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양업 신부는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사람이다. 그의 생애는 오랫동안 김대건 신부의 활약과 순교에 묻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앙을 증거한 관점에서 볼 때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전형적인 피의 증거이고,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은 모범적인 땀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2. 사목활동-죽음
최양업은 1850년부터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계속되는 박해를 피해 깊은산골에 숨어사는 신자들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국땅에 들어온 그는 서울에서 하루를 머물고 충청도에 있는 페레올 주교를 만난 다음 여독이 풀리지도 않은채 다음날 전라도에서부터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6개월 동안 5개도 5천리를 순회하는 가운데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신자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다. 건강이 악화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대신하여 더 많은 공소를 돌보아야 했기에 피로와 궁핍을 감수하면서 교우촌을 돌았다. 순회를 하지 않을 때에는 절골(충북 배티의 한 교우촌)에서 동생들로부터 부모의 순교에 관한 증언자료와 여러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였다.
1853년 2월초까지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최양업 신부는 그들을 간호해야 했고, 전국 각처에 있는 12,000여 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어야 했으므로 본국인이면서도 병들지 않고 신자들을 다 찾아다니기에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최양업 신부는 1852년부터 1854년 사이의 사목활동에서 체포의 위기, 공소의 습격 등의 잦은 박해로 선교사들 중 가장 많은 고난을 겪었다. 한편 그는 교우촌을 방문하던 중 가짜 교우 때문에 한겨울 강추위와 능욕에 고통을 당하여 기진맥진한 상태로 한밤중에 공소를 떠나야 하는 수난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사업을 위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러기에 거리가 먼 지방과 중요하면서도 전교하기 힘든 지방의 성무 집행은 최양업 신부가 맡아 매년 7,000리가 넘는 거리를 걸어야 했다. 그의 관할지역은 5개 도에 두루 산재해 있었고 공소만도 100개가 넘었다. 수시로 일어나는 사적인 박해는 최양업 신부의 전교여행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동네에서 추방되고 고발되는 등 도처에서 중대한 위험을 겪어야 했다.
이같이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개종과 용감한 입교자들로 말미암아 위로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길의 사나이'로 불릴 정도로 인생의 대부분을 객지에서 보내며 그 얼굴이 햇볕에 그을어 새까맣게 타서 갓끈자국만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다녔다.
최양업 신부는 12년간 온갖 고난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목한 덕분에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때인 1861년 6월 15일, 영남지방 전교를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활동 상황을 보고하려고 상경하던 도중 경상도 문경에서 갑자기 쓰러져 40세의 아까운 나이로 사망하였다.
최양업 신부와 친하게 지낸 페롱 신부는 '최 신부의 복사가 내게 와서 최 신부의 사인(死因)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가 사망한 것은 과로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작년의 소란으로 인해 그의 성사집전이 아주 어려워졌고, 그래서 하루에 80 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다.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떠나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한 달 동안 나흘 밤밖에 잘 수 없었다.'고 하였다. 장례식은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여러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배론 신학교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시신은 신학교 뒷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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