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미래잃지않고살길백일상’ 이렇게 따닥따닥 붙인 글씨가 핸드폰을 열 때마다 뜨도록 입력해 두었다. 백일상 선생님. 그는 왠지 다른 사람이었다. 오후 5시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고, 바쁘게 퇴근해가는 다른 교사들 틈에 묻혀가지도 않고, 그는 혼자서 허리를 바짝 굽혀야 폼이 나오는 구식 싸이클을 타고 운동장을 쌩쌩 달렸다. 가끔씩은 양손을 놓고 타기도 했다. 운동장에는 몇개의 겹치는 타원이 그려지고...
그는 혼자 물상실에 남아서 아이들과 실험을 했다. 과학에 소질이 있는 여자 아이 셋, 남자 아이 하나가 바로 그의 조교이자 동료 연구자였다. 그가 연구한 것은 물질마다 굴절률이 다르다는 광학 실험이었다. ’화학교육’을 전공한 그가 한번은 파동과 빛이 가장 신비로운 과학의 영역이라고 했다. 나를 데리고 목욕탕을 갔던 그날도 탕 속에 앉아서 계속 손가락으로 물결을 만들고 두 물결이 겹치는 것을 보고, 나에게 무언가 설명해 주었다. 운동장에 남아있는 아이들과 비이커와 알콜램프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훌륭한 과학선생으로서 그를 기억하기 보다는 삶을 진지하고 아름답게 산 청년으로서 그를 기억한다. 음악선생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조금씩 배운 피아노도 나중에는 간단한 반주를 틀리지 않고 칠 수 있었고, 그가 쓴 시들과 그가 그린 그림들, 그리고 구리 동선을 굽혀서 만든 작품들도 아주 훌륭했다.
그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그 해 여름 바로 내가 정치적인 이유로 해직된 조용진 선생님을 위해서 서명운동을 시작하고, 학교 교문앞 시위를 주도했다가 정보과 경찰의 조사를 받고, 학교로 부터 처벌을 받게 되는 일련의 사건이 터져 나오면서였다.
일은 저질렀지만 나는 그 일을 감당할만큼 배짱있는 놈은 못되었다. 암담한 시간들이 지나고 겨울이 되었다. 연합고사를 준비하면서 나도 보통 중3학생이 되었다.
갑자기 백일상 선생님은 자기 집에 가서 하루 자고 오자고 하셨다. 그날 그는 나와 다른 친구 하나를 데리고 명동에 갔다. 롯데 백화점을 10층부터 내려오면서 구경했다. 선생님은 사지도 않을 목걸이며 귀걸이의 값을 묻고, 어떤 때 어떤 것을 선물하면 좋냐고 아가씨에게 묻기도 했다.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던 선생님에게 아가씨들은 늘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했고, 활짝 웃어 보였다. 넥타이를 여러 개 보시더니, 정작 백화점 옆에 골목에 리어카 장수에게 1000원 짜리 넥타이를 두 개 사셨다. ’이렇게 사면 한 1년은 입겠는 걸.’하셨다.
다음은 남대문 시장 별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여기 저기를 다니시다가 지친 우리에게 파전을 몇 장 사주셨다. 그 파전집이 제일 괜찮다면서... 그는 이태원 사람이었으니 아마 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리어카를 몰고 소리를 지르고, 냉수를 팔고, 그런 장사하는 사람들 틈을 다 지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너희들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는 해방촌에 어느 허름한 쓰레트 집에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나는 그가 서울대 출신이고 늘 자신감있으며 교양있게 행동했기 때문에 부자집 아들이라고 생각했었다. 남산을 올라가면서 ’여자들은 뭐든 보이면 먹고 싶어하니까 나중에 걸으면서 데이트를 하려면, 먹을 것이나 가게가 하나도 없는 길을 걷는게 돈을 절약하는 방법이지. 여기 남산은 그래서 참 좋단다.’하고 얘기해 주셨다. 우린 그날 저녁 선생님과 목욕탕에 가서 서로 등을 밀어주고, 우풍이 심한 방에서 이불을 덥고 선생님의 시와 과학과 미술에 대해서 한참을 듣다가 늦은 밤에 잠이 들었다.
내가 심난할 때 해방촌을 골목을 몇 시간씩 걷는 것은 바로 그 날의 기억때문이다.
그해 성탄절 나는 뜻하지 않게 백일상 선생님으로 부터 편지를 받았다. 노란 편지지에 타이프로 친 시였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른 다는 것을 아는지, 평강이 공주가 아니었다면 온달과의 이야기가 아름다울 수 있을까?’ 세월이 갈 수록 선생님의 시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성탄절인사도 없는 성탄절 편지에 그는 마지막 인사대신
’재선이의 마음 속에 간직된 아름다운 미래를 잃지 않고 살아가길 빈다.’라고 써주었다.
백일상 선생님, 1993년부터 그는 세상에 없다. 아니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했던 모든 것들에 깃들어 함께 보이지 않는 영으로서만 살아 있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세상을 먼저 떠난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의 수고와 희망과 사랑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가 그의 마음 속에 간직했던 내면의 이상들과 희망을 이어달리기를 하듯 받아 달리는 삶을 사는 것일 것이다.
그를 생각할 때, 나는 심한 자괴감과 영감, 용기를 동시에 얻는다. 그와의 만남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을 유비적으로 체험하는 계기였다.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한 만큼,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을 즐기던 그의 모습도 하나도 닮지 못하고 있다. 경찰에게 연금되어 있던 조용진 선생님에게 쵸콜렛을 잔뜩 사들고 두려움 없이 찾아들었던 순수한 백 선생님의 모습도 내게는 없다. 모든 여선생님들에게서 아름다운 면을 읽어내고, 자기 가난을 비관하거나 하는 일도 없이, 결국은 귀여운 초등학교 선생님을 찾아 아주 짧은 결혼생활을 하셨던 그런 용기도 내겐 없다. 나는 너무 무겁고, 주눅들고, 영악하며, 천박하고, 잇속에 밝다.
"선생님 죄송해요."
핸드폰을 열 때마다 이렇게 속삭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