고 왜곡되었다고 하더라도), 자포자기(despair, 절망)가 전적으로(utterly) 거절하고(rejects) 그리고 부정하는(denies), 하느님의 자비(mercy)와 선함(goodness)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3. Presumption seems, at first glance, to be contrary to fear rather than to hope. For the presumptuous man seems to fear nothing, whether by servile fear or by filial fear. But this is mere seeming. The virtue to which presumption stands directly opposed is hope. Hope and presumption deal with the same object; hope, in an orderly manner; presumption, inordinately.

3.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은, 첫눈에, 망덕(hope, 희망)보다는 오히려 두려움(fear)에 상반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는 주제넘은/무례(無禮)한/자의(恣意)적으로 추정하는/망망(妄望)하는 사람이, 노예의 두려움에 의하여서건 혹은 자식의 두려움에 의하여서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겉보기입니다.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이 그것에 직접적으로 반대하여 서 있는 덕(virtue)는 애덕(hope, 희망)입니다. 애덕과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은 동일한 대상을 다루는데, 애덕은, 어떤 질서있는 방식으로(in an orderly manner)이나, 그러나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은 무질서하게 입니다.

4. Presumption arises from vainglory, that is, from a prideful trust that a person has in himself as powerful enough to cope with anything, and as a being so excellent that God could not allow him to be punished.

4.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은 허영(vainglory)으로부터, 즉, 어떤 자가, 무엇이든지 대처하기에 충분할 만큼 힘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가 벌을 받는 것을 허락할 수도 없을 만큼 너무도 휼륭한 한 있음(a being)으로서,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어떤 교만한 신뢰(a prideful trust)로부터,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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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대전 IIa IIae

Question 21. Presumption

We must now consider presumption, under which head there are four points
of inquiry:

이제 우리는 주제넘음/무례(無禮)/자의(恣意)적 추정/망망(妄望)(presumption)에 대하여 고찰하여야 하며, 이 표제 아래에서 질문에 있어서의 네 개의 요지들이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

1.What is the object in which presumption trusts?
2.Is presumption a sin?
3.To what is it opposed?
4.From what vice does it arise?




無禮(무례)가 교양을 추방하는 사회

민주주의가 無禮를 정당화하면 사이비가 된다. 

 민주주의가 선동과 無禮를 부추기는 한국에서 만나기 어려운 人間型이 있다. 균형감각이 좋은 사람, 너그러운 사람, 敎養(교양) 있는 시민들이다.
 
  敎養이란 知識(지식)을 가르치고 기른다는 뜻이다.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끝나지 않고 그 지식을 길러서 인간의 品格으로 昇華(승화)시킨다는 뜻이다. 지식이 머릿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자라나 행동으로, 습관으로, 人格化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敎養은 실천을 전제로 하는 지식 체계이다.
 
  敎育은 가르치고 육성한다는 의미이다. 교육의 방법론은 智德體(지덕체)이다. 智慧(지혜)를 키우고, 德性(덕성)을 키우고, 體力을 키운다. 구체적으론 人文, 예술, 스포츠를 통한 교육이다. 人文的 교육을 통하여 인간과 역사, 그리고 사물의 원리를 알게 한다. 예술을 통하여 인간의 감성이 풍부하게 되고 審美眼(심미안)을 갖춘다. 體育을 통하여 건전한 육체를 갖게 하여 당당한 승부와 鬪志를 몸에 익힌다. 교양은 全人的인 것이다. 교양인의 모습은 圓空神體(원공신체)라는 말로 표현된다. 속을 담백하게 비우고 겉으론 원만한 인간이다. 外柔內剛(외유내강)한 사람, 서양의 紳士이고 동양의 武士나 화랑도, 또는 선비이다.
 
  1. 讀書는 교양의 기본이다. 문학, 역사, 예술, 종교, 철학, 지질, 天文書를 읽으면 인간, 역사, 우주를 이해하게 된다. 語彙力(어휘력)이 풍부해지고, 大局觀을 갖게 되며 겸허해진다.
  2. 뿌리의식은 인간 심리의 支柱(지주)이다. 조국, 고향, 家門, 母校는 정서와 人格을 안정시킨다.
  3. 스포츠와 예술(미술, 공연, 영화 등)은 쉼과 즐거움을 통한 再充塡(재충전)이다.
  4. 野外활동은 인간본성 속의 野性을 일깨운다.
 
  5. 교양은 균형 감각이다. 知性과 野性의 균형과 종합이다. 엄격과 관용의 균형, 자유와 民主의 균형, 文武의 균형은 一流의 조건이다. 고구려는 野性이 너무 강해 망했고, 조선은 知性이 너무 강해 망했으며, 신라는 知性과 野性을 두루 갖추어 長壽(장수)했다. 李承晩, 朴正熙, 金庾信, 트루먼, 레이건, 처칠 같은 인물이 知性과 野性을 겸한 교양인이었다. 一流국가, 조직, 인간은 상반된 요소를 융합시켜 더 큰 에너지를 내도록 하는 포용력과 종합력의 소유자이다. 로마, 몽골, 신라가 그런 나라였다. 균형감각은 公的으로 표현될 때는 公正性과 객관성이다.
 
  6. 교양은 절도이고 정확성이다. 말은 정확하게 행동은 씩씩하게 한다. 교양인은 실수와 事故가 적다.
 
  7. 敎養은 正義感이고 용기이다. 교양인은 공정성과 공평성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해서 분노한다.
 
