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돌아와선 좀 정신이 좀 혼미한 사람처럼 며칠을 지냈다. 밤낮이 뒤바뀌는 시차도 시차이지만 방학이 시작되기도 전, 그것도 가장 바쁜 기말에 일상을 팽개치고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방학중이라 학교에 갈 필요도 없고, 그나마 신청해 두었던 대학원 여름학기도 캐나다에 가서 마침 미국에 가 계신 지도 교수님께 어렵게 연락을 해서 취소를 했다. ’감정적 동요가 심하고 공부할 의욕을 잃었음.(getting through an emotional turmoil and very much discouraged about studying)’이라고 사유를 적었더니 교수님은 ’빨리 기분이 좋아지길 바라고, 공부할 의기를 다시 찾기를 바랍니다. 행정절차는 제가 다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캐나다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세요. 저도 곧 오타와를 방문하러 갑니다.’라고 회신이 왔다. 장소와 시간이 엇갈려 교수님은 못만났다.
이번 토론토 세계 청소년 대회는 지난 번 파리나, 로마 대회 때보다 실망스러웠다는 것이 중론이다. 9.11이후로 대륙 전체를 잠궈두고 무슨 경찰 놀이라도 하듯이 툭하면 테러를 운운하고 외부인들은 테러리스트나 불법체류자로 의심하는 미국의 과잉반응 덕에 캐나다도 수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도시 전체를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던 예전의 청소년 대회와 달리, 무역 박람회 장 같은 곳에 삼엄한 경비를 해두고 참가 확인증이 있는 사람만 들여보내면서 닫힌 청소년 대회를 한 것도 좀 석연치 않았다. 그림같은 로마와 파리의 거리를 지나다니면 밀짚을 엮어 만든 예쁜 모자를 쓴 봉사자들이 곳곳에서 빵과 물, 파스타를 나누어주던 이전과는 달리 음식을 받으려면 박람회장 한 쪽에 마련된 보급소 같은 곳에서 음식을 받아야만 했고 물도 사먹어야만 했다.
지난 11월 부터 대회본부, Peterborough교구, 그리고 서울교구 사이의 여러가지 연락과 조정 작업을 도와준 덕에 참가비나 항공료를 면제 받았지만, 역시 공짜는 없었다. 지방 교구로 민박체험을 하러 갔을 때 참가자 몇몇이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는 바람에 3일 연속 반나절을 모두 응급차와 응급실에서 보냈다. 아시아 젊은이 문화 행사의 순서 조정을 위한 회의도 신부님들 대신가서 반나절을 내내 보냈다. 항공권을 잃어버린 아이의 항공권 재발급도 해야했다. 역시 교포들이 주전 통역으로 뛰는 동안 나는 벤치 통역 멤버답게 영어가 필요한 허드렛일을 하다 온 셈이다. 지난 번 말레이시아에 다녀왔을 때처럼 좀더 영어 실력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처음 며칠은 계속 서울 생각을 했다. 나이아가라에 갔을 때만해도 그랬다. 준비하다만 캠프, 화곡본동으로 주일학교를 다시 옮기는 문제, 집안 문제, 대학원 공부, 그리고 좀처럼 수락되지 않는 마음에 대한 생각들이 비행기 끝자락을 쫓아와서는 머리에서 가시질 않았다. 사실 토론토에 있는 한인 성당에 묵을 때보다는 민박을 할 때가 차라리 여러가지로 좋았던 것 같다. 그냥 한국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온전히 캐나다 사람들과 있어야 할 때가 좀 속이 편했다고나 할까. 한국에서도 살만하게 살다가 아예 캐나다까지 이민온 교포들이 빈민촌 출신인 나같은 사람한테는 곱게 보일 턱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은 아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인데 단지 고국에서 왔다고, 새벽마다 살뜰하게 한국식으로 정찬을 차려 낸 교포 아주머니들을 보고, 참 그놈의 한국사람이란게 머길래 이렇게 진득할까 하고 아주 머리가 오싹 솟는 느낌을 받았다. 포로 수용에 가까왔던 로마생활에 비하면 다들 천국이라고 했다.
