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구약] 소예언서 :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2012. 5. 27. 오전 7: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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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세계 - 구약] 소예언서 :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다마수스 빈첸
 
 
미가서는 열두 소예언서의 핵심이다. 예로니모 성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예언서가 놓여 있는 자리만이 아니라 그 메시지 자체가 소예언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까닭이다.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미가는 지배 계층의 학정과 불의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를 고발하며, 민족의 두 수도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통렬하게 비난한다. 이스라엘의 오만에 대한 징벌이 그 처절한 굴욕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 굴욕은 동시에 구세주 왕이 태어나는 요람이 될 것이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영원으로 올라 가는” 구세주가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것없는 베들레헴”으로부터 태어날 것이다(5,2-3). 착한 목자로서, 그분은 “절름발이들을 모아 오리라. 흩어졌던 것들을 모아들이리라. 그 절름발이들, 비틀거리는 것들을 씨앗으로 남기리라”(4,6-7). 그분은 백성들에게 율법의 핵심 곧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럽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6,8)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죄악을 부수어 깊은 바다에 쓸어 넣어”(7,19) 주실 것이다.
 
스바니야는 비천한 모습으로 태어나시는 구세주께서 하느님의 정의를 사랑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미가의 예언을 완성시키고 있다. 스바니야란 이름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스바니야가 밝혀주는 위대한 비밀은 주님께서 오실 “마지막 날”에 대한 비밀이다. “주님께서는 이미 제물을 마련하시고 손님들을 목욕 재계시키셨다‘’(1,7). 그분은 “절름발이를 고쳐 주시며 길 잃은 자들을 찾아 내시리라”(3,19), “그 사랑도 새삼스러워라”(3,17). “기를 못 펴는 가난한 사람들”(3,12) 이 온 세상 방방곡곡으로부터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 “에디오피아강 저편으로 추방했던 자들도 예물을 가지고 강을 건너 나를 예배하러 오게 하리라”(3,10). “하느님의 신비를 알고 있는” 사람이 십자가의 희생제와 성찬의 기념제를 예언하였던 것이다.
 
성서의 순서를 보면, 미가와 스바니야 사이에 나훔과 하바꾹이 들어있다. 나훔은 구약 성서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고도 강렬한 문체로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의 패망(기원전 612년)을 예언한다. 아시리아의 사자는 자신이 태어날 때 그러하였듯이 대살륙과 파괴의 아수라장 속에서 멸망하고 만다. “들리느냐? 저 채찍질 소리. 병거 바퀴 돌아가는 저 요란한 소리. 말은 소리치고 병거는 치닫는다. 칼과 창을 번개처럼 번쩍이며 기마병이 말타고 달려든다. 다치는 사람은 수도 없고 주검은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는 가는 곳마다 발에 차인다.”(3,2-3). 지상 권력이 몰락한 폐허 위로 “당신을 바라는 사람이 곤경에 빠졌을 때 잘 보살펴 주시고 당신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 물결에 휩쓸렸을 때 돌보아 주시는”(1,7-8) 하느님의 위대한 영광이 솟아오르고 있다.
 
하바꾹은 “신앙의 예언자”다. 깊은 회의 속에서 그는 부르짖는다. “주여,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 주시렵니까?”(1,2). 그의 신앙이 답변을 한다. “주여, 당신께서는 애초부터 나의 하느님, 이 몸은 하느님의 것인데, 죽을 리야 있겠습니까?”(1,12). 신앙은 영혼의 생명이다.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앙으로써 살리라”(2,4). 성 바오로 사도는 이 말씀을 자기 설교의 초석으로 삼았다(로마 1,17; 갈라 3,11; 히브 10,38 참조). 그는 하바꾹의 신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예언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훌륭한 시(3장)로 노래하고 있다. 그 노래는 말미에서 아름다운 어휘로 신앙의 본질을 요약하고 있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주님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시고 사슴처럼 날랜 다리를 주시어 나로 하여금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십니다”(3,17-19).
 
하깨와 즈가리야, 두 사람은 모두 고레스의 칙령으로 바빌로니아의 유배가 끝났을 때에 거룩한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성전의 “상징들”과 다윗 가문이 파괴되었을 때에 이미 폐지된 것처럼 보였던 구세주의 약속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확신시켜 주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하깨는 두번째로 짓는 소박한 성전이 첫번째 성전보다 더 영화로울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이 그 어머니의 팔에 안겨 성전에서 봉헌될 때에 참으로 그러하였다(루가 2,22). 하깨는 또한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있었던 다윗의 후손 즈루빠벨에게서 다윗 가문의 부흥을 내다 보았다. 예언자는 즈루빠벨을 하느님의 오른손에 있는 옥새로 보았으나(2,23; 예레 22,24 참조), 예언자의 기대는 오직 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마태 1,13).
 