  8. 敎養은 주체성이고, 조용한 너그러움이다.
 
  9. 교양은 이해력이다. 자신과 他人, 그리고 인간, 역사, 국가, 조직에 대한 이해력이 크면 다른 것, 틀린 것에 대한 포용이 가능하다. 자신을 알면 남을 이해한다. 자신이 있으면 남을 용서, 관용한다. 이해력과 포용력은 비례한다.
 
  9. 교양인은 천재를 알아본다. 凡人에게 침을, 바보에겐 존경을, 天才에겐 감사를!
 
  10. 敎養은 사회성이다. 즉 남에 대한 배려이다. 낮은 사람에게 뻐기지 않고, 높은 사람에게 굽히지 않는다. 특히 弱者에 대한 관심이 깊다.
 
  11. 敎養은 인생관이다. 敎養人은 인간존재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끊임 없이 탐구하면서 보람된 삶을 의식한다.
 
  12. 敎養은 인간의 기본 土壤(토양)이다. 이 토양이 기름지고 풍요로우면 여기에 심는 전문성이란 나무도 잘 자란다. 밑변이 길어야 꼭지점이 높다.
 
  13. 교양인은 敎養語이다. 교양인의 대화는 格調(격조) 있고 즐겁다.
 
  14. 한국인의 敎養함양을 막고 있는 것은, 첫째 漢字말살-한글專用에 의한 민족문화, 美風양속, 민족혼의 파괴이다. 둘째로는 민주주의를 악용한 선동이 無禮와 억지를 합리화해준다. 셋째로는 방송과 신문 등 대중매체가 흥미위주의 저질프로를 집중적으로 양산, 배포한다. 넷째 기능重視 교육이다.
 
  15.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 등 한국 지도층의 無禮와 無法과 無교양이 한국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
 
  16. 대중 민주 사회에선 교양 있는 국민만이 國益과 國格을 수호하는 국가 엘리트를 만든다.
 
  열 명의 대통령 가운데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敎養人은 李承晩, 朴正熙이다. 기업인 가운데선 단연 李秉喆이다. 교양 있는 대통령과 기업인이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富强하게 만들었다. 즉, 교양은 굉장한 生産性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할것을 굳게 다짐 합니다.

 

 

대한민국의 절대지상목표

국조단군의 건국이념 弘益人間 在世理化로 民主法治 正義國家 이룩하고 祖國統一 故土回復하여 世界平和 人類幸福을 달성하는 것이다. 

무례(無禮) 그리고 비리(非理)


옛날부터 들어 온 아름다운 호칭.‘조용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 또는‘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밝아오는 아침처럼 조용하고, 너나없이 예의를 중시하기에 외국인들이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우리나라의 현실은 참담하다. 예의는 실종되어 눈 크게 뜨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사회 지도층 인사 치고 온갖 비리에 연관되지 않은 이를 찾기 힘들어졌으니…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극찬한 ‘동방의 빛’은 그 광채를 잃고 어둠으로 사라질 지경이다. 
특히 최근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함바를 둘러싼 비리 사건은 여러 모로 우리를 씁쓸하게 만든다.
일견 늘상 일어나던 사건의 하나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함바라는 특수한 업종을 놓고 벌어졌다는 사실은 수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함바(飯場)란 토목 공사장이나 광산 등지에서 일하는 노무자의 합숙소를 뜻하는 일본어인데, 이가 변형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천막이나 가건물을 세우고 인부들에게 밥을 대는 현장 식당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세를 낼 필요도 없고 식탁과 의자만 준비하면 되기에 별다른 자본이 필요하진 않지만, 인부들이 일찍부터 일을 시작하는 만큼 새벽 같이 일어나 밥을 짓고 반찬을 마련해야 한다.
공사장 시장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통 두 끼, 많게는 새참과 야식까지 하루에 너덧 차례 밥을 짓는 일도 있다.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일정 기간만 고생하면 어느 정도 목돈을 쥘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워낙 고생스러워 선뜻 하기엔 어려운 일이다. 정말 막바지에 몰려 아무 것도 없는 빈손이거나 아주 단단하게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그런데 이런 함바의 운영권을 얻고자 엄청난 액수의 뇌물이 오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만큼 이윤이 크다는 것이고, 또한 상당한 투자를 해야 할 것은 당연하다.

한동안 시끄러웠던 ‘통 큰 치킨’처럼 재벌 그룹이 영세상인들이 하는 업종까지 장악한 셈이니, 예전처럼 재산이라곤 몸뚱이 하나뿐인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이처럼 가액의 투자에 고액의 뇌물을 쓰고 또한 높은 이윤까지 내려면 식사는 부실할 것인 즉, 힘든 일을 하는 인부들은 어쩌란 말인지?    

더더욱 슬픈 것은 일반인보다 훨씬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경찰을 비롯한 고위공무원 여럿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면 동방무례지국을 넘어 동방비리지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는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찌 보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없는 것은 갖추고 아닌 것을 따르지 않으면 된다.  무례(無禮)는 예의가 없다는 것이니, 유(有) 즉 예의가 있도록 하면 되고, 비리(非理)는 이치가 아니라는 것이니 아닌[非] 것을 버리고 바른 이치를 따르면 되는 것이다.  
무(無)가 유(有)로 바뀌고, 비(非)가 들어가는 단어들이 눈에 띄지 않게 된다면 모두가 웃는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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