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목자 주일

2014. 5. 19. 오전 6: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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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목자 주일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 이 착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과 분노, 슬픔 속에 있습니다. 이해관계로 얽히고설킨 소위 "해피아", 물욕에 눈이 먼 사람들, 그들을 제대로 관리 감독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 그 정부의 장단에 맞춰 춤추는 언론사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마저 이익을 탐하는 가라지들 … 등 모두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시장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살아 왔습니다. 그것도 기꺼이 우리 부모, 형제, 자식들의 생명까지도 내 맡긴 채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 친구들, 한국인 모두를 위로하시고 나서 "이 사고를 계기로 윤리적,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당부십니다. 엉뚱한 데로 넘나들면서, 도둑과 강도로 돌변하는(요한 10,1) 우리 모두에게 '양들의 문'(요한 10,7)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우리는 알고, 느낍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수많은 '벗'의 생명을 구한 선생님들과 학생들, 승무원들과 어른들의 착한 마음씨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을, 그들이 우리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의 죽음이 바로 우리의 죽음이기 때문에 더욱 가슴 아픈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어둠의 골짜기'(시편23, 2)를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오래 오래 주님 집에 살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러한 이들을 일컬어 '숭고한 보통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요한 10,3)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시편 23,1) 착한 목자를 따라서 '고난을 견디어 내면서 선을 행하는’(1베드 2,20)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난 소녀가 맨 먼저 하는 일은 어린 버끄리(양)들을 꼬옥 안아주는 일이다. 아픈 데는 없는가, 젖은 잘 먹었는가, 소녀는 금세 안다. '아기 버끄리를 안은 소녀'의 한 구절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사진 에세이 중하나지요. 뒤에 이어지는 소녀의 말입니다. "우리 동네 버끄리는요, 제가 안아주면 나아요. 많이 아픈 애들은요, 밤에 안고 자면 다 나아요."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목동(목자)는 어머니 같은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껏 '착한 목자'가 아닌 '그저 그런 삯꾼'으로 살아왔습니다. 삯꾼이 목자가 되기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부르시어 목자로 만들어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이제는 동의하겠습니다. 아니,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고 약속하시는 '착한 목자'의 숭고한 뜻에 목숨을 걸겠습니다. 그분이 '원수들 보는 앞에서 차려주시는 상을 받고, 넘치도록 가득한 잔' (시편 23,3)을 들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김성수 베네딕토 신부(문화미디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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