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인' 안중근, 100년 만의 첫 추모미사

안중근 의사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지만, 그동안 한국 천주교는 안 의사에 대한 평가에 상당히 소극적이었습니다.
성경이 금하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순국 100년만에 서울대교구가 첫 추모 미사를 열어 안 의사를 천주교 신자로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승현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이름 앞에 호 대신 세례명이 붙을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도마 안중근.
하지만 순국 이후 100년 동안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인으로서 제대로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안 의사가 십계명에서 금지한 '살인'을 범했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양해룡, 천주교 서울대교구 신부]
"살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의거로 평가를 한 것이죠, 동아시아 전체 평화론을 펴신 안중근 의사를 좀 더 신앙인의 입장에서..."
그래서 순국 100년 만에 거행되는 안중근 의사 추모 미사는 그 의미를 더욱 깊게 했습니다.
미사를 집전한 정진석 추기경은 신앙인으로서 안중근 의사의 의미를 부각시켰습니다.
정 추기경은 특히, 지난 1993년 '안 의사의 행위는 정당방위'라고 말한 김수환 추기경의 말에 공감한다며 안 의사의 의거는 신앙의 연장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녹취:정진석, 천주교 서울대교구 추기경]
"그분의 신앙을 빼놓고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안 의사를 추모하는 미사를 봉헌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도 미사에 참석해 100년 만에 열리는 첫 추모 미사에 대한 감격스러운 심정을 전했습니다.
[인터뷰:황은주, 안중근 의사 외손녀]
"그동안 미사를 정식으로 못 드려서 늘 가슴 아팠고 저희 어머니가 생전에 개인적으로 미사를 올렸어요. 그런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는 어느 누구도..."
순국 직전에도 10분 동안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당당히 형장으로 향했던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는 서울대교구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추모 미사를 계기로 순국 100년 만에 고국에서 천주교인으로서의 의미와 권리를 공식적으로 되찾게 됐습니다.
성경이 금하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순국 100년만에 서울대교구가 첫 추모 미사를 열어 안 의사를 천주교 신자로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승현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이름 앞에 호 대신 세례명이 붙을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도마 안중근.
하지만 순국 이후 100년 동안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인으로서 제대로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안 의사가 십계명에서 금지한 '살인'을 범했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양해룡, 천주교 서울대교구 신부]
"살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의거로 평가를 한 것이죠, 동아시아 전체 평화론을 펴신 안중근 의사를 좀 더 신앙인의 입장에서..."
그래서 순국 100년 만에 거행되는 안중근 의사 추모 미사는 그 의미를 더욱 깊게 했습니다.
미사를 집전한 정진석 추기경은 신앙인으로서 안중근 의사의 의미를 부각시켰습니다.
정 추기경은 특히, 지난 1993년 '안 의사의 행위는 정당방위'라고 말한 김수환 추기경의 말에 공감한다며 안 의사의 의거는 신앙의 연장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녹취:정진석, 천주교 서울대교구 추기경]
"그분의 신앙을 빼놓고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안 의사를 추모하는 미사를 봉헌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도 미사에 참석해 100년 만에 열리는 첫 추모 미사에 대한 감격스러운 심정을 전했습니다.
[인터뷰:황은주, 안중근 의사 외손녀]
"그동안 미사를 정식으로 못 드려서 늘 가슴 아팠고 저희 어머니가 생전에 개인적으로 미사를 올렸어요. 그런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는 어느 누구도..."
순국 직전에도 10분 동안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당당히 형장으로 향했던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는 서울대교구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추모 미사를 계기로 순국 100년 만에 고국에서 천주교인으로서의 의미와 권리를 공식적으로 되찾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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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의 장녀 안현생 여사가 대구가톨릭대의 전신인 효성여대 교수로 임명된 사실을 보여주는 서류인 사령원부가 최초 공개됐다 ⓒ 대구가톨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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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순국일 1910년 3월 26일)을 맞아 안 의사의 사상과 삶, 후손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그의 딸 안현생 여사(1902~1960)가 대구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인 효성여자대학 교수로 재직한 기록이 최초로 발견됐다.
26일 대학 측에 따르면 안 여사가 50대이던 1953년부터 1956년까지 3년간 문학과(불문학 전공) 교수로 재직한 ‘사령원부(辭令原簿)’를 발견했다.
사령원부에는 펜으로 쓴 ‘4286년 2월 18일(양력 1953년 4월 1일) 敎授(교수)에 任(임)함 安賢生(안현생)’이라는 발령사항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안 여사가 소속된 문학과는 국문과, 영문과, 불문과 등 전공별로 분리돼 있었고, 시인 조지훈 선생과 구상 선생이 함께 재직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같은 해 조지훈 선생은 전임강사로, 구상 선생은 부교수에 임명된 것으로 적혀 있다.
안 여사는 그 후 3년 뒤인 1956년 3월 31일자로 스스로 교수직을 그만뒀다. 사령원부에는 ‘願(원)에 依(의)하여 本職(본직)을 免(면)함’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울러 안 여사가 교수로 재직한 기록은 1992년 발간한 ‘효성여자대학교 40년사’의 전직교수 명단 6번째에서도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순국 100주년 안중근’ 특별전을 열고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의 이내옥 관장이 최근 대구가톨릭대를 방문해 사령원부를 보면서 확인됐다. 이 관장은 “안 여사가 대구가톨릭대 교수로 재직했다는 자료를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게 돼 참 뿌듯하다”고 말했다.
소병욱 대구가톨릭대 총장도 “온 국민이 존경하는 안중근 의사의 가족이 대구에서 생활했으며, 본교에서 교수로 재직한 사실이 확인돼 긍지를 느낀다”고 밝혔다.
한편 안 의사의 2남1녀 중 장녀인 안 여사는 8세 때 아버지를 잃고, 프랑스인 신부의 보호를 받으며 살다 13세 때 일제의 눈을 피해 제정 러시아로 망명했다.
16세 때 상해 프랑스 조계지(주로 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에서 불문학과 미술을 공부했다.
이후 서울로 이주했다 한국전쟁 당시 대구로 피난 왔다가 효성여대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다시 서울로 옮겨 생활하던 중 1960년 북아현동에서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국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 추모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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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