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교구 탄생의 일등공신 정하상(2) - 신앙생활과 교회재건 운동

2010. 7. 19. 오후 1:36:03

글자
정하상 바오로
 신앙생활과 교회재건 운동
 
 


1. 정하상의 신앙생활과 교회재건 운동

정하상은 수차례에 걸친 박해로 인해 집안에 남아있는 천주교 서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구전으로 어머니로부터 교리를 배웠다.

남 달리 건강하고 성격이 꿋꿋했던 그는 마침내 20세 때 단신으로 상경해 천주교 신앙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그는 옷은 물론 먹을 양식조차 없었던 때가 많았으나 묵묵히 참아내며 천주교의 진리를 찾는데만 열중했다고 한다.

 

이 때 정하상은 학문과 도덕을 아울러 갖춘 유명한 교우인 조동섬(趙東暹·1738∼1830·세례명 유스티노·권철신의 사위)이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함경도 무산(茂山)에 귀양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기서 그는 교리를 배우고 학문을 익히기 위해 20여세의 어린 몸으로 낯설고 험악한
천리길 여행을 외로이 떠났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 집에 머물면서 교리와 한문을 배우는 한편 교회의 발전책을 도모하였다.
정하상이 천주교 신부를 맞아 들이기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 것도 조동섬의 지도와 격려에 의한 것이었다.

 

정하상은 서울에 다시 올라와 여신도 조증이(趙增伊)의 집에 기거하면서 신유박해로 십여년 이상 폐허가 된 조선교회의 재건을 위해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조직화하는 등 교회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주역들은 초기 천주교 도입과 관련된 인물들의 2세가 중심이 되었다.
정하상을 비롯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 홍낙민의 아들 홍우송, 주문모신부에게 세례받은 이여진, 이여진의 사촌 신태보 등이 그들이다. 한편 정하상은 이 땅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주교를 상대로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2. 성직자 영입운동-북경을 9차례 오가다

정하상은 1816년 동지사(冬至使) 통역관의 하인으로 위장하여 북경에 들어가, 그곳에서 주교를 만나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교리연구를 하는 동시에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회에서는 전교회 간의 알력과 여러가지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한 사람의 성직자도 조선에 파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북경교구의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정하상은 그 뒤에도 15년간에 걸쳐 무려 아홉 차례나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 5천리의 길을 북경까지 내왕하면서 꾸준히 청원을 계속하였다.

1823년부터 정하상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선교회의 실질적 지도자로 일을 맡아 보면서 역관(譯官)으로 북경과의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 조신철(趙信喆) 등을 밀사로 파견하여 북경교회와의 교섭을 계속하였다.

이렇게해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1825년에는 유진길 등과 연명으로 로마교황에게 직접 청원문을 올려 조선교회의 딱한 사정을 알리는 동시에 선교사 파견을 거듭 요청하였다.

이 청원문은 북경주교의 배려로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경리부로 보내졌고,그 곳 책임자인 움피에레스(Umpierres) 신부의 의견이 첨부되어 1827년 교황청에 접수되었다.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1831년 9월 9일자로 조선교구의 설정이 선포되고, 초대교구장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전교성직자였던 브뤼기에르(Bruguiere, B.) 주교가 임명되었다.

3. 조선교구로 설정되면서 주교님과 신부님을 맞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1834년말 조선에 파견된 청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의주 변문(邊門)에서 맞아들이고, 이어 1835년(헌종 1년) 1월에는 모방(Maubant, P.P.) 신부를, 이듬해 1월에는 샤스탕(Chastan, J.H.) 신부를,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조선교구 제 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L.M.J.) 주교를 맞아들였다.

이리하여 조선교회는 비로소 교구장인 주교, 전교자인 성직자 그리고 교구 신자를 가지는 명실상부한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정하상은 국내로 들어온 주교와 신부들에게 말과 풍습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전교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 교회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정하상은 학문과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에 서소문 앵베르 주교로부터 라틴어와 신학교육을 받았고 곧 성직자가 되기 위해 선택되었던 인물이었다.

4. 순교

이로써 그는 조선인 최초의 신부가 되기로 결정되어 있었으나, 1839년(헌종 5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앵베르 주교가 순교하고, 자신도 6월 1일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9월 22일에 순교함으로써 그의 간절한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하상은 형장으로 가는 수레 위에서도 만족한 웃음을 띠고 기뻐했다고 전하며, 8월 15일 45세의 나이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유진길과 함께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79세로 10월 18일 순교했고, 동정서원을 했던 여동생도 42세의 나이로 11월 24일에 순교했다.

한편 그는 체포될 것을 미리 짐작하고 한국인이 저술한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작성해 두었다가, 체포된 다음날 종사관(從事官)을 통하여 당시 재상인 이지연(李止淵·1777∼1841)에게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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