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갈릴래아에서의 전도로부터 메시아로서의 공적인 직무를 시작하신 예수께서는 가장 먼저, 네 명의 어부를 제자로 뽑으셨습니다(마태 4,18-22). 그렇다고 예수께서 어부들만을 제자로 선택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태오라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실 뿐만 아니라, 그의 집에 들어가시어 음식까지도 함께 나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 줍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동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그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신 예수께서는 그를 계기로 당신께서 펼쳐 보이시는 선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히십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거칠게 저항했던 바리사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한 마디로 모세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고, 하느님의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는 종교적 신념을 갖고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대 원칙을 온몸으로 살았던 그들은 종교 지도자로서 백성에게 율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가르쳤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실천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는가 하면, 율법 제일주의적인 폐쇄적 사고로 기피와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율법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스며들 공간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버린, 그들의 폐쇄적인 사고였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논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머무를 공간마저 앗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논쟁에 있어서 중심에 자리하고 있던 세리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세리란 세금을 과다하게 징수함으로써 유다인들로부터는 원성을 들어야 했지만 지배 세력인 로마로부터는 충직한 종으로 대접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런 세리를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고에 젖어 있던 바리사이들이 보는 앞에서, 세리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어 음식까지 나누셨으니, 그들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표명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율법이 유다인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그 당시에, 예수께서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그러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표본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렇듯 특수 집단이나 특별한 민족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나라임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나라를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나아가 ‘자기 집착’이라는 우리 스스로가 쳐 놓은 울타리를 허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 서울대교구 안병철 베드로 신부 |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2005. 6. 4. 오후 10:5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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