즈가리야는 교회의 상징인 거룩한 도읍의 예언자다. 그의 예언서는 첫번째 부분의 환시들(1,7-6,15)과 두번째 부분의 설교(7,1-14,21)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모두가 새로운 예루살렘의 영을 밝혀 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불이 되시어 담처럼 예루살렘을 둘러쌀 터이고 그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빛내시리라”(2,3). 그 머리는 구세주가 될 것이고, 그 새싹(3,8; 6,12)에서 사제들과 왕들의 권능이 결합될 것이다. 구세주의 사제직이 대사제 여호수아(예수)에게서 드러나고 있다. 그는 더러운 옷을 벗고 백성들의 죄악을 벗겨 주며, “내가 이땅의 죄를 하루 아침에 쓸어 버리겠다.”는 말씀이 새겨진 돌을 받는다(3장). 구세주의 왕다운 존엄성은 등잔과 올리브나무로 상정되고 있으며, “멋지다.” 하며 환성을 올리는 가운데 가져 오는 머릿돌로 상징된다(4장). 구세주이신 왕이 할 일은 이렇다. “‘그것은 권세나 힘으로 될 일이 아니라 내 영을 받아야 될 일이다.’ 만군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이시다”(4,6). 구세주께서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9,9) 당신의 도읍을 찾아오신다. 그는 몸값으로 은 삼십 냥에 팔려갈 것이다(11,12). 목자는 살해당하고 그 양떼는 흩어질 것이다(13,7). 그러나 예루살렘의 성민들은 은총과 기도의 영을 받게 되어 “그들은 내 가슴을 찔러 아프게 한 일을 외아들이나 맏아들이라도 잃은 듯이 슬퍼하며 곡하리라”(12,10). “그날이 오면, 샘이 터져 예루살렘 성민들의 죄와 때를 씻어 주리라”(13,1). 그리고 이스라엘 가문은 뭇 민족에게 욕을 먹는 신세였으나 이제는 축복을 받게 되리라(8,13). 구세주의 엄청난 최후 심판(14,12-15)이 끝난 다음에 살아 남은 민족들은 해마다 예루살렘에 올라 와서 구세주의 평화와 안녕의 상징인 초막절을 지키며 야훼를 만군의 주로, 왕으로 받들어 예배하리라(14,16).
 
열두 소예언서의 마지막이 말라기 예언서다. 유다인들은 올바르게도 말라기를 “예언자들의 봉인”이라고 부른다. 말라기 예언서는 참으로 예언자들의 모든 가르침을 압축시켜 놓은 요지다. 또한 동시에 천사라는 그의 이름이 가리키듯이, 말라기는 주님의 오심을 미리 알려 주는 전령이다.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 그는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다. 그가 곧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 주길 기다리지 않느냐?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3,1). 여느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말라기는 백성들의 죄악, 특히 혼종혼과 같은 죄(2,11)와 사제들의 나태(2,2)를 통렬히 비난한다. 외적인 형식에 너무 치우친 예식에 분노한 예언자는 구약의 희생 제사에 종언을 고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너희는 내 제단에 공연히 불을 피운다. 그러지 못하도록 아예 문을 닫아 걸었으면 좋겠구나. 너희가 하는 짓이 나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1,10). 그러나 그의 시선은 새롭고 순수한 봉헌으로 향한다. “나의 이름은 해뜨는 데서 해지는 데까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쳐,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향기롭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깨끗한 곡식 예물을 바치고 있다. 내 이름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치고 있다”(1,11). 말라기는 구세주의 새 시대와 그 풍성한 은총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3,10). 그 새 시대는 바로 “정의의 태양이 비쳐와 너희의 병을 고쳐 줄”(4,2) 날이다. 열두 예언서의 열두번째 예언자는 그 손을 들어 장차 오실 열세번째 예언자를 가리키고 있다.
 
열두 소예언서의 메시지들을 모두 합쳐 놓으면, “주님의 날”을 묘사하는 완벽한 그림이 나타난다. 하느님의 정의(아모스)는 겸허한 왕이신 구세주를 통하여(미가, 즈가리야) 사랑으로 바뀌어질 것이다(호세아). 희생 제물로 바쳐지게 될 구세주께서는 당신의 희생적 사랑으로 절름발이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리라(스바니야). 그리고 그분은 온 세상 모든 곳에서 하느님께 순수한 제물을 바치시리라(말라기). 주님의 영이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리라(요엘). 그 영은 의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리라(하바꾹). 그분은 배신과 반역의 지혜를 파멸시키시고(오바디야), 이 세상 군주들의 잔혹한 권세를 무너뜨리실 것이다(나훔). 그러나 그분은 회개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시리라(요나). 그리하여 성전이 재건되고 ‘다윗의 아들’이 다시 왕좌에 오르고(하깨), 교회를 상징하는 거룩한 도읍이 다시 세워지고 그 주민들은 기쁨과 평화에 넘치리라(즈가리야)한 구세주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예언의 성취와 이 세계의 상황을 견주어 볼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 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2베드 1,19).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대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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