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꿔어놓은 천재들/아인슈타인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세상은 고정되어 있다는 것과 변화한다는 것.
고정 론자들은 자기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언제나 하는 일 없이 불평만 한다.
하지만 변화 론자들은 다르다.
자기가 직접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까닭에 늘 창조적이다.
과학자 예술가 작가 철학가 등이 여기에 속하며 역사의 진보는 이들
에 의해 이뤄진다.
성서에는 신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7일째는 쉬었다고 전해준
다. 유태인들에게 이 대목은 신이 작업을 완전하게 끝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신이 세계를 불완전 한 상태로 남겨 둔 것이다.
전지 전능한 신이 세계를 불완전하게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유태인들은 신이 자신의 창조활동에 인간들이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창조’작업은 신이 남겨 놓은 인간의
의무인 셈이다.
오늘날의 세계를 만든 가장 위대한 인물을 4명 뽑으면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드,
물리학의 아버지 아이작 뉴톤,
상대성 이론의 알버트 아인슈타인을 꼽는다.
이들은 모두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발상으로 세상을 바꿔어놓은 천재
들이다. 이중 뉴톤을 제외한 세 명이 유태인. ‘창조’를 중시하는 유태
인들의 종교적 믿음이 세상을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얘기다.
뉴튼도 유태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공식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던 1933년 1월 독일 국적의 아인슈타인은
미국 캘리포니아를 여행 중 이었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를 반대해온 그는 귀국을 포기했고 나치는 즉각
그의 모든 신분과 프러시아학술회원 자격을 박탈했다.
재산도 모두 압류됐다.
그 해 10월 아인슈타인의 책은 ‘독일 정신’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길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독일판 분서갱유였다.
이때부터 아인슈타인이란 이름은 히틀러의 ‘제3제국의 반역자’와
동일시 됐다.
1919년 태양에 의해 빛이 휘어진다는 연구 발표로 하루아침에 세계
적인 인물이 된 아인슈타인은 유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치의
표적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논리적으로 공박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반(反)아인슈타인 연맹까지 결성됐을 정도이다.
아인슈타인은 ‘국가’라는 개념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반 국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태인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동포들
을 도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바이올린 연주를 하기도 하고
시온주의를 지지하기도 한다.
열렬한 시온주의자였지만 이스라엘 독립이후인 1952년 이스라엘의
제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달라는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 것도
그런 사상적 배경에서다.
아인슈타인의 원자연구에 대해 유태인 역사학자들은 ‘위대한 우연’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소수 민족인 유태인이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업적으로 세계를 바꿔 놓는 것은 아인슈타인이 찾아낸 가장
작은 물질인 원자가 가장 강력한 에너지(파워)를 내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설명이다.
‘원자’에 대한 연구가 신앙심이 깊지는 않았지만 부모 모두 유태인
이었던 아인슈타인의 손에 이뤄진 것이 결코 ‘우연’만은 아니라는
은근한 자부심이다.
아인슈타인은 조지 버어나스 쇼우가 몇 안 되는 ‘우주를 만든 사람
들(universe builders)’중 한 명으로 꼽은 인물. 그의 유명한 상대성
이론은 ‘E=MC2’ 란 간단한 공식으로 요약된다.
E는 에너지, M은 질량(물질), C는 빛의 속도.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와 눈에 보이는 세상인 물질은 같은 개념이란 뜻으로 에너지는
물질로, 물질은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발견이다.
20세기 물리학의 최고의 발견으로 여겨지는 이론. ‘물질은 에너지
이다’는 그의 업적은 모든 현대적인 개념에 적용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고 좋건 나쁘건 ‘원자시대’를 열어
주었다.
미국에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보다는 과학정책이나 평화운동 등
정치적인 차원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한다.1939년 8월 몇몇 동료들과
함께 나치가 원자탄을 만들지 모른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서한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미국 정부는 10월 곧바로 핵문제 자문기관인 ‘우라늄 위원회’를
구성했고 이는 결국 ‘맨해튼 계획’이라는 원자탄 개발계획의 직접
적인 계기가 된다.
물론 원자탄은 아인슈타인 한 사람의 손으로 개발된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은 다음해인 1922년 노벨상을 받은 닐스
헨릭 데이비드 보(Niels Henrik David Bohr)가 원자구조의 개념을
명확하게 했고, 1938년 노벨상 수상자인 앙리코 훼르미는 최초로
원자분열을 밝혔다.
1945년 7월 16일 일본 히로시마에 터진 원자탄을 최종 만들어 낸
사람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지휘한 미국 물리학자 제이 로버트 오펜하이머. 아인슈타인에서
오펜하이머까지 원자탄개발라인에 있었던 사람은 물론 모두 유태인
학자라는 점은 우연의 일치일까?
원자탄이 개발된 후 아인슈타인은 미소 강대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핵무기 개발 경쟁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버틀런드 러셀과 함께
핵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할 세계 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치적인
움직임도 보였다.
그는 1950년 1월 31일 트루먼 대통령이 수폭개발 을 결정했을 때에
도 이 계획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는 데 서명한 편지를 러셀에게 보낸 뒤
1주일 후인 1955년 4월 18일 오전 1시 15분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에 핵에 대한 고마움과 두려움을 모두 남겨 놓은 채....
★ 미사봉 말글샘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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