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해를 해야 하는가?
살아가다 보면, 상처를 입을 때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상처를 주는 그 누군가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
절친한 벗이라면 그 상처는 더욱 더 아픕니다.
그래서, 미움과 증오가 생기고, 관계가 단절되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단절의 상황을 맞게 되는 경우를 잘 보여줍니다.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을 때, 단둘이 말해보고, 한둘을 더 데려가 말해보고,
교회 공동체의 이름으로도 말해보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위치를 보면, 그 내용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의 비유와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흔일곱 번 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화해의 기쁨과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죄를 짓고 상처를 준 형제를 다시 얻는 방법에 그 무게가
있습니다.
그 방법은 그를 만나 나누는 "대화"와 그를 위해 청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인간은 인격체(persona)입니다.
인격체의 신비 중에 하나는, "언어의 표현"을 통해서만 속마음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원하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그 속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물어야만 합니다.
또한 인격체는 "변화 가능성"을 가집니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본다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몸과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도 그렇습니다. 어제의 죄인이 회개를 하고
변화되어 선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형제를 버리고 관계를 단절하기 전에, 대화를 나누고 변화되기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화해와 용서는 우리에게 기쁨이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고백할 때 장미나 선물을 주곤 합니다.
선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선물을 주는 상대방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바로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하느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우리가 형제의 잘못만을 바라보고 그들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선택이 놓여있습니다.
하느님을 거부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용서와 화해의 기쁨을 맞이하시겠습니까?
-이현승 다미아노 신부 (평내 협력사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