그래도 민박이 좋았던 건, 민박집 아저씨 Robson과 그의 친구들 그 마을의 노인들과 얘기할 시간이 있어서 였다. 북미 가난한 시골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들어보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한국에서 전쟁난거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다.’ ’우리 큰형은 2차대전 때 벨기에에서 죽었다.’ ’아이들이 군대에 갔으면 좋겠다. 대학 학비가 없어서 곤란하니.’ ’우리 집은 머 여유있지는 않지만 이따끔 혼자 낚시나 카누를 타러 나가기도 한다.’ 어떤 편의점에서 일하는 아저씨는 집에 돌아오면 기타를 들고 60, 70년대의 싸이먼앤 가펑클이나 존레논 노래를 아내와 함께 신나게 불렀다. 아이들이 넷인 그 집안은 아주 아수라장이었고, 가구는 모두 낡았지만, 참 행복해 보였다. 캐나다의 넓은 들판을 보면 여기선 쉽게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사람들을 만나보니 역시 사는 건 분투였다. 다만 우리 보다 좀 더 여유있게 그 전쟁을 치러내고 있을 뿐이지.
교황님을 멀리서라도 볼 수 있는 건 내겐 의미심장한 일이 되었다. 그전에 중학교 때 김포가도로 교황님이 오신다고 태극기와 바티칸시국의 깃발을 흔들러 동원되어 갔다가 하이웨이 주유소를 지나가는 교황님을 잠깐 봤다. 우린 모두 신경질을 냈다. ’뭐야, 이렇게 몇 초 깃발을 흔들러 이렇게 수업도 안하고 전교생이 다 나와야 하는거야.’ 그 땐 그랬다. 이름도 모르는 나라의 대통령이 와도 오전수업만하고 강서구에 있는 모든 학교가 동원되어 나갔다. 103위 시성식을 마치고 우리 집 흑백 텔레비전으로 강복을 주시는 교황님을 봤다. 텔레비전 앞에서 성호를 긋고 고개를 숙이고 강복을 받았다. 97년에 파리에서 세계 청소년 대회가 열릴 때 운이 좋게 교황님과 함께 하는 미사에 책과 경본을 들고 서 있는 복사가 되었다. 천정이 정말 높은 고딕 성당의 제의실에서 장백의를 입고 대기하는데 정말 교황님이 들어오셨다. 복사들은 교황님의 반지에 입을 맞추고 경의를 표했고, 나도 그렇게 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는 한 사람씩 만날 기회를 주었는데, 교황님은 ’감사합니다.’하고 한국말로 답해 주셨다. 손이 크고 두터운 그였다. 그 때도 사실 별 감흥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개인적으로 잠깐 만나고 나서는 그분에 관한 뉴스를 듣거나 그분의 사진을 보는 것은 꼭 아는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거나 하는 것들은 나중 문제가 되었다. 로마대회때도 멀리서 그분의 모습을 보는 것은 참 감격적이었고, 이번에 짙은 어둠과 비바람을 뚫고 그분이 지나는 것을 보는 것은 더욱 감격적이었다. 그의 메세지는 이제 곧 이 세상의 여정을 마치고 영원으로 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 더 남아 있어야 할 젊은이들에게 주는 깊은 마음의 격려같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는 평화를 느낀다. ’나는 전체주의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시대를 사십시오.’그리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전체 일정이 끝나고 원래는 장애인 공동체인 Daybreak를 방문하려고 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Henry Nauwen이 말년을 보낸 곳을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가는게 좀 그래서, 그냥 값비싼 낚시배를 탔다. 중국어 한마디 못하면서 한자로 메모를 써가면서 대만에서는 고집스럽게 내가 번역했던 책에 등장하는 성심여고를 찾아가 놓고서는, 여기선 영어권이라 훨씬 찾아가기도 쉬운데.... 아무튼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 혹은 내가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어른들 틈에 있는 건 아무리 재미있는 연어 낚시 배라도 의미가 없었고 더군다나 Daybreak를 방문할 기회와 맞바꾼 것은 어리석었다. 