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1882년경에는 <아버지를 떠남>, <탕자의 귀향>, <살진 송아지>란 부제로 세 점의 돌아온 탕자를 그렸다. 그런데 그 표현이 현대판이란 게 신기하다. 그중 <현대판 돌아온 탕자 - 아버지를 떠남>은 우리의 모습을 닮아 우리를 당혹하게 만든다. 이 성화는 루카복음 15장 11-12절이 배경이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주었다.”(루카 15,11-12)
부두가의 집에는 네 사람이 있다. 아버지와 두 아들과 형수가 그들이다. 중앙에 있는 작은아들은 탁자에 걸터앉아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말한다. 그의 시선은 아버지를 내려 보고 있고, 그의 손은 돈지갑을 챙기고 있다. 이것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자세와 닮았다는 게 놀랍다. 우리도 하느님께 물질의 축복만을 바라고, 하느님께서 내 뜻대로 하시길 바라지 않는가? 그리고 돈을 거머쥐면 작은아들처럼 하느님을 떠나리라.
그런데 아버지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작은아들의 청을 들어준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준다. 아버지가 아들의 요청에 힘없이 응하는 노인의 모습이란 게 가슴에 찡하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무리한 요청에 힘없이 응해주지 않는가? 아버지는 아들을 애처로이 바라보신다. 그리고 꼭 돌아오라고 눈으로 말씀하신다.
이런 약한 아버지가 보기 싫어 큰아들은 창문 너머로 고개를 돌린다. 그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무례한 동생도 보기 싫었다. 그래서 창문 밖을 바라본다. 그의 몸은 집에 있지만 그의 마음은 집을 떠났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정의롭지 못한 하느님이 싫다며 하느님을 저버리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의 곁에는 아내가 있다. 그녀는 아버지의 행동에 흠칫 놀라 상기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버지의 자비가 그녀에게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작은 수건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다. 우리도 그녀처럼 자비로운 하느님을 부당하게 생각하며 의아해하지는 않는가? 그리고 성난 눈빛으로 하느님께 따지지는 않는가?
[출처] 현대판 돌아온 탕자 - 아버지를 떠남, 제임스 티솟|작성자 그림 읽어주는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