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이사야 50,4-7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제2독서 필리피 2,6-11
6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복음 마태오 26,14ㅡ27,66

수십 년 전, 알래스카의 자연보호 지역에 사슴과 늑대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정부 당국은 이렇게 함께 살다가는 약한 사슴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지요. 그래서 사슴의 천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늑대를 모조리 없앰으로 인해 사슴의 안전을 지켜주기로 계획했고, 실제로 실행했습니다. 그 후 늑대는 완전히 사라졌고, 10년간 4,000여 마리의 사슴이 10배가 넘는 42,000마리로 증가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슴의 안전을 지켜주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자, 예기치 못한 결과가 찾아왔습니다. 글쎄 늑대의 위협이 없자 사슴은 점점 게을러졌고, 운동량의 감소로 인해 체질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차츰 그 수가 줄어들어 오히려 처음의 숫자인 4,000마리 이하가 된 것이지요.
정부 당국은 다시 사슴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허사였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동물학자가 없앴던 늑대를 투입하라고 권고했고, 다시 투입하자 그때부터 사슴들은 다시 숫자가 늘기 시작했습니다. 사슴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늑대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고 또 뛰어다닌 것이지요. 사슴은 건강해졌고 그래서 그 숫자도 늘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슴과 늑대가 함께 있으면, 힘이 약한 사슴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 사슴을 오히려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오히려 천적인 늑대였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 역시도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통과 시련. 정말로 감당하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그래서 제발 내 곁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내 자신을 더욱 더 성장시켰고 지금의 내 자신이 있도록 만듦으로 인해, 어쩌면 오히려 고마움의 대상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과 시련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거부하기 보다는, 이를 통해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감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지를 이미 다 알고 계셨지요. 즉,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겪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지니신 당신의 몸으로 견디어내기에는 너무나도 큰 고통과 시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있었고, 이 아버지의 뜻을 철저히 따라야 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불만을 먼저 던지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불평불만이 터져 나올 때 십자가상에 계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불평불만을 던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먼저였던 예수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철저히 하느님 뜻에 따를 때, 우리 역시 부활의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만큼 귀중한 것은 없다. 또한 시간만큼 낭비하기 쉬운 것도 없다.(윌리엄 펜)
시계침이 없는 시계

올 초 겨울, 갑곶성지에 방문했다가 보게 된 시계입니다. 아마도 지금 안식년을 보내고 계신 김종성 신부님의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요. 시계침이 없는 시계. 전혀 쓸모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이러한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서 시계침을 뽑았습니다. 돌이킬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다시 출발할 수 있게 해주소서.”
시간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이 아닐까 싶더군요.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서 시계침을 뽑아버리는 간절함. 그러나 이렇게 시계침을 뽑아도 시간은 계속해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기에 받아들이고 다시 출발할 힘을 달라고 말합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해 계속해서 연연하는 우리들. 지금 이 순간. 곧바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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