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2012. 1. 17. 오전 2:00:18

글자
자유로운 이단자,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태양을 보다>, 발터 니그, 분도출판사, 2011
 
2012년 01월 09일 (월) 16:19:55 한상봉 기자 isu@catholicnews.co.kr
 

발터 니그(Walter Nigg). 스위스 루체른에서 태어난 발터 닉은 괴팅겐, 라이프치히, 취리히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취리히 대학에서 교회사 교수로 재직했던 인물인데, <위대한 성인들>이라는 책을 통해 유명해졌다. 그는 예언자와 신비가들에 대한 책을 써왔는데, 특히 이단자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에게 ‘이단자’는 ‘실패한 성인’이었으며 ‘교회의 잘못을 바로잡는 가치있는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그의 저작 한 권이 최근에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 태양을 보다>(2011)이다.

 

   
 

이 책에서 발터 니그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를 ‘고난당한 인간’으로 소개한다. “부모님은 내가 집안에 들어가면 털이 덥수룩한 큰 개가 집 안에 들어온 것처럼 꺼림칙하게 여겼다”고 전하는 빈센트는 늘 봉두난발이었으며, 사람들은 그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는 어느 자화상에서도 자신을 미화하지 않았으며,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비쳤다. 그는 부르주아의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다만 자화상들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눈길, 무엇으로도 매수할 수 없고, 따라서 거짓을 허락하지 않는 눈길로 관찰자를 바라본다”고 발터 니그는 표현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가 수많은 페이지에 걸쳐 우리에게 제시한 것을 단 한 페이지에 표현했으며, 무엇보다 빈센트는 ‘고난을 당한 인간’이었다. 러시아의 역사는 그런 인간을 ‘폭력을 견뎌 낸 자’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모든 불운이 다 고난은 아니다. 진정한 고난만이 인간을 고귀하게 한다”고 전하는 발터 닉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빈센트의 파란곡절 많은 현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그가 자신에게 닥치는 고난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그 안으로 점점 더 깊이 성장해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난 속에서도 열렬히 하느님을 찾았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뿐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예술에서 종교성을 천착해 들어간 발터 니그는 빈센트가 19세기 중반 네덜란드 남부의 브라반트의 시골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시골 공기를 마시며 자랐고, 목사였던 아버지에게서 종교적 영향을 받았다. 목사관에 살던 빈센트는 인문주의 전통에 따라 이름다운 것을 순수하게 즐겼으나, ‘교리가 아니라 주님’을 표어를 내세운 진보 성향의 흐로닝언 학파에 가까웠다.

빈센트는 여가에 성경을 주로 읽었으며,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찰스 디킨스와 조지 엘리어트, 에밀 졸라,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그는 한 때 미술품 매매에 종사했으나, “탐욕은 곧 예의바른 도둑질”이라고 여기며 사장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 끝에 해고되어 런던에 가서 감리교 학교의 수습교사로 자내기도 했다. 그는 런던 외곽에 사는 노동자들에게 “슬픔이 기쁨보다 낫다”고 설교했으며, 점점 저항할 수 없는 종교적 갈증에 시달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뿐이었다. 그리고 “브라반트의 농부들은 너무도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데, 그런 삶을 견딜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불쌍한 여인들은 무엇을 삶의 버팀목으로 삼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모습,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놀라운 능력과 매력이 이 가련한 이들을 받쳐 주는 기둥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민했다.

그는 종교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 교회만 정해 놓고 다니지 않고, 네덜란드 개혁교회, 루터 교회, 가톨릭교회, 심지어 유다교 회당까지 찾아갔다. 왜 그러는지 누군가 묻자 “다른 교회에서는 하느님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하고 되물었다. 하느님에 대한 열망으로 그는 네덜란드어 성경을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로 번역했으나, 결국 “나도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일하고 싶었다.

무자비한 종교적 열정이 그를 삼켜버렸다

빈센트는 스물넷의 나이에 부모의 허락을 얻어 신학공부를 하러 암스테르담에 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빈센트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성범>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 책을 “참으로 심오하고 진지하여 마음이 격앙됨 없이, 경외심 없이는 읽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렇게 동생 테오에게 고백한다.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본성이 소박하고 단순한 사람들과 여자들과 어린이들에게는 드러나는 일들을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한다. ... 그것은 바로 영원한 것, 놀라운 것에 대한 갈망이다. 인간은 이것을 얻지 못하는 동안에는 완전히 얻을 때까지 대충 만족하며 편안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위대한 인간의 업적에서 드러나는 내적 의미다. 그들은 무언가를 생각한 위대한 사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찾아 헤매고 일했으며 더 많이 사랑한 사람, 격랑이 치는 삶의 바다로 노 저어 간 모든 사람이다.”

