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6/1)

2005. 6. 1. 오전 8:39:58

글자
2005년 6월 1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토비트 3,1-11ㄱ.16-17ㄱ
그 무렵 토비트는 마음이 몹시 괴로워 신음을 하며 크게 울었다. 그리고 흐느끼면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 주님은 올바르십니다.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은 올바르며, 주님은 모든 일을 자비롭고 참되게 하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나를 기억하시고 나를 돌보아 주소서. 내 죄를 벌하지 마시고, 나와 내 조상이 알지 못하고 주님께 저지른 죄를 벌하지 마소서.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내주시어 약탈과 추방과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만방에 흩어져서 모든 사람의 이야깃거리와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고, 주님 앞에서 참되게 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주님의 갖가지 심판은 모두 참되십니다.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를 처치하시고, 명령을 내리시어 내 영혼을 나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그러면 나는 이 땅에서 떠나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나에게는 당치 않은 조롱이 들려오고 많은 슬픔이 나를 짓누르고 있으니,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주님, 이 고뇌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 주시고 영원한 곳으로 나를 보내 주소서. 주님, 나를 외면하지 마소서. 살아서 이 많은 고뇌를 겪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이 조롱을 듣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바로 그날 메대의 엑바타나에 살고 있던 라구엘의 딸 사라도 자기 아버지의 여종 한 사람에게서 조롱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사라는 일곱 번이나 결혼을 하였지만 사라가 그들과 부부 관계도 맺기 전에 아스모데오라는 악한 귀신이 그 남편들을 번번이 죽여 버렸다.
그래서 그 여종이 사라에게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당신 남편을 죽인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오. 당신은 이미 일곱 번이나 결혼을 했지만 제대로 결혼 생활을 한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당신 남편들이 죽었으면 죽었지 왜 우리를 때리지요? 당신도 그들을 따라 죽어 버리시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의 아들이나 딸의 꼴을 영 보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그날 사라는 마음이 몹시 슬퍼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 아버지의 집 이층으로 올라가 목을 매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생각을 고쳐 먹고 혼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러다가는 사람들이 내 아버지를 조롱하면서 ‘당신의 자식이라고는 딸 하나밖에 없는데 그 애가 괴로움을 참다 못해 목을 매고 말았구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나 때문에 연로하신 아버지께서 슬퍼서 돌아가시게 될 것이다. 나 스스로 목을 매는 것보다 주님께 간구하여 내 목숨을 거두어 가시도록 하는 편이 낫겠다. 그러면 이런 조롱을 더 듣지 않아도 되겠지.” 그때 사라는 창문을 향하여 자기 양팔을 벌리고 기도하였다.
바로 그때 토비트와 사라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라파엘을 보내시며 그 두 사람의 고민을 풀어 주게 하셨다.


복음 마르코 12,18-27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정해 준 법에는 ‘형이 자녀가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자기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에 칠 형제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었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둘째가 형수를 자기 아내로 맞았지만 그도 또한 자식 없이 죽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 일곱 형제가 다 자식 없이 죽고 마침내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부활 때에 그들이 다시 살아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
너희는 모세의 책에 있는 가시덤불 대목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글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거기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셨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너희의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 글은 2004년 6월 1일 새벽을 열며 묵상 글입니다.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습니다. 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표정이 어두어지는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방구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지요. 여자는 매우 난처했습니다. 이대로 남자친구 앞에서 방구를 뀌면 자기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꾹 참으면서 계속 생각했지요. 그리고는 마침내 한가지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애인을 안으면서 큰소리로 ‘사랑해’라고 외치면서 방구를 뀌기로 마음먹은 것이지요.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한 여자는 자신이 지금 몹시 급했기 때문에 그대로 계획을 실행했습니다.

남자의 옆으로 가만히 기댄 그녀는 마치 갑자기인냥 남자를 벌떡 안으면서 외쳤습니다.

“사랑해”

그리고 급한 방구를 살짝 뀌었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남자의 반응은 여자의 생각과 일치하지는 않았습니다.

“뭐라고? 니 방구 소리 때문에 못들었어.”

우리들의 모습도 이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남들 앞에서는 자신있게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유로 ‘사랑해’라고 외치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사랑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고 있는 대사제, 율법학자, 유다인의 원로들 역시 마찬가지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은 모두 로마 황제에게 주민세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민세로 바쳐야 했던 은화에는 로마 황제의 초상화와 ‘황제는 신의 아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어요. 사람모양을 본뜨는 것 자체를 우상숭배로 간주하던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동전을 사용한다는 자체가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열혈당원들은 ‘하느님 홀로 임금님’이라는 신념을 내세워 납세 거부운동을 벌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무척 난처한 질문을 합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는데요. 만약 예수님이 바쳐야 한다고 하면 민족 반역자에 신성모독자로 유다 백성들에게 고발할 작정이었습니다. 반대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한다면 로마 법을 어긴 정치범으로 고발할 마음을 먹고 올가미를 씌울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이들이 이런 질문을 던졌던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즉,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자기들보다 더 나아 보이는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위치를 점점 잃는다고 생각에서 나오는 하나의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우리들도 잘 알고 있듯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말로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했지,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고백이었던 것이지요.

우리들 역시 주님께 사랑의 고백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고백은 얼마나 진실한가요? 정말로 주님이 좋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의 고백을 하는지, 아니면 나의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사랑의 고백을 하는 것은 아닌가요?

나의 이익을 위해서 사랑의 고백을 한다면 주님께서는 아마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뭐라고? 너의 그 추한 모습 때문에 못들었어.”


나보다는 우리를 드러내는 오늘이 됩시다.



지미 카터의《 나이 드는 것의 미덕 》중에서

아내 로잘린과 결혼 후 52년을 함께 산 우리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다.

우리의 유대감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튼실해졌고 서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단 하루만 떨어져 있어도 마치 신혼 때 일주일이나 그 이상 바다에 나가 있었을 때처럼 왠지 외롭고 공허한 느낌이 든다.

나이 들면 젊었을 때보다 더 서로에게 헌신적이 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흥분과 모험과 성취가 가득한 매순간을 오로지 맛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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