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가족사진
오래전 일입니다.
많이 아끼고 정을 주었던 젊은 친구를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처참한 그 친구의 시신을 수습하고 영안실에 안치한 후 돌아오면서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침묵하고 계신 당신보다 살아있는 그 친구가 당신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허무하게 데려가야만 했습니까?" 하며 울부짖듯 원망 섞인
항의도 했습니다.
대학교수가 된 친구 곁에 순하고 착한 아내, 노부모, 그리고 예쁜 두 아이.
친구의 집에 자랑스레 걸려있던 가족사진은 '완벽한 가족이 바로 이런 모습이구나'
하며 부러움을 느낄 정도로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으로 그 가족사진은 절망에 빠진 한 가족의 모습을 대변하는
흉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노부모, 아직 초등학생인 두 아이, 오로지 남편만을 믿고
따르며 뒷바라지해 온 젊은 아내. 누구 하나 가정을 이끌어나갈 여력도 없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암담한 가족의 냉혹한 현실만이, 한때는 완벽했던
'가족사진'과 함께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복음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제자들에게 있어 주님과 함께하던 삶은, 제 친구가 죽기 전의 가족사진처럼
행복하고 완벽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에겐 자기 인생과 미래에 대한 긍지였고 희망이었으며,
지금까지의 것들을 모두 버리고 따를 만큼 가치가 있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태양과도 같았던 스승이 너무도 무기력하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느꼈을 극도의 실망감은, 마치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듯한 처연함,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암담하고 참혹한 현실 앞에서 이제 그들은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절망의 도시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엠마오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과 동행하십니다.
예수님의 처참한 죽음의 영상만을 가슴에 담은 그들. 스승의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 삶의 구심점이 사라져버린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절망감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노을이 질 무렵까지 동행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주막에 들러 빵을
떼어주실 때에야 '아, 이분이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미 예수님은 사라지고, 그저 충격에 넋이 나간 그들만 남게 됩니다.
이렇게 두 제자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해후를 합니다.
이 만남을 통해 그들은 우리의 생각과 관념, 논리와 상식을 뛰어넘는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심을 체험합니다.
엠마오는 '따뜻한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엠마오'가 되어 언제나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제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인생길의 고비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믿음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가족과 관련된 날들이 포진되어 있는 주간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늘 곁을 지켜주시는 그분과 함께 따뜻하고 든든한
'가족사진'을 우리의 마음속에 남겨봄이 어떨까요.
-차원석 토마스 신부(서울대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