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이웃을 향하는 사랑의 발걸음
"신부님은 어떤 공부를 하세요?"라는 질문에 저는
"제가 비윤리적인 사람이라 윤리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한번 웃고 넘어가곤 합니다.
그러던 언젠가 처음 뵙는 자매님께서
"윤리 공부하시면 무척 깐깐하시겠네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처음 뵙는 분께 첫 대화에 받은 질문이라 당황했었고 그 질문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습니다.
혹시나 제가 불친절했던 것은 아닌지, 그 자매님께서는 왜 윤리신학을
공부하면 깐깐하다고 생각하시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윤리는 깐깐하고 엄격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행동의 잘잘못을 가리고 그에 따라 죄의 가볍고 무거움을 정하며,
그 죄에 따라 사람을 단죄하고 벌을 주는 그러한 좁은 의미의 윤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목을 하면서도 신자분들께 하느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보다 무엇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규정에 대한 판단을 더 많이
요구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윤리라는 것은 하느님 앞에 선 우리의 존재를 깨닫고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부르심에 어떻게 기쁘게 응답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지난 주일에 들었던 참행복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자비와
사랑을 적극적인 방식으로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을 미워하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에 기쁘게 응답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세상의 방식과는 다른 가르침이 우리에게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요
그리스도인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임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해 이 세상의 방식을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인간의 존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자유롭게 창조하신 우리의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신성함에 참여할 수 있는 복된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의 존재는 다른 이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존재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처럼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선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그분의 자녀로서 살아 숨쉬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 삶은 우리를 옭아매는 속박과 형식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과 이웃에게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기쁘고 설레는
사랑의 발걸음이 됩니다.
-이학준 미카엘 신부 (해외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