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4일(다해)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오늘 전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대단하였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우리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신 분, 죽음을 물리치고 살아 계신 분을 만나 뵙고
기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어, 악행의 끈을 끊고 사랑과 순종으로
주님을 섬기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며 다스리게 하십니다.
입당송:1베드 2,2 참조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여라.
너희는 그 젖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으리라. 알렐루야.
제1독서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사도 5,12-16
화답송
시편 118(117),2-4.22-24.25-27ㄱㄴ(◎ 1)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또는
◎ 알렐루야.
○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론의 집안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
제2독서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묵시 1,9-11ㄴ.12-13.17-19
부속가 〈부속가는 자유로이 할 수 있다〉
파스카 희생제물 우리모두 찬미하세.
그리스도 죄인들을 아버지께 화해시켜
무죄하신 어린양이 양떼들을 구하셨네
죽음생명 싸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불사불멸 용사께서 다시살아 다스리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복음 환호송:요한 20,29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알렐루야.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요한 20,19-31
영성체송:요한 20,27 참조
네 손을 넣어 못 자국을 확인해 보아라.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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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향기:상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거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그분의 ‘진짜’ 죽음을 부인합니다.
제자들조차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얼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났다니.' 상상 밖의 일이기에,
단지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부활을 증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다른 무엇이 필요해 보입니다.
'무엇을 더 보여주어야 할까요? 병자들을 고쳐주고, 빵을 많게 하
는 기적을 다시 반복해야 할까요?'
우리는 기도를 바치면서 그 기도가 응답의 형태로 증명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에도 그것을 뒷받침해 줄 표징이 필요한 법인가 봅니다.
오늘 복음은 소위 '토마스의 불신앙'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
토마스에게는 의문의 1패. 사도께서 들으시면 섭섭해하실 듯합니다.
'불신앙의 사도'라는 오해에도 불구하고, 토마스의 태도와 요구는
아차 싶을 정도로 놀랍습니다.
증명을 위해 요청한 것이 고작 '상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상처'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모시던 스승이라는 증거였습니다.
상처가 남아있는 몸은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천상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오지도 않으셨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말끔한 모습도, 타보르산에서 눈부시게 빛나던 모습은
더욱더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그리도 처참하게 달리셨던 모습으로, 그분은 두 손과 옆구리에
못 박히고 창에 찔리신 상처를 그대로 지니신 채 돌아오셨습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며 죽음을 받아들인 그 자국은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증거였습니다.
상처를 고스란히 지니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괜찮아. 너희로 인해 상처를 받았지만. 너희가 내게 등을 돌렸지만,
괜찮아, 나는 괜찮아!"
부활하신 그분이 지니신 상처는 우리를 향한 용서의 표징입니다.
-염동국 루카 신부 야당맑은연못 협력사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