그는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했지만, 희랍어는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분노와 좌절감에 휩싸인 빈센트는 고전어 교사였던 멘데스 다 코스타에게 물었다. “저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승에서 짊어져야 할 운명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고 싶습니다. 이런 일을 원하는 저 같은 사람이 이런 끔찍한 공부를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무자비한 종교적 열정이 그를 삼켜버렸다. 빈센트는 자기를 벌하기 위해 곤봉으로 몸을 때리고, 추운 겨울에 헛간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고, 육식을 거부하며 중세의 성자들처럼 몸의 반항을 엄격하게 다스렸다. 당시 빈센트는 복음의 기쁜 소식 대신에 이런 난폭한 금욕주의에 기울었다.

광산촌에서, 감옥을 열어젖힐만한 사랑으로

   
 
결국 아버지는 그를 브뤼셀에 있는 선교학교에 보냈다. 학문적 지식보다 실무를 배우는 이 학교를 마치고, 빈센트는 동정심에 이끌려 보리나주의 탄광촌으로 갔다. “이곳은 어둡고 음울한 곳이다. 첫눈에 이곳은 모든 것이 슬프고 죽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노동자 대부분은 열병에 걸려 여위고 창백하다. 수척한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고생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고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여자들은 창백하고 시들었다”고 빈센트는 보리나주에 대한 첫 인상기를 적었다.

온 삶을 어두운 땅 밑에서 보내는 그들은 일요일 외에는 하늘의 햇살과 빛을 볼 수 없었다. 어린이들도 작은 수레를 옮기는 일을 하고, 눈먼 말도 수레를 끌었다. 빈센트는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교회 전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단순함을 추구하는 그의 의지에 따라 아주 간소한 형태로 전하고 싶었다. 광부들은 처음에 이 빨강머리 젊은이를 조롱했으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빈센트를 이내 받아들였다. 그가 마련한 모임에서는 교회에서 흔히 느껴지는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냉혹한 거리가 없었다. 그는 광부들에게 회개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무섭게 진노하며 광부들을 왜소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사람을 위협하는 심판의 말을 하기에 그들의 삶은 너무 힘겨웠다.

빈센트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고난과 삶의 노고가 얼굴에 서려있는 광부들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빈센트는 자신도 굴뚝청소부처럼 온몸에 검댕 칠을 했고, 광부들과 똑같은 가혹한 운명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가진 돈과 옷을 그들에게 나눠주고, 군복상의와 포장용 천으로 직접 지은 옷을 입었다. 그리고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세들어 살던 빵집을 나와 초라한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겼다. 길바닥에서 자주 잠을 잤으며, 마른 빵과 시럽을 먹으며 광부들과 똑같이 비참한 형편으로 살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런 빈센트의 모습을 두고 “그것은 미친 사람의 행동이었는가?” 묻는 사람이 있었다. 빈센트는 여기에 “주님이신 예수께서도 미친 사람이었다”라고 답했다. 그의 내면에는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열정이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갱내에서 사고가 발생하자, 의사도 포기한 중환자들을 돌보고 그들의 목숨을 살렸으며, 파업이 일어나자 노동자 편에 섰다. 빈센트는 관리자들을 찾아가 불쌍한 광부들의 요구를 지지했으며, 관리자들은 선교사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면서 그를 밖으로 쫓아냈다. 광부들은 그를 신뢰했다.

빈센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어주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는 진지하고 깊은 마음은 절대적인 힘으로, 압도적인 마력으로 감옥 문을 열어젖힌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죽음 속에 머무른다. 하지만 교감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생명이 일어난다.”

발터 니그는 “빈센트의 사랑의 행위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을 때 복병의 습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빈센트를 선교사로 채용한 브뤼셀 선교위원회가 빈센트의 행위를 불쾌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목사의 지위에 맞게 행동하지 않고 노동자들과 똑같이 되고 싶어 하는 빈센트의 처신에 놀란 것이다. 결국 빈센트는 다시한번 선교위원회 목사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불순종을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는 다만 “옷 두 벌을 가진 이는 못 가진 이에게 나누라”는 복음 말씀을 실천하려던 것이었는데, 선교위원회는 빈센트가 성직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고 판단했다.