그리고 Banff국립공원에 갔다. 호수는 에메랄드같고, 산에는 아직도 눈이 덮여있었고 실제로 8월 2일에는 눈이 내렸다. 침대도 있고, 좋은 음식도 있었다. 하지만 교황님과의 밤기도가 끝나고 그냥 벌판에 쓰레기 더미 옆에서 발티, 주영, 상미, 종선, 두심등과 함께 있을 때가 더 좋다고 생각되었다. 아니 몇 년 만에 만났는데 별로 얘기도 못해보고 대신 그 인산 인해 속에서 길을 잃은 나를 위해 태극기 하나를 들고 혼자 비바람을 맞아가며 3시간 가깝께 서있던 찬만이와 추운 캠핑장에 텐트치고 함께 있었다면 Banff가 더 아름다왔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모시고 왔어도 좋을 곳이다. 화곡본동의 선배 형, 누나들과 왔었대도 좋을 곳이다. 그리고 내가 보낸 엽서 사진을 보고 ’아 나이아가라 정말 가보고 싶다’고 했던 정연이나 유럽여행도 포기하고 본당 캠프를 도와준 연주와 함께 와도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딘들 안좋았을까? 그래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본동이던 창4동이던 꼬마들과 캠프하는 편이 정말 행복하고 즐거웠을 것이다.
인생의 여정도 잘 입고, 멋진 것을 체험하고, 근사하게 지내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좋지만, 역시 영혼을 나눌 친구와 함께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몇번이나 들었다. 마음이 허전해 괜히 여기저기 그리운 사람들에게 엽서만 잔뜩서서 매일 숙소 프론트에 맡겨두었다.
캐나다로 떠나오던 날 인천공항에서 아줌마 파마를 한 할머니들과 구리 빛 주름이 가득한 할아버지들을 봤다. 아마 그들은 나이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닐텐데 들일과 세상 풍파에 시달린 탓에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 앞에는 아주 짙게 화장을 하고 각이 진 키큰 아가씨가 무심하게 귀찮게 아무도 듣지 않는 설명을 하고 있었다. 여기 인천 국제 공항은 규모 ...... 평의 높이 ...... 으로 가운데 기둥을 하나도 쓰지 않은 특수공법으로 지어졌으며. 바로 공항을 구경하러 온 시골의 어른들이었던 것이다. 가슴이 미어졌다. 화장을 곱게하고 예쁜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이 가벼운 가방을 끌고 이리 저리 다니고, 유학을 가고 여행을 가고 아예 이민을 가는 사람들과 바로 그 공항을 구경하러 돈을 모아서 관광버스를 타고 와야하는 시골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은 행색이며 분위기가 너무 대조되었다. 방학을 맞아 어떤 이는 캐나다며, 유렵이며, 호주며 미국으로 가면서 잠시 지나치는 이 공항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 할머니가 생전에 어딘가 무슨 이름없는 충남의 관광지를 갔다오시더니 몇 번이고 ’참 좋더라. 좋더라.’하셨던 생각이 어우러지면서 맘이 무거워졌다. 한동안 말을 못하다가 끓는 마음이나 가라앉히려고 ’야 정부에서 전 국민에게 일정한 시기가 되면 한 나라를 선택해 여행할 수 있도록 해주면 어떨까?’ 하고 누군가 옆에 있는 친구에게 얘기했다. 내가 세상을 어둡게 보기만 해서 그런가. 공항에 몰려온 시골 관광객들같은 장면에 덜컥 눈물이 나오는 건.
Banff에서 와서 좀 마음이 화해가 되었다. 아마 그 공항에 몰려든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은 시골로 돌아가서 신나게 공항 얘기를 할 지도 모른다. 안내를 하는 그 여자는 촌스런 관광객들을 몰고 다니는게 챙피하고 지루했겠지만, 그런 안내에 신경쓸 필요 없이 그냥 두리번 두리번 거리는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즐거우셨을 것이다. Banff에 있던 내가 인천공항에 있던 그분들보다 훨씬 지루하고 비참하고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언제나 여행의 참맛은 어디에 가느냐가 아니고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고, 영혼을 나눌 친구와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