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의 증거자 최양업 신부(1) - 출생

2010. 6. 28. 오후 4:42:02

글자
최양업 신부님
출생-유학-입국
 
 


최양업 신부는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사람이다. 그의 생애는 오랫동안 김대건 신부의 활약과 순교에 묻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앙을 증거한 관점에서 볼 때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전형적인 피의 증거이고,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은 모범적인 땀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1.출생-유학-입국

최양업 신부는 1821년충청도의 홍주 다락골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모두 뒷날 순교로 일생을 마쳤다. 최양업의 집안은 이미 그의 증조부인 최한일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이래 대대로 신앙을 이어왔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최양업의 아버지는 홍주 다락골에서 한양으로, 다시 한양에서 과천의 수리산으로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최양업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세 때인 1836년 당시 조선에서 선교하던 프랑스 신부 모방에 의해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면서 이듬해인 1837년 6월 7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신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1838년 11월에는 최방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1839년 4월에는 중국에서 일어난 민란을 피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했다가 반년 후인 11월에 마카오로 되돌아오기도 하였다. 1842년 세실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시 김대건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마카오를 떠났으며, 최양업은 김대건이 떠난 지 5개월 후에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최양 업은 조선에 입국할 때까지 한시도 안정이 없는 떠돌이와 같은 생활을 7년이 넘게 계속하였다. 최양업은 잠시 상해에 머문 후 같은 해 10월에 요동에 당도하였으며, 외몽고인 소팔가자로 가서 중단되었던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1844년 12월경 최양업과 김대건은 삭발례와 부제품을 연달아 받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본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는 만주와 요동과 외몽고 일대를 헤매면서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1845년 1월 김대건이 의주를 통해 입국에 성공하자, 이듬해 1월에 최양업도 두만강을 건너 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 경비병에 체포되어 입국에 실패하고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와야 했다. 같은해 12월 말 조선에서 온 밀사를 만나 입국을 꾀하기 위해 만주의 심양으로 갔으나, 바로 그해에 조선에서 있었던 대규모의 박해에 관한 소식만을 듣고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남겨두었다.

지금까지 나는 내 포교지 밖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나도 답답하고, 듣는 신부님도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발길은 달리고 뛰고 있으나 얼굴은 무겁게 수그러집니다. 이는 나의 죄악과 빈곤과 허약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풍부한 자비심에 희망을 갖고 하느님의 섭리에 나 전체를 맡깁니다. 그리고 "너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라.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말할지 일러주실 것이다."라고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말한다는 것은 비단 설교의 은총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하는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 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심양에서, 1846.12.22, 르그레주아 신부께)


1846년 말, 다시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조선 국경 변문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그는 김대건 신부와 교우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의 국경 감시가 더욱 심해져서 해로를 통해 입국하기로 하고, 홍콩에 머물며 순교자 현석문이 쓰고 페레올주교가 불어로 번역한 순교자 일기인 [기해일기]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1847년에는 고군산도 쪽으로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배가 난파하여 실패하였고, 1849년에는 백령도 부근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이때에도 실패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에 사제서품을 받게 되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의 나이 28세 였다. 그는 다시 요동으로 떠났으며 그해 12월초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통해 입국할 수가 있었다. 그가 입국을 시도한지 실로 7년 반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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