이 일을 경험하면서 빈센트는 “어중간한 신앙생활이 복음의 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부르주아 사회가 낳은 ‘적당한 온도의 그리스도교가 드러내는 권태가 아니라, 관습을 완전히 뛰어넘는 종교적 열기만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끈다고 여겼다.

교회를 떠나 신앙으로, 그림을 통해

 

   
 

선교위원회에서 해고당한 뒤 받은 정신적 충격은 빈센트에게 삶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후로 빈센트는 정통 그리스도교에서 돌아섰으며,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는 “완고해지고 경직된다”고 경험한 빈센트는 “돼지 얼굴을 한 정통파 목사들”을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으며, 신학자들은 “차가운”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대학은, 적어도 신학에 관해서는, 완전히 사기 사업이며 바리사이의 위선을 양성하는 학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앙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빈센트는 “나는 그리스도교의 친구가 아니다. 창시자께서는 숭고한 분이셨다. 하지만 오늘의 그리스도교, 나는 그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빈센트는 “불신앙 가운데 서 있는 일종의 신자”라고 느끼며 살았다.

“내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목사들의 설교, 경건을 내세우는 위선자들과 목이 뻣뻣한 사람들이 지껄이는 교리를 믿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믿는 것은 나와 거리가 멀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있다는 것, 죽어 박제가 된 하느님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뜻이다.”

빈센트는 그리스도교의 살아있는 핵심을 구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전통의 딱딱한 껍질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어둠의 시간에 빈센트를 구원한 것은 그림이었다. 원초적이고 탁월한 예술가의 자질이 스물일곱 살 때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빈센트는 전문적인 미술수업을 받은 적도 없었고, 화법도 몰랐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그림을 그렸던 그에게 주어진 것은 마른 흑빵 한 조각과 커피 몇 모금이었다. 그처럼 가난은 그에게 익숙했다. 남들이 입다 버린 옷을 고쳐 있었고, 너덜너덜한 신발은 그의 가난을 증거 했다.

이처럼 생존을 위한 가혹한 투쟁을 하고 있을 때, 빈센트를 도와준 유일한 사람은 동생 테오였다. 빈센트는 이 형제애를 “나에게 너 말고는 친구가 없다. 비참한 느낌이 들 때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고 썼다. 이처럼 실크해트를 쓰고 런던 시내를 다니던 목사의 아들이 노동자의 옷을 입은 화가가 되었지만 빈센트는 슬프지 않았다. 그는 내적 욕구에 따라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노동자 계층에 속한 사람이라고 자처했으며, 의사가 친절하게도 “철공소 직공이신가 봐요”라고 말해 줄 때 너무 기뻐했다. 이처럼 빈센트는 보리나주에서 만난 광부들에게 신의를 지켰다.

빈센트에게는 점잖은 숙녀보다 하녀가 훨씬 더 아름다웠으며, 신사보다 노동자가 더 흥미로웠다. “나는 이 평범한 처녀 총각들에게서 힘과 생명력을 발견한다. 이 힘과 생명력이 지닌 특이성을 그대로 묘사하려면 대단히 위대한 예술가의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고갱의 원시인 예찬이 문명에서 도피하는 것이었다면, 빈센트가 노동자에게 끌린 것은 소박함에 대한 사랑, 부패되지 않음, 순수함에 대한 사랑이었다.

창백한 얼굴, 우울한 눈빛에 감전된 사나이

 

   
 

프랑스 혁명을 ‘현대의 복음’이라고 말했던 빈센트는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사람들’과 식탁을 나누면서, 심각한 곤궁을 겪는 상황을 바로잡거나 구제할 수는 없어도 “그 상황에 동감하고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빈센트는 안온한 종교적 환경에 살던 목사인 아버지와도 결별했는데, “우리는 부모님과 삼촌들이 속한 곳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옛것보다는 새것에 충실해야 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특히 나 자신을 어디로 내몰아 가야 하는가? 사람들아, 우리가 할 일에 우리 영혼을 바치자. 가슴으로 일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자”고 말했다.

빈센트의 종교적 감성은 ‘선포’에 집중되었다. 무지한 인간이 마침내 “오! 하느님, 하느님은 없습니다”라고 기도할 때 “하느님은 비로소 시작하시는 것 같다”고 전했다. 빈센트는 몸을 구부리고 땅을 일구는 사람을 그림으로써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얻을 수 있으리라”라는 옛 진리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가난하고 노동자를 그리면서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모든 것이다”라는 진리를 드러내려고 했다.

빈센트가 사촌누이에게 퇴짜를 맞고 클라시나 마리아 호르니크(시엔)와 함께 살게 된 사연이 크게 다르지 않다. 낮에는 세탁부로 일하고 밤에는 삶의 가혹함을 몸으로 겪었던 이 매춘부에게서 빈센트는 ‘한없는 매력’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에서 ‘고통의 성모’를 느꼈다고 고백하는 빈센트는 벌거벗은 채 두 팔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여인을 그린 ‘슬픔’이란 작품을 그렸다. 술주정뱅이이기도 했던 시엔을 빈센트가 받아들인 것은 기성 도덕관념마저 뛰어넘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인 ‘연민’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복음을 실현하는 행위였다. 이를 두고 발터 닉은 ‘도덕을 초월한 도덕’이라고 말했다.

카리스마적 사실주의

 

   
 

발터 니그는 빈센트의 예술을 ‘카리스마적 사실주의’라고 말했는데, 빈센트에게는 사람뿐 아니라 자연 역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빈센트는 궁색한 가옥들, 무료급식소, 수용소나 다름없는 양로원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황폐한 몰골의 노인과 넝마주의를 그렸다. 그는 신바람이 나서 쓰레기 더미의 신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목가적 측면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드러내는 혹독함과 거친 모습도 사랑했다. 떨어지는 잎사귀에 깃든 부드러운 우수와, 가끔은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도 지치게 하는 황무지조차 그의 사랑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그는 주의 깊게 볼만한 가치가 있는데도 무시당하는 사물들에게 사람의 주의를 돌리도록 애썼고, ‘울고 있는 노인’이란 작품에서 보듯이, 감상적인 그림이 아니라, 세상에서 위로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눈물을 표현하려고 했다. 톨스토이가 민담으로 한 일을 빈센트는 그림으로 했다. 서민을 모델로 삼아 서민을 위한 그림을 그리며, 노동자의 집이나 농가에 걸어놓기에 알맞은 그림을 그렸다. 갱내에서 일하는 광부는 ‘깊은 심연’에서 나온 인간이었으며, 직조공은 꿈꾸듯 명상적이다. 그리고 농부는 ‘현대의 퇴폐를 밝고 우둑 솟아오른 기념비’와 같은 존재이며, 영원한 자연의 일부로, 성경의 인물처럼 묘사했다.

빈센트를 ‘카리스마적 사실주의’라고 부르게 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이 그림에서 사람들은 직접 땅을 파 일구었던 그 손으로 감자를 집어 먹는다. 빈센트는 그 속에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노동자의 정직한 노동을 표현했다.

빈센트는 브라반트의 농부들과 보리나주의 광부들을 그리다가, 파리에서 인상파 화가들을 접했다. 인상파는 삶을 긍정했으며, 온갖 다양한 색채를 띤 대도시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그러나 꿈처럼 아름다운 무희들을 그린 드가의 그림 등 인상파의 그림들을 빈센트는 ‘세련된 노년다움’이라고 여겼다. 인상파 화가들은 세상을 온갖 빛의 파동으로 심하게 분해시켰으며, 그들의 세계관은 ‘허상의 세계’에 머무는 소멸해가는 생활감정이었다. 그는 여기서 인상파의 화법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 정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찢긴 가슴을 위로하는 예술

   
 
자연의 부풀어 오른 젖가슴에 익숙한 빈센트는 곧 파리를 떠나 프로방스 지방의 아를(Arles)로 갔다. 이때가 빈센트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북쪽의 둔중한 어둠이 가시고, 영원히 생성하는 우주와 결합되어 있다는 느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여기서 ‘위에서 내려온 빛줄기’에 맞은 듯이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그렸다. 삶을 처음으로 긍정하게 되었다. ‘씨뿌리는 사람’을 그리면서, 시간의 밭고랑에 영원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여전히 고단하지만 신성한 노동으로 헤진 ‘노동자의 신발’도 성화처럼 그렸다.

그는 특히 해와 해바라기, 밀밭과 노란 의자 그림에서 보듯이 ‘노란색’을 많이 사용했는데, 발터 니그는 ‘삶에 도취된 상태’라면서, 이 시기의 빈센트 작품을 “어둠에서 빛을 향해 뚫린 경쾌함”이며 “엄숙함을 이겨낸 유머”라고 표현했다. 빈센트가 그동안 겪은 실존의 무게가 마침내 하느님의 여유만만한 미소를 만났다고 전했다.

빈센트의 그림은 이처럼 종교적 목표에 닿았다. 그는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을 위로하는 예술’을 하고자 갈망했다. “음악처럼, 그림으로 위로의 말을 하고 싶다. 이제 이 영원의 표지인 하늘의 빛과 함께 그리고 싶다. 이제 이 영원의 표지를 색채들의 빛줄기에서, 그것들의 진동에서 찾고 있다.”그리고 이 위로는 “삶의 회피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삶을 분명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위로의 사람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빈센트는 전통적 방식에 따라 성경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기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가 존경하던 밀레는 어릴 때부터 성경만 읽었지만 성경을 소재로 한 그림은 단 한 점도 그리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들라크루아와 렘브란트만이 제대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렸다고 여겼다. 밀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그렸을 뿐이다. 빈센트는 올리브산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 대신에 농부들이 올리브 수확하는 장면을 그릴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훌륭하게 그려진 배추 한 포기가 조악하게 그려진 예수의 부활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은 일상의 사물 안에서도 신성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힌 길가의 풀에서도 노동자 거주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피곤하고 억눌린 모습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빈센트에게 캔버스에 그려진 볼품없이 작은 방은 단순한 침대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고난이 몸을 뉘는 자리였다. 이처럼 빈센트는 화가들이 상징을 통해 현실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여겼다.

   
 

태양에 눈멀다

빈센트는 여전히 예수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는데, “예수는 평범한 노동자에서 어떤 다른 존재로 자신을 발전시킨 사람, 연민과 사랑, 자비, 진지함을 지닌 인격체”라고 믿었다.

종교화를 그리지 않겠다던 빈센트가 렘브란트, 도미에, 밀레,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모방해서 종교적 작품을 여럿 남겼다. 그런데 렘브란트의 ‘나자로의 부활’을 모사한 작품에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간단하게 삭제하고, 대신에 그리스도가 서 있던 자리에 강렬한 태양을 그려 넣었다. 빈센트에게 선인과 악인을 모두 비추는 태양은 신성을 드러내는 시간을 초월하는 상징이었다.

“그 태양을 바라보는 일을 빈센트가 감행하자 태양은 베일을 벗어던지고 그를 눈멀게 했다”고 발터 니그는 말한다. 태양을 향해 날아간 빈센트는 그 열기로 타 버리고, 그에게 발작이 왔다. 일 년 이상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빈센트였지만 그의 인격은 파괴되지 않았다.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상식 밖의 종교적 관념’이 떠올랐고,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힘들게 작업하니까 아주 좋다. 그래도,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종교에 대한 끔찍스러운 나의 갈망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럴 때면 나는 별을 그리려고 깊은 밤 한가운데 서곤 한다.”

그러나 발작은 반복되었고, 창작력이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되자 빈센트는 어느날 저녁 들판에 나가 자기 가슴을 겨냥해 총을 쏘았다. 그가 마지막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남긴 마지막 네덜란드 말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였다. 헨리 나웬이 항상 되뇌던 ‘아버지의 집’으로 1890년 7월 29일, 빈센트는 영원히 돌아갔다. 그렇게 그의 고난도 끝났다. 빈센트의 시신을 교회의 영구차로 옮기는 것을 그곳 목사는 허락하지 않았다. 친구 몇 명만이 그의 무덤가에 모였을 때, 동생 테오는 이렇게 말했다. “형은 미소 지으며 죽어 간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댓글 3

  • 2012년 1월 17일 오전 11:14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뿐....

  • 2012년 1월 17일 오후 7:03

    감사합니다!!

  • 2012년 1월 22일 오전 6:08

    아, 감동입니다! 그 예전부터 친근했고 불행한 화가였다고만 알았던 고호의 삶에 이렇듯 깊은 믿음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는 의지가 있었음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아를르의 밤하늘의 별처럼 길이 빛날 이여. 당신의 천재적 고통스러웠던 삶, 그러나 희망의 노란색채로 우리에게 다가왔던 그 아름다움은 영원합니다

│ 이 